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사람의 향기

조선시대 경험과 연륜의 우대, 치사(致仕)와 사궤장(賜几杖)

노인환 사진
노인환
장서각 고문서연구실 연구원

조선시대에 경험이 풍부하고 연륜이 많은 관원을 우대하는 제도로 치사(致仕)와 사궤장(賜几杖) 제도가 있다. 치사는 나이가 많은 관원이 관직을 사양하고 물러나는 것이며, 사궤장은 국왕이 연로한 관원에게 의자인 궤(几)와 지팡이인 장(杖)을 내려주는 것이다. 치사와 사궤장은 󰡔예기(禮記)󰡕에 수록된 ‘대부는 나이가 칠십이 되면 일을 그만두며, 만약 사직할 수 없으면 반드시 궤장(几杖)을 하사해 준다(大夫七十而致事 若不得謝 則必賜之几杖)’는 내용에서 전거를 확인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치사와 사궤장은 삼국시대부터 시행된 것을 볼 수 있다. 665년(문무왕 5)에 중시(中侍) 문훈(文訓)이 치사하였고, 664년(문무왕 4)에 문무왕은 김유신이 치사를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고 대신에 궤장을 하사하였다. 고려시대에는 연로한 관원이 치사를 청할 때에는 국왕에게 표(表)를 올려 요청하였고, 국왕은 치사교서(致仕敎書)를 내려 윤허하였다.


조선시대에는 『경국대전』에 치사와 사궤장 관련 조항을 수록하여 법제화 하였다. 당상관으로 치사한 관원은 일정한 직무가 없는 봉조하(奉朝賀)라는 관직을 받았고 조정의 의식(儀式)에 참석하였다. 사망할 때까지 녹봉을 받았으며 예조와 해당 고을에서는 해당 관원에게 술과 고기를 보내주었다. 관직이 1품에 이르고 나이가 70세 이상의 관원이 국가의 중대한 일에 관련되어 치사할 수 없으면 예조에서 국왕에게 아뢴 후에 궤(几)와 장(杖)을 내려주었다.

1774년(영조 50) 이최중 치사교서

1774년(영조 50) 이최중 치사교서

현종이 이경석에게 내린 궤(几)와 장(杖)

현종이 이경석에게 내린 궤(几)와 장(杖)

1668년(현종 9) 이경석 사궤장교서

1668년(현종 9) 이경석 사궤장교서

국왕은 왕명문서 가운데 최고의 권위를 상징하는 교서(敎書)를 통해 치사와 사궤장의 명령을 내렸다. 연로한 관원이 치사할 경우에 봉조하의 관직과 치사교서를 내려주었고, 치사를 허락하지 않을 경우에는 궤장과 사궤장교서(賜几杖敎書)를 내려주었다. 이러한 치사교서는 1746년(영조 22) 김유경(金有慶), 1774년(영조 50) 이최중(李最中), 1860년(철종 11) 조기영(趙冀永), 철종 연간 이헌문(李憲文)에게 내린 치사교서가 현전하고 있으며, 사궤장교서는 1668년(현종 9) 이경석(李景奭)에게 내린 사궤장교서가 현전하고 있다.


이경석의 경우에는 사궤장교서와 함께 현종이 내린 궤(几)와 장(杖)이 남아있다. 또한 이경석이 사궤장교서와 궤(几)와 장(杖)을 받을 때의 모습을 그린 『사궤장연회도첩(賜几杖宴會圖帖)』이 전해진다. 『사궤장연회도첩』에는 교서·궤·장을 맞이하는 그림, 현종이 내린 교서를 읽는 그림, 현종이 내린 어사주를 이경석에게 따르는 그림 등이 수록되어 당시 현장의 모습을 생생하게 담고 있다.


 『사궤장연회도첩(賜几杖宴會圖帖)』의 『지영궤장도(祗迎几杖圖)』와 『선독교서도(宣讀敎書圖)』
『사궤장연회도첩(賜几杖宴會圖帖)』의 『지영궤장도(祗迎几杖圖)』와 『선독교서도(宣讀敎書圖)』

1668년(현종 9) 이경석 사궤장교서

치사교서와 사궤장교서는 국왕이 연로한 관원을 제도적으로 예우하기 위하여 발급한 교서지만 정치적인 측면에서 발급된 사례도 있다. 예를 들어 1779년(정조 3) 9월에 정조는 홍국영(洪國榮)의 사직 상소를 윤허하면서 치사교서를 내려주었다. 당시 홍국영의 나이는 32세이었지만, 정조는 정치적으로 실각한 홍국영을 예우하면서 봉조하로 임명하였다. 홍국영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국왕이 관원에게 내리는 치사교서와 사궤장교서는 국왕과 신하 사이의 정치적으로 연관시켜 볼 필요도 있다.

nothing217@aks.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