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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학중앙연구원 온라인소식지 6월호 A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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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KS 이 땅의 문화를 찾아서
 
992년에 발견된 순창 성황 대신 사적 현판(淳昌城隍大神事跡懸板)[중요민속문화재 제238호]에 산성대모(山城大母)가 등장한다. 산성의 여신이 대모라는 것이다. 대모는 가문을 빛낸 위대한 어머니이기도 하지만, 가문에서 신격화한 어머니상이기도 하다. 다른 지역에서도 거구의 힘센 여성이 축성하는 성곽 설화가 등장하는데, 순창 대모산성에서도 힘센 과부가 성 돌을 들어서 성을 쌓는 축성 설화가 전해 오고 있다.
이 땅의 문화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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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순창문화대전」 속으로의 여행(2부)
한국학중앙연구원의 대표적인 사업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그 중 전라북도 순창군 지역 정보를 총망라한 「디지털순창문화대전」을 소개합니다. 디지털순창문화대전 사이트 http://sunchang.grandculture.net 「디지털순창문화대전」(http://sunchang.grandculture.net/)은 전라북도 순창군 지역의 디지털 백과사전으로, 순창군의 역사와 문화를 비롯해 정치·경제·사회의 발전상 등에 관한 다양한 자료와 정보를 집대성해 인터넷을 통해 누구나 쉽게 활용할 수 있게 제작되었습니다.
 2012년 4월 순창군과의 협약을 통해 추진된 이 사업은 2012년 7월부터 같은 해 11월까지 기초조사 연구를 통해 순창군의 향토문화 자원을 조사ㆍ분석하는 작업이 진행되었습니다. 이후 원고 집필 사업(2013년 6월~2014년 3월, 전주대학교), 멀티미디어 콘텐츠 제작 사업(2013년 10월~2014년 10월, ㈜이모션), 원고 윤문․교열 사업(2014년 5월~7월, ㈜휴머니타스), 영문화 번역 연구(2014년 5월~2014년 7월, 윤즈정보개발), XML 데이터 제작 사업(2014년 6월~9월, ㈜나라지식정보), 서비스 시스템 개발 사업(2014년 6월~10월, ㈜올인텍아이엔씨)이 수행되었습니다. 
  2012년 4월부터 2015년 4월까지 약 3년에 걸친 작업 기간을 통해 원고 집필, 윤문․교열, 멀티미디어 콘텐츠 제작, 영문화 번역 연구, XML 데이터 제작, 서비스 시스템 구축 사업이 진행되었고, 총 1,700개의 항목, 원고지 12,000매, 사진과 동영상 등 총 3,144종의 멀티미디어 자료를 담고 있습니다.  
「디지털순창문화대전」에 담긴 정보와 자료들은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사이트 및 지역별 사이트(순창문화대전), 대형 민간 포털(네이버, 다음, 구글 등)을 통해 언제 어디서나 이용할 수 있습니다.  그럼 순창군에 대해 알아보는 여행을 떠나보실까요? [홀어미가 쌓은 대모산성]
