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사람의 향기

문민통제*는 선진국 전유물?

(문민(文民)에 의해서 군대가 통제 ·운영되어야 한다는 원리)

양창진 사진
양창진
한국학도서관 한국학정보화실장

김종서, 권율, 강감찬을 생각할 때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에게나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다. 우리 역사를 통틀어 최고의 영웅으로 추앙받는 무인들이다. 절체절명의 국가 위기를 극복하거나 영토를 개척한 대표적인 영웅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런데 이들이 무인(武人)이 아니라 문과 급제로 관직을 시작한 문인(文人)임을 알고 있는 이들은 몇이나 될까?

김종서는 조선 태종(太宗) 5년(1405) 문과에서 23등으로 급제하였고, 권율은 선조(宣祖) 15년(1582) 문과에서 25등으로 급제하였다. 이들 중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권율’ 항목을 보면 ‘조선 중기의 문신·명장’이라는 정의로 시작한다. ‘문신’과 ‘명장’이라는 서로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단어는 유교적 선비가 갖추어야 할 덕목을 생각하면 꼭 불가능한 것만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국조문과방목의 김종서 문과급제기록

『국조문과방목』의 김종서 문과급제기록

유교적 소양을 제대로 갖춘 선비라면 육예(六藝)를 기본적으로 익혔다. 예(禮), 악(樂), 사(射), 어(御), 서(書), 수(數)를 육예라 하는데 이 중 사(射)는 궁술(弓術), 어(御)는 마술(馬術)이다. 태종실록 17권, 1409년(태종 9년) 3월 16일 기사를 보면 “세자(世子)에게 궁중(宮中)에서 활쏘기를 익히도록 명하였다. 우빈객(右賓客) 이내(李來)와 간관(諫官) 등이 그 옳지 못함을 진술하니, 임금이, ‘옛사람이 이르기를, ‘활 쏘는 것으로 덕(德)을 알아본다.’ 하였고, 또 이르기를 ‘그 재주를 겨루는 것이 군자(君子)의 도(道)라.’고 하였으니, 활 쏘는 것은 진실로 폐할 수 없다."고 할 정도로 왕자들도 기본적인 무예를 익히도록 했다.
다산 정약용(丁若鏞, 1762~1836)도


“나의 생각에는 예전에는 반드시 한 사람이 문ㆍ무를 겸해서 공부했다고 여겨진다. 그래서 공자(孔子)의 문하에서도 육예(六藝)를 통달한 이가 70여 명이나 되었다.... 지금 문ㆍ무를 나누어 각각 한 과거로 하는 것은 옛 뜻이 아닌데, 하물며 (무과에서) 전적으로 무예만 경쟁하고 덕행은 묻지도 않음이 옳겠는가?”(『경세유표』15권)


하고 문무 겸비가 중요하다고 주장하였다. 비록 조선이 문치주의 국가라고 하지만 유자들은 글만 읽는 것이 아니라 심신과 육체의 단련도 게을리 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바탕이 있었기에 국란을 당해서도 혈기 왕성한 무장들을 통솔하여 전장을 누비며 전투를 지휘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수양의 결과가 가져 온 긍정적 사례는 임진왜란 당시 권율의 이치전투 기록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왜장(倭將)이 또 대군을 출동시켜 이치(梨峙)를 침범하자 권율이 동복현감 황진을 독려하여 동복현의 군사를 거느리고 크게 싸웠다. ... 이날 황진이 탄환에 맞아 조금 사기가 저하되자 권율이 장사들을 독려하여 싸웠기 때문에 이길 수 있었다.(『국조보감』 31권.)


이치 전투는 왜적이 전라북도로 넘어 오는 것을 막아 곡창지대를 방어하는데 절대적인 역할을 한 전투로 권율이 임진왜란의 주역으로 등장하는 계기가 된 전투이기도 하다. 이 전투에서 지휘하던 지휘관이 부상당하자 권율이 직접 전투를 지휘했다는 기록이다.

우리가 너무도 잘 아는 이순신도 무신이기 이전에 유생으로서 문과를 준비하고 있었다고 알려진다. 《이충무공전서》 에 조카 이분(李芬, 1566~1619)이 쓴 이순신 행록(行錄)이 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원래 형들을 따라 유학을 공부하였다. 본래 유학은 문과를 대비한 것이다. 그러나 20세부터 무예를 배우기 시작하였는데 무과로 방향을 전환한 것에 대하여 여러 가지 주장이 있다. 그 중 하나가 조부 이백록이 중종대 기묘사화(己卯士禍)에 연루되어 후손들이 문과에 응시하는 길이 막혔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문과에 응시하지 못하면 무과도 원칙적으로는 응시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선조(宣祖) 1년인 1568년에 기묘사화의 원인이 되었던 조광조가 복권되었고 1573에는 이순신의 둘째 형 이요신이 진사(進士) 급제한 것으로 보아 문과를 볼 수 있는 자격은 충분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생각할 수 있는 다른 이유로는 문과 응시는 가능하나 급제할 가능성이 적어 무과로 바꾼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당시는 조선 개국이래로 정권을 잡았던 훈구파를 누르고 사림이 정계를 장악하기 시작할 때이다. 그래서 가난한 집안에서 고학하다시피 한 이순신은 가문의 후원을 받으며 공부한 쟁쟁한 선비들을 넘어서기 어려웠을 수도 있다. 그래도 문과를 준비하던 문장 실력은 『난중일기(亂中日記)』라는 명저를 남기는 계기가 되었다. 이순신은 한 번의 무과 낙방 후 두 번째인 1576년 무과에서 12등으로 급제하였다.

오늘날 전 세계 모든 민주국가는 헌법으로 군대의 최고 지휘 통수권을 문관(文官)인 대통령이나 총리가 가지도록 규정하고 있을 뿐 아니라, 직업군인의 신분으로 장관이 되거나 정치에 참여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그런데 민주주의 국가임을 자임하는 우리나라도 국방장관은 거의 군(軍) 출신이 독점한다. 군대에 대한 문민통제가 그만큼 어려운 것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그토록 싫어하는 조선은 완벽한 문민통제를 구현한 나라였다. 과거 급제 기록은 이것을 잘 보여준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조선시대에 있었던 제도를 다시 구현하려 애쓰는 현실이 아이러니처럼 보인다. 전통이라고 다 무시만 할 것은 아닌가 한다.

uridul@aks.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