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학 포럼

고전소설에 투영된 조선 후기 무반(武班)의 소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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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호
한국학지식정보센터 문화콘텐츠편찬실 전임연구원

사람은 누구나 꿈을 꾸며 살아간다. 꿈을 이루기 위해 현재에 충실하려 노력한다. 실현 가능한 꿈은 현재를 살아가는 데 큰 원동력이 되지만, 실현 불가능한 큰 꿈은 오히려 사람을 무기력하게 만들기도 한다.

현대인의 꿈은 대부분 물질을 향해 있다. 물질이 신분 상승을 가능케 하기 때문이다. 로또 1등 당첨, 로또 아파트 당첨에 대한 열망은 돈이 최고의 가치가 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우리 선조들은 어떤 꿈을 꾸고 살았을까? 조선 후기에 태어나 일제강점기를 살다 간 무반가의 한 인물을 통해 우리 선조들의 꿈을 들여다 볼 수 있다.


조선은 신진사대부를 중심으로 구축된 국가였다. 사대부는 성리학을 바탕으로 국가 지배 이념을 수립하였고, 무력보다는 문치(文治)를 통해 국가를 운영하고자 하였다. 이로 인해 조선 사회에는 문(文)을 숭상하고 무(武)를 천대하는 인식이 팽배해졌다. 사대부는 양반(兩班)으로 불리기도 했는데, 양반은 문반과 무반을 아울러 칭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숭문천무의 인식이 팽배해짐에 따라 양반이란 말은 곧 문반을 의미하는 용어로 바뀌기 시작하였다. 이는 실제 관직 진출 과정에도 적용되었다. 조선 초기에는 사대부가 문반과 무반의 두 갈래 관직에 다양하게 진출하였으며, 문반과 무반을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었다. 쉽게 말해 군인인 아버지와 행정 관료인 아들이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양반의 숫자에 비해 관직의 수는 턱없이 부족해졌고, 기득권 세력은 관직을 세습하기 위해 양반 내에서조차 계급을 나누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한 번 무반에 진출한 가문은 문반에 오를 기회를 잃게 되었다. 문반 가문의 문반직 독점이 시작된 것이다. 이것이 조선 중엽부터 가속화된 문반과 무반의 계급 분화, 그 출발점이었다.

문반 가문 출신의 목표는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비롯한 선대들의 뒤를 이어 문반직에 진출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한정된 숫자의 문반직에 진출하는 것은 결코 녹록한 일이 아니었기에 많은 이들이 좌절 속에서 생을 마감하기도 했고, 어쩔 수 없이 선대의 권력을 통해 무반직에 진출하기도 했다. 그러나 무반직에 진출한 가문은 하위 계급으로 분류되었고 문반직으로 다시 복귀할 가망이 없었기에 문반 가문의 자제가 무반직에 진출하는 것은 큰 결심이 필요한 일이었다. 그렇기에 절실한 상황이 아니라면 평생 문과를 준비하다가 생을 마감하는 것이 오히려 가문에 누가 되지 않는 길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무반 가문의 상황은 어떠했을까? 문반 내에서도 계급이 분화된 것과 마찬가지로 무반 내에서도 계급의 분화가 있었다. 무반의 고위직 또한 일부 무반 가문이 독점하게 되었다. 이를 흔히 무반 벌열가라고 부른다. 무반 벌열가들은 세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또다시 혼인을 통해 카르텔(cartel)을 형성했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는 『무보(武譜)』를 편찬하였는데, 이 책은 조선 시대 무반 가문의 가계를 정리하고 본관별로 무과 급제자들의 성명을 기입하는 등 무반 벌열가의 번성 정도를 총망라한 책이었다.

삼화기연 표지

고전소설 삼화기연 표지

무반 벌열가로 분류될 수 없었던 하급 무반은 어떤 삶을 살았을까? 무반 가문 출신으로 내금위장(오늘날의 대통령 경호처장에 해당)까지 역임한 엄익승(嚴翼升, 1858~?)은 은퇴 후 50대 중반이던 1912년에 한문소설 <삼화기연>을 창작했다. 엄익승이 살아간 당대의 현실과 그가 창작한 소설을 통해 무반가 출신인 엄익승의 꿈을 살펴보자.