대모산성(大母山城)[홀어머니 산성]은 1975년 2월 5일에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70호로 지정되었으며, 전라북도 순창군 순창읍 백산리 산 55번지에 위치한다. 해발 150m 내외의 포곡식 산성으로, 산성 내에 연못과 우물이 있고 경천(鏡川)이 산성을 에워싸고 있다. 대모산성은 군창(軍倉)의 용도로 사용되었기에 군사 방어적 산성 기능도 하였을 것이며, 동시에 행정 치소(治所)의 읍성(邑城) 기능을 하였던 성곽으로 보인다. 고고학적 발굴 결과, 대모산성은 백제시대에 축조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순창군은 백제시대에 도실군(道實郡)이었으나 통일 신라기에 순화군(淳化郡)으로 바뀌었고, 고려시대에 순창군이라는 지명을 갖게 되었다. 그렇다면 대모산성은 백제시대 도실군의 고지(古址)였을 가능성이 높다. 대모산성은 백제시대 성곽 축조의 전통을 고려시대까지 유지하였고, 고려시대에 개축한 것으로 보고되었다. 대모산성이 백제시대의 치소성이었으리라고 추정하는 이유는 발굴 결과 백제시대의 기와가 다량으로 출토되었기 때문이다. 기와는 궁성, 관아, 사찰 건축물에 사용되었던 것이지 일반 민가에 사용되지 않았기에 대모산성은 도실군의 치소였을 가능성이 높다. 대모산성은 백제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행정의 치소였고, 관곡을 쌓아 두었던 군창이 있었던 곳이다. 조선 후기의 대모산성 기록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770년(영조 46)에 엮은 『문헌비고(文獻備考)』 권2 성곽 조에 “대모산성은 군의 서쪽 4리에 있다. 석축이며 주의는 780척이고 안에는 샘과 못이 각각 하나씩 있다. 원나라 초에 한 할미가 아홉 아들을 데리고 성을 쌓고 여기에 살았다. 많은 곡식을 모아 관곡을 삼았는데 지금은 폐해졌다[大母山城 在郡西四里 石築 周七百八十尺 內有池泉各一 元初有老駒率箕九子 築城居此 儲穀物 仍爲官穀 今廢]”라는 기록이 보인다. 조선 전기에 편찬된 『세종실록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보이지 않는 아홉 아들을 거느린 늙은 할미라는 축성의 주체가 조선 후기에 편찬된 『문헌비고』에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의 원나라 초는 1234년(고종 21)경 몽골이 고려를 지배하는 시점이다. 원나라 초는 대모산성의 축성 주체를 고려시대와 연관 짓겠다는 시대적 배경을 설정하고 있는 것이다. 할미가 아홉 명의 아들을 거느리고 있었는데, 이들이 성곽을 축조하고 그곳에 살았다는 데서 대모산성이라는 명칭이 유래된 것이다. ‘노구(老駒)’는 ‘노구(老嫗)’의 오기로 보인다. 이러한 오기는 당시 구전으로 내려오는 이야기를 문헌으로 기록하는 과정에서 생긴 착오였을 것이다. 아홉 명의 자식을 거느린 노구는 고려시대 당시 순창읍 일대에서 문벌지족(門閥之族)이 향촌 지배권을 형성하고 있었던 것을 말하며, 순창의 경제력을 자손이 번창한 가문에서 장악하였음을 시사한다. 아홉 명의 아들을 둔 노구는 문벌지족의 상징적 여성이고, 축성하였다는 점은 순창군의 행정력을 장악하고 있었다는 뜻인데, 그것은 당시 문벌지족만이 가능한 일이었다. <홀어머니가 쌓은 대모산성 전경> 전통 사회에서 노구는 마고할미 계통의 여산신(女山神)을 가리킨다. 노구는 훌륭한 문벌지족의 어머니가 신격화된 명칭이다. 노구는 아홉 명의 아들을 거느리는 홀어머니라는 뜻인데, 가문에서 훌륭한 어머니를 신격화하여 노구로 신화화한 것이다. 따라서 노구는 대모(大母)와 동격의 위대한 여성을 지칭한다. 대모는 위대한 어머니란 뜻을 갖고 있다. 당시 대모, 즉 위대한 어머니는 아들을 낳아 잘 기르고 훌륭한 아들로 키우는 능력을 가진 여성이었다. 