옛사람의 향기

'열공'하라는 임금님의 절절한 꾸짖음

백영빈 사진
백영빈
장서각 왕실문헌연구실 연구원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는 5종의 국보와 29종의 보물이 간직되어 있다.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국보 2017년)’이나 ‘조선왕조의궤(朝鮮王朝儀軌)(보물 2016년)’처럼 비교적 최근에 언론에 오르내린 것 외에 나머지는 대중에게 그다지 어필되지 못하고 있다. 오늘은 장서각에 소장된 보물 가운데 ‘열공의 나라’의 깊은 뿌리를 보여주는 옛 문적 하나를 소개하고자 한다.

공식 명칭은 ‘정조어필-시국제입장제생(正祖御筆-示菊製入場諸生)’이며, 2010년 1월 4일 보물 제1632-3호로 지정되었다. 정조는 곧 조선의 제22대 국왕이며, 어필은 임금이 직접 붓으로 글을 썼다는 뜻이다. 그럼 ‘국제’는 무슨 말인가? 국제의 ‘국(菊)’은 국화꽃을 말한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국화는 날씨가 차가워진 가을에 서리를 맞으면서 홀로 피기 때문에 우리의 선인들은 그 모습을 고고한 기품과 절개를 지키는 군자에 빗대기도 하였다. 국화가 피는 9월 9일에 글짓기 시험[製述]을 치렀다는 것인데, 이 시험은 원칙적으로 성균관의 유생(儒生)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며, 여기서 ‘입장(入場)’이란 성균관의 시험장에 들어오는 것을, ‘제생(諸生)’은 곧 그 유생들을 말한다.

다시 이 보물의 이름을 풀자면 “정조가 직접 쓴 것으로서 국화 피는 시절 글짓는 시험에 시험장에 들어온 유생들을 훈시하다” 정도가 될 것이다. 이제 제목만으로도 반쯤은 본 내용을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정조는 스스로 임금이자 스승[君師]이라고 자처할 만큼 공부에 대단히 열심이었고, 자신의 호(號)를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이라 할 정도로 자부심도 매우 컸다. 실제로 정조의 글을 모은 《홍재전서(弘齋全書)》 100책의 규모는 동서의 어느 국왕에게서도 찾아보기 쉽지 않다. 이러한 정조가 말년(1798년)에 국제 시험일이 다가오자 시험 문제를 내야 하겠는데, 마침 기러기가 날아가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오만 지식이 머릿속에 가득한 정조는 바로 ‘촉을 안고 말하지 않아도 기러기가 맑게 우네[抱蜀不言 鴻鵠鏘鏘]’라고 문제적 시험 문제를 출제하게 된다. 시험 문제를 받아들고서 성균관 시험장에 내걸러 나갔던 승지(承旨 청와대 비서관 격)가 마감 시간이 다 되어 돌아와 보고를 하는데 그것이 가관이었다.

“시험 문제가 무슨 뜻인지를 몰라 답안을 작성한 자가 한 명도 없사옵니다. 모두 백지를 낼 기세입니다.”

정조는 참담한 심정이었을 것이다. 그래도 믿었던 성균관 유생인데! 정조는 곧바로 임금이 낸 시험 문제에 백지를 내는 경우가 어디 있느냐며 펄쩍 뛰고, 이는 성균관의 수치이며, 또 그들의 아둔함은 곧 정조 자신의 수치라고 하였다. 그래서 정조는 “임금이 제기(祭器)를 공경히 지키면서 예의(禮儀)로써 신하들을 거느린다면, 고요히 팔짱을 끼고 말을 하지 않더라도 정치가 저절로 닦여진다는 말이다. 그리하여 그 덕에 감화되고 교화가 행해져 그 감응이 밖으로 드러나, 기러기가 맑게 울고 백성들이 노래하여 찬미하게 되는 것이다.” 라고 특별히 직접 해설을 하며 질책과 당부를 겸하여 유생들을 훈시하고, 말미에는 정조답게 답안을 재작성할 것을 명한다. 이것이 정조 훈시문의 대강이다.

유생들을 꾸짖는 정조의 친필 훈시문(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제공

유생들을 꾸짖는 정조의 친필 훈시문(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제공)


당초 응시한 170명의 유생 가운데 다음 날인 9월 10일 새벽녘까지 143명만 답안을 제출하였다는 사실을 보고 받은 정조는 성에 차지 않았던지 9월 11일에는 2차 시험을, 9월 12일에는 3차 시험을 보이고, 최종적으로 11명에게는 상을 내려준다.

예나 지금이나 기성 세대의 눈에 신진(新進)은 부족해 보이는 모양이다. 정조는 “그대들이 이처럼 고루한 줄을 일찌감치 알았다면, 알기 쉽고 어렵지 않은 구절을 어찌하여 아끼고서 게시하지 않았겠는가.”라고 말하기까지 하였다. 유생들을 자극하려고 해서였을까? 정조는 “많이 공부한 그대들을 어찌 나이 어린 사학 생도(四學生徒)들에게 견주겠는가.”라고도 하였다. 이러한 혹독한 국왕의 트레이닝을 받은 유생들은 결국 나라를 떠받치는 동량(棟梁)이 되어 세종대왕 이후의 최대의 문화 융성을 선도하였다.

부존자원이 부족한 나라에서 맨손으로 태어난 이상 ‘열공’만이 나와 나라가 발전하고, 나아가 기러기까지 아름답게 노래하게 되는 태평 세상을 만들 유일한 길이 아닐까 한다.

dmg100@aks.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