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사람의 향기

더위야~ 물럿거라 세모시 옥색치마

이민주 사진
이민주
장서각 왕실문헌연구실 선임연구원

올 여름은 더워도 너무 더웠다. 필자가 태어나서 이렇게 더워본 적은 1994년 여름 이후 처음이었던 것 같다. 당시 매스콤에서는 에어콘이 파동이 났다는 뉴스가 흘러나왔다. 올해는 어느 지역에 정전이 되어 몇 천 가구가 고생을 했다는 뉴스가 그 자리를 대체했다. 에어콘은 있어도 이번에는 전기가 문제였다.

옛사람들은 어떻게 여름을 이겼을까? 여름의 시작은 단옷날 백저포로 만든 치마저고리, 바지저고리를 입기 시작하면서부터 본격화된다. ‘백저포’는 흰색의 모시를 뜻한다. 우리나라 모시에 대한 최초 기록은 ‘삼국사기’에 ‘신라에서 삼십승저삼단(三十升紵衫段)을 당나라에 보냈다’에서 시작되며, ‘계림유사’에 실린 ‘저를 모’(苧曰毛), ‘저포를 모시배’(苧布曰毛施背)라고 한 기록에서 저(苧)의 다른 이름이 모시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모시 한 폭을 30㎝ 내외로 볼 때, 10새의 모시를 만든다고 한다면 800올의 씨줄이 30㎝에 들어가야 한다. 모시의 굵기가 얼마나 가늘어야 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모시는 통상 7새에서 15새까지 제작했으며, 10새 이상을 세모시라고 한다. ‘고려사’에는 혜종 때 진나라에 보낸 모시가 ‘마치 눈 같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고품질이었으며, 고려의 특산물이었다.

김홍도, <길쌈>,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김홍도, <길쌈>,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이후 조선시대까지도 기록에 자주 등장했으며, ‘지리지’를 통해 질 좋은 모시의 생산지도 확인할 수 있다. 충남 서천군 한산면은 토양이 비옥하고 서해안에서 불어오는 해풍으로 인해 습할 뿐 아니라 여름 평균기온이 높아 모시가 잘 자랄 수 있는 조건으로, 모시 생산의 최적지이다. 한산모시가 특화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자연 환경은 물론 대대로 내려오는 모시 짜는 기술이 더해졌기 때문에 가능했다.

모시를 만들기 위해서는 수확에서부터 태모시 만들기, 모시째기, 모시삼기, 모시굿 만들기, 모시날기, 모시매기, 모시짜기, 모시 표백 등의 힘든 과정을 거쳐야 한다. 막대한 노동력과 기술이 집약되어야 한다. 먼저 모시를 수확하고 태모시를 만든다. 모시의 겉껍질을 벗겨내고 속껍질만 남겨 물에 담가 불순물을 제거하고 햇볕에 4~5회 반복해서 건조시킨다. 균일하고 가늘게 쪼갠 태모시가 모시의 품질을 좌우한다. 한산모시가 남다를 수 있는 것은 태모시를 쪼갤 때 칼 등의 도구를 사용하지 않고 아랫니와 윗니로 태모시를 물어서 균일하게 째는 전통방식을 고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작업을 하다 보면 이에 골이 파이고 깨지기도 한다. 그래서 이 과정을 ‘이골이 난다’고 한다.


여기에 세모시를 만들기 위해서는 균일하고 가늘게 쪼갠 실의 두 끝을 무릎에다 대고 침을 묻혀 손바닥으로 비벼 연결시키는 모시삼기가 이어진다. 모시삼기를 하다 보면 무릎이 피로 얼룩져 성할 날이 없었다고 한다. 올 수가 많을수록 가늘고 고운 모시가 되니 이에 골이 나고 무릎이 성할 날이 없어도 모시삼기를 포기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제 베틀에 모시를 걸고 짤 수 있도록 날실에 풀을 먹여 모시매기를 한다.

김준근, <그네뛰기>, 독일 함부르크박물관소장

김준근, <그네뛰기>, 독일 함부르크박물관소장

이런 공정이 모두 어렵고 힘든 일이지만 이보다 더 어려운 것이 바로 모시짜기이다. 모시 실은 건조하면 쉽게 끊어진다. 아무리 더워도 바람이 통하지 않도록 문을 꼭 닫고 눅눅한 상태에서 짜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6월 말 장마 때부터 8월 말 처서 전까지의 찜통 같은 무더위는 고운 모시를 짜는 가장 좋은 시기이다. 바로 삼복더위 속 찜통 같은 움막에 들어가 베를 짤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이기 때문이다.

힘들고 어려운 공정을 마치고 나면 이제 1필의 모시가 바리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정도의 세모시가 완성된다. 가족들의 건강한 여름나기를 기원하며 모시옷이 완성된다. 기산 김준근의 ‘그네뛰기’에서처럼 그네의 굴림을 따라 세모시 옥색치마의 치맛자락이 휘날린다. 더위도 함께 날린다.

mjlee815@aks.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