이 가문의 대모들이 신격화되면서 마고할미와 결합하여 노구라는 신격이 등장한 것으로 보인다. 이 노구가 신통력을 발휘하여 아들 아홉 명을 거느리고 치소성의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노구가 아홉 명을 거느리게 되어 홀어미가 되고, 대모산성을 홀어미산성으로 부르게 된 것이다. 여기에서 아홉 명의 아들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중국의 산신 가운데 벽하원군(碧霞元君)이 있다. 벽하원군과 그 자녀 여덟 명을 모신 사당이 있는데, 그 여덟 명은 아들이 아니고 딸들이다. 이러한 중국의 산신 신앙이 전래하여 정착하는 과정에서 여덟 명의 딸이 아들로 바뀌어 여덟 명의 아들을 낳거나 아홉 명의 아들로 묘사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 후기는 장자 상속 제도와 남아 선호 의식에 따라 득남 기원 풍토와 가문의 계세 의식이 강렬하던 때라서, 대모산성 설화에서도 홀어머니가 아홉 명의 아들을 거느리는 모습으로 묘사된 것으로 보인다. 지금도 순창군은 ‘신설양(申薛楊)’의 명향(名鄕)으로 이름나 있다. 신설양은 고령 신씨(高靈申氏), 옥천 설씨, 남원 양씨를 가리키는 것으로 순창에서는 대표적인 문벌지족이었다. 「대모산성 성 쌓기 내기」연결 항목 <성황대신 사적 현판> 순창 성황 대신 사적 현판 연결 항목 대모산성의 성곽 설화에는 조선 후기 사회상이 반영되어 있다. 17~18세기 민간 문학과 민속 전승의 구전 문화가 발달하면서 민간 계층에서도 다양한 이야기들이 서로 복합적으로 얽혀 있는 현상이 나타난다. 대모산성의 축성 설화에도 서너 가지의 전승 이야기와 순창의 문화적 실상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 설화에 등장하는 설씨 총각은 옥천 설씨를 가리키고, 양씨 부인은 남원 양씨를 가리킨다. 옥천 설씨는 남성이고 남원 양씨는 여성이다. 옥천 설씨와 남원 양씨는 순창의 문벌지족과 지방 세력을 상징하는 성씨이기도 하지만, 신격화된 가문의 인물에 대한 표상이기도 하다. 고려시대 전통의 순창 성황신(城隍神)에서 성황대왕(城隍大王)이 설공검(薛公儉)[1224~1302]이고, 성황대부인(城隍大夫人)이 양씨 부인이었다. 이러한 성황 신앙의 전통이 대모산성의 성곽 설화에 반영된 것이다. 과부란 홀어머니인데, 남원 양씨의 이씨 부인은 고려 후기에 유복자를 안고 개성에서 홀로 낙향한 여인이었다. 고려 말 개성에서 남편의 과거 합격증을 안고 내려온 이씨 부인 연결 항목 대모산성의 노구는 고려 말을 시대적 배경으로 하고 있다. 원초는 원나라 초기로서 1230년(고종 17)대가 그 시점이다. 고려 말에 순창에서 성장한 지방 세력이 향촌 지배권을 행사하는 역사가 대모산성에 깃들어 있는 것이다. 순창에서는 고려 말부터 단오절에 성황제(城隍祭)가 연행되면서 성황 신앙이 크게 발달하였다. 순창의 성황신은 고려 말 실존 인물인 설공검이다. 설공검은 설신(薛愼)의 아들인데, 설신은 옥천 조씨(玉川趙氏)의 아들이다. 옥천 조씨는 팔자삼자등과(八子三子登科)를 이뤄 낸 훌륭한 어머니로 추앙되어 국대부인에 봉해졌다. 그렇다면 노구가 아홉 아들을 거느리고 대모산성을 쌓은 주체는 설씨 가문으로 보아야 한다. 여기에서 설씨 총각은 옥천 설씨 가문의 상징이며, 그 총각은 설공검을 묘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홀어머니가 쌓은 대모산성의 외벽 순창 삼인대의 절의 문화 순창 삼인대(三印臺)의 단경왕후 신씨(端敬王后愼氏) 복위 상소는 1510년(중종 5) 담양부사 박상(朴祥)[1474~1530], 순창군수 김정(金淨)[1486~1521], 무안현감 유옥(柳沃)[1485~1519]이 올린 것으로 조선 전기의 절의(節義) 정신과 사림 정신을 상징하는 대표적 사건으로 지칭된다. 