엄익승의 본관은 영월이다. 그는 무과에 급제해 관직에 진출하였으나 그가 속한 가문은 그의 앞길을 활짝 열어줄 만한 힘이 없었다. 오히려 엄익승에게 가문의 사활이 걸려 있었던 듯하다. 엄익승의 8대조가 정3품의 장악원정을 역임한 이래 그의 가문에는 오랫동안 관직자가 배출되지 않았다. 그런 엄익승에게 찾아온 기회는 바로 혼인이었다. 여동생이 당대 무반 벌열 중 하나인 언양김씨 가문에 시집을 간 것이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영월엄씨나 언양김씨 모두 양반이므로 두 가문의 혼인이 이상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당대의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두 가문 모두 『무보』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언양김씨가의 경우 당대에 고위 무관직을 꾸준히 배출하고 있었다. 이런 점에서 언양김씨가와 영월엄씨가의 혼인은 한쪽으로 많이 기울어진 모양새였다. 이 혼인이 가능했던 것은 여러 가지 원인이 있었겠지만, 김종원의 생모 또한 영월엄씨였다는 점과 엄익승의 여동생인 엄씨가 김종원의 둘째부인이었다는 점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엄씨는 김종원과 혼인해 1남 1녀를 낳았고, 엄익승의 급격한 승진은 김종원과 엄씨의 혼인을 전후로 한 1885년부터 1890년에 이루어졌다. 배경이 없던 엄익승은 사돈의 권력에 힘입어 승승장구했던 것이다.


영월엄씨 족보

영월엄씨 족보

엄익승은 관직에서 은퇴한 뒤 노년에 소설을 창작했는데, 그가 지은 소설에는 권력을 향한 욕구가 강하게 드러나 있다.

소설 <삼화기연>의 주인공 서대원은 몰락한 양반의 후예이다. 서대원은 이웃 마을에 사는 하경옥과 어릴 때 혼약을 맺었으나 가난하다는 이유로 정혼자의 아버지로부터 일방적인 파혼을 당한다.그는 이러한 상황을 이겨내고 문과에 급제했다. 이후 자연 재해로 고통 받는 백성을 구휼하고, 외적의 침입을 무찌르는 활약을 통해 이부상서(오늘날의 행정안전부장관)의 지위에 오른다. 그렇게 성공한 후에야 하경옥과 결혼할 수 있었다. 여기까지만 보면 가난했던 한 남성의 인생 역전이라는 아름다운 스토리이다. 그런데 서대원은 본인의 자녀들을 혼인시킬 때가 되자 자신이 당했던 철저한 차별을 고스란히 되풀이한다.

서대원에게는 두 명의 부인과 한 명의 첩이 있었다. 두 명의 부인에게서 난 아들과 딸은 적자(嫡子), 적녀(嫡女)이고, 첩에게서 난 아들과 딸은 서자(庶子), 서녀(庶女)이다. 서대원의 적자와 적녀는 모두 상서(오늘날의 장관) 등 문반가의 자녀들과 결혼한다. 반면, 서자와 서녀는 한결같이 무반의 자녀와 결혼한다.


<삼화기연> 속 주인공은 가난을 극복하고 과거에 급제해 가장 높은 관직에까지 오른 자수성가형 인물이다. 그런데 그 주인공은 자신이 겪었던 사회적 차별을 개선하려는 데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다만 현재의 제도적 차별을 이용해 가문의 위상을 드높이기만을 원한다. 사윗감과 며느리에 대한 소개 장면에서는 그 사람의 외모, 인품을 묘사한 뒤 부모와 조부모, 형제들의 관직 등을 나열해 놓았다. 혼인은 개인과 개인의 결합이 아닌 가문과 가문의 결합임을 여실히 보여준 것이다. 문무의 차별과 적서의 차별, 그리고 혼인에 대한 인식에 이르기까지 서대원 가문의 혼인 과정에는 엄익승이 살아간 당대의 시대상이 온전히 담겨 있다.

서대원 가문의 혼인 과정에 담긴 신분 차별적 요소들은 무반 출신인 엄익승의 소망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엄익승의 소망은 하급 무반을 탈피해 상급 무반으로 올라서고, 이를 바탕으로 더 나아가 상위의 문반으로 진출하기 위한 계획을 세웠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계획은 한 세대 내에서 이루어지기는 어려웠기에 엄익승은 후대를 위해 장기적인 계획을 세웠을 것임에 틀림없다.


신분 상승을 향한 무반가의 꿈, 그 꿈은 실상 현대인의 꿈과 다르지 않다. 타인과 평등하게 사는 것보다 타인과 끊임없이 자신을 비교하면서 타인의 위에 군림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은 변함 없이 지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신분제는 철폐되었지만, 오늘날에도 갑을 관계를 통해 지금껏 존재하는 신분제의 일단을 찾을 수 있다. 그리고 혼인은 여전히 신분 상승과 신분 유지를 위한 주요한 수단으로 활용된다. 최근 인터넷을 통해 항간에 떠돌던 “딸바보 아빠의 <사윗감> 공개 구혼” 이라는 서울 모처 아파트의 공고문은 우스우면서도 씁쓸한 현대의 단면을 보여준다. 고가의 아파트에 한 가족이 그 아파트에 사는 사람 가운데서 사윗감을 고르려는 모습에서 혼인을 통해 권력을 유지하려던 옛 사람들의 그림자를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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