「신비복위소(愼妃復位疏)」란 중종의 원비(元妃)였던 신씨가 반정 후 폐출되자 그 복위를 청하던 상소를 말한다. 신씨는 중종이 진성대군(晋城大君) 시절의 부인이었으므로 반정 직후 왕비로 책봉되어 예우를 받았다. 그런데 신씨는 반정에 참여하지 않은 신수근(愼守勤)의 딸이라는 이유로 반정 공신 박원종(朴元宗), 유순정(柳順汀), 성희안(成希顔) 등에 의하여 폐출되었다. 이 「신비복위소」는 반정공신인 훈구세력이 군왕을 핍박하여 신씨를 폐출한 부당함과, 반정의 대의까지 굴절시킨 전횡을 통렬하게 논박한 것이었다. 삼인대 전경 내용상으로 「신비복위소」는 신비의 복위가 근본 사단이지만, 그것만을 위한 것이라기보다 훈구 공신 계열의 정치 세력을 몰아내려는 사림들의 본격적인 정치 운동의 성격이 강하였다. 그리고 중앙 정계에서 사림파의 주장과 목소리가 높아지는 계기를 만들었다. 결국 이 상소로 박상과 김정이 파직되고 유배형까지 당하였으나, 이 상소는 사림 전체의 공의(公議)[여론]를 대변한 것이면서 조선 전기 사림파의 결속력 확보와 정치 참여에 결정적 계기를 마련한 역사적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 사건은 기묘사화(己卯士禍)의 직접적인 계기를 마련하였다고 평가된다. 박상·김정 등의 「신비복위소」는 당시에는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였다. 하지만 단종 복위와 관련하여 1698년(속종 24) 9월 올린 상소에서 신규(申奎)는 폐비 신씨 문제에 대한 박상 등의 상소가 지닌 역사적 가치를 재평가하였다. 물론 이때에도 신씨 복위가 이루어지지는 않았고, 다만 우대의 조처가 있어야 한다는 숙종의 명에 따라 이듬해인 1699년에 별묘(別廟)를 세워 제사를 지냈다. 그러다 마침내 삼인대 상소 이후 220여 년 만인 1739년(영조 15)에 이르러서 신씨 복위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중종 비 신씨 복위 사건 연결 항목 그리고 1739년 8월에는 영조가 단경왕후 신씨의 능인 온릉(溫陵)[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일영리 산19번지]에 친히 행차하기에 이르렀다. 후일 영조는 「신비복위소」에 대하여 “세상에는 이와 같이 곧은 말을 하는 이가 없도다”라고 칭탄(稱歎)하였고, 정조도 사제문을 직접 찬술하면서 “삼인(三印)이 걸렸던 그 석대는 만고에 닳지 않으리라”라고 하였다. 한편 신씨가 단경왕후로 복위되자 5년 뒤인 1744년(영조 20) 순창에서는 삼인대의 삼현(三賢)을 기리는 사우를 건립하려 하였지만, 마침 국가의 금령(禁令)으로 사우의 신설은 이루지 못하고 그 유서가 깃든 순창 삼인대 비(淳昌三印臺碑)를 세우게 되었다. 순창 삼인대 비는 전라북도 순창군 팔덕면 청계리에 있는 유적으로 1744년에 건립되었으며 현재 전라북도 유형 문화재 제27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비석은 1739년에 신씨가 단경왕후로 복위된 뒤 5년 되는 해에 유서가 깃든 순창 강천사(剛泉寺)에 삼인대 사적을 기리기 위하여 세워졌다. 도암(陶庵) 이재(李縡)[1680~1746]가 찬(撰)한 비의 서두에는 삼인대에 대하여 “강천사 남쪽에 이른바 삼인대가 있으니 높이가 수십 길이나 되고 아래로 굽어보면 깊은 연못이 있으며, 그 위에는 몇 그루의 소나무가 바위틈에 서 있는데 몇 백 년이나 되었는지 알 수가 없다. 삼인이란 무엇인가? 옛날에 순창군수였던 충암(?庵) 김정 선생과 담양부사였던 눌재(訥齋) 박상 선생, 그리고 무안현감이던 석헌(石軒) 유옥 선생이 이곳에 모여서 신씨 복위 상소를 의논하였다. 삼현은 각자 관인을 나무에 걸고 죽음을 무릅쓰고 상소할 것을 결의하였으므로 삼인대라 이름을 붙인 것이다.”라고 적고, 이어 삼인의 기절을 “강천(剛泉)의 맑은 물은 동쪽으로 우렁차게 흘러가고/ 온릉의 울창한 나무는 북쪽을 바라보며 푸르고 푸르네/ 비석은 닳아 없어질 수 있겠으나 선생들의 이름은 끝나는 일이 없을 것이다”라고 읊어 후세에 전하고 있다. 『정조 실록(正祖實錄)』에는 삼인대와 관련하여 “남쪽의 선비들이 그 지조를 가슴에 새기면서 그 언덕을 ‘학사대(學士臺)’라 이름 지었는데, 지금도 그 언덕을 가리키며 찬탄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1799년 6월 11일]. 순창의 삼인대 유적에는 정면과 측면에 각 1칸의 삼인대 비각이 있고, 비각 안에 높이 157㎝, 너비 80㎝, 두께 23㎝의 삼인대 비가 세워져 있다. 이 비는 1744년 4월에 세운 것으로 홍여통(洪汝通)·윤행겸(尹行謙)·유춘항(柳春恒) 등 순창군의 선비들이 발의하여 이재가 비문을 짓고, 민우수(閔遇洙)[1694~1756]가 비문의 글씨를 썼으며, 유척기(兪拓基)[1691~1767]가 전서(篆書)를 써서 세운 것이다. 삼인대 비각은 1963년, 1977년, 1987년, 1991년에 보수 단청을 하고 주변에 철책을 세워 보호하고 있다. 1978년에는 삼인대 비의 내용을 한글로 번역, 음각하여 비각 옆에 세워 놓았고, 1994년 삼인문화선양회가 결성되어 1995년부터 매년 삼인 문화제를 개최하고 있다. 순창 삼인대 연결 항목
삼인대의 상소 이후 순창 사림들의 절의 정신은 계속 이어졌다. 예컨대 1607년(선조 40)에는 신말주(申末舟)와 김정(金淨), 김인후(金麟厚), 고경명(高敬命), 김천일(金千鎰) 등 5현을 제향하는 화산 서원(花山書院)을 건립하였고, 1694년(숙종 20)에는 전라도 진사 조명근 등이 화산 서원의 사액을 청하기도 하였으나 마침 조정의 사액 금지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정조 실록에 삼인대 언덕을 ‘학사대’라 이름하였고 지금도 그 언덕을 가리키며 찬탄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 것이나, 1859년(철종 10) 10월의 실록 기사 중에 유옥에 대한 포장을 상신(上申)하면서 “삼인이 걸렸던 그 석대 만고에 닳지 않으리라” 했고, 일찍이 화산 서원에 삼현을 아울러 배향하여 조정에서 차등 없이 하였다는 기록이 보여, 삼인대 비와 함께 화산 서원에 삼현의 위패가 봉안된 적도 있었음을 전한다. 삼인대 비 전경 가상현실 바로보기 디지털순창문화대전 홈페이지 바로가기 TIP)『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이란?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은 전국 230개 시·군·구 지역의 다양한 향토문화 자료를 발굴․수집, 연구․분석하여 체계적으로 집대성하고, 이를 디지털화하여 인터넷을 비롯한 다양한 정보 통신 매체를 통해 서비스하며, 이용자가 또 새로운 지식의 생산자가 되는 순환형 지식정보시스템을 구축하는 대규모 문화 콘텐츠 편찬사업입니다. 이는 그간 미진했던 전국의 향토문화 자료의 보존 및 계승의 대책 마련과 체계적이고 종합적인 지역문화 정리사업의 필요성에 의해 추진되는 사업으로서, 지식·문화산업의 기반을 마련하고, 지역 간 균형 발전과 지역 경제 활성화에 기여하며, 인터넷을 통해 전국 향토문화의 세계화를 이루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