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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가 나선 노총각, 노처녀 결혼 이야기 강문종 한국학중앙연구원 선임연구원 1392년 7월 16일 이성계의 역성혁명으로 건국된 조선(이 국호는 1393년에 명의 승인에 의하여 채택)은 말할 것도 없이 이전 왕조인 고려의 제도를 계승할 수밖에 없었다. 조선의 본격적인 제도 개혁은 이후 태종, 세종, 성종 대를 거치면서 완성되어 간다. 따라서 조선초의 역사를 연구하는 데는 세심한 주의를 필요로 한다. 여기서는 고문서 1점을 들어 이 문제를 살펴보기로 한다. 현존하는 조선 최고(最古)의 임명문서는 1393년(태조2) 10월 일에 도응(都膺)을 전의소감(典醫少監)에 임명하는 문서이다.(도판 참조) 2016년, 또 하나의 신기록이 생길 조짐이다. 통계 이래 혼인 건수가 최저치를 기록할 전망이라는 소식이 전해진다. 결혼을 꺼리거나 아예 포기하는 미혼 남녀가 늘고 있단다. 최근 5년째 혼인 건수가 줄어들면서 ‘결혼 빙하기’라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우리는 굳이 자료를 찾아보지 않아도 주변에서 얼마든지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경기 불황에 따른 청년실업률이 계속 높아지고, 내 집 장만은 더 힘들어지고, 결혼 비용은 하늘 높은 줄 모른다.  그런데 내 월급님은 지나치게 착해서 늘 제자리를 굳건히 지켜주시니… 경제적 빈곤이 혼인 회피로 이어지는 현상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이 문제에 봉착한 우리에게 역사는 국가의 역할을 가르쳐주었다. 사족(士族) 자녀가 30세가 가까워도 가난하여 시집을 못 가는 자가 있으면 예조(禮曹)에서 임금에게 아뢰어 헤아리고 자재(資材)를 지급한다. 그 집안이 궁핍하지도 않는데 30세 이상이 차도록 시집가지 않는 자는 그 가장을 엄중하게 논죄한다. 이 내용은 놀랍게도 조선시대 『경국대전』, 「예전(禮典)」에 있는 <혜휼조(惠恤條)>의 내용이다. 가난하여 돈이 없어 결혼하지 못하는 경우에는 국가가 지원하여 혼인을 시켜야 한다는 내용과 노처녀가 되도록 시집을 보내지 않은 부모를 처벌한다는 조항을 법전에 올려놓았다. 늦도록 혼인하지 않는 것은 개인의 문제를 넘어 국가의 문제임을 명확히 하고 있는 것이다. 조사하여 보고하라! 1791년 2월 어느 날 정조는 한성(漢城) 오부(五部)에 명하여 경제적 어려움으로 혼인하지 못한 백성들에게 돈과 포목을 지원한 후, 그 결과를 매달 보고하게 하였다. 당시 한성부에는 이러한 지원이 필요한 노총각과 노처녀가 총 281명으로 파악되었으며, 혼인 프로젝트 추진 결과 1791년 5월까지 남녀 한 명씩을 제외하고 모두 혼인할 수 있었다.
결혼 하지 못한 김희집이라는 자는 현감을 지낸 김사중의 서손(庶孫)이었고, 28세의 노총각이었다. 그는 광주에 사는 처자와 정혼하였지만 그가 서얼임을 알게 된 처녀의 집으로부터  일방적으로 파혼당한 아픔이 있었다.  또 다른 여인 신씨(申氏), 그녀는 선비인 신덕빈의 서녀였고, 21세의 노처녀였다. 그녀는 이원교의 아들과 1791년 7월 22일 혼인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이씨 집안의 배신으로 파혼을 맞았었다. 결국 이 두 남녀는 파혼의 상처를 가진 채자의반 타의반으로 혼인할 수 없는 상태에 있었다. 적극적 정책의 추진, 혼인을 성사시키다! 한 쌍의 남녀가 혼인하지 않고 남아 있다는 소식을 접한 한성판윤(서울시장) 구익과 한성부 관리들은 난리가 났다. 정조가 야심차게 추진한 노총각 노처녀 혼인 프로젝트에 오점을 남기게 된 것이다. 모두가 전전긍긍할 때 절묘한 제안이 있었다. “그 두 사람을 결혼 시킵시다.”그야말로 한 방에 해결할 수 있는 기막힌 방법이 아닌가! 한성판윤 구익이 적극 추진하면서 그 사실을 정조에게 보고하였다. 
정조는 프로젝트의 완벽하게 성사시키기 위하여 그 동안 경제적 지원에 그쳤던 정책의 방향을 완전히 바꾸었다. 이 두 사람의 혼인을 위하여 전폭적인 지원과 함께 국가가 혼인을 직접 주관하게 하였다. 일반 백성의 혼인을 위하여 국가 전체가 나서게 되는 사상 초유의 대형 혼인 이벤트가 펼쳐진 것이었다. 김희집과 신씨의 혼인 이벤트는 당시 큰 화제를 낳았다. <김신부부전>을 비롯하여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일성록, 목민심서 등에 이 두사람의 결혼 이벤트가 기록되었고, 한양의 저잣거리에 소문이 파다하였다.  그 결과 두 사람은 1791년 6월 12일 혼인에 성공하게 된다. 이덕무(李德懋), 그대가 이 기이하고 아름다운 일에 대한 전(傳)을 지어라! 야심차게 추진했던 혼인 프로젝트가 완벽한 결실을 맺게 된 것에 정조도 뛸 듯 기뻐했다.  정조는 내각검서 이덕무에게 “이 같은 기이한 일에 아름다운 전(傳)이 없어서야 되겠는가? 그대가 한 통을 기록하여 김씨․신씨 부부의 전을 만들어 아뢰라”고 지시했다.  정조의 명에 이덕무는 김희집과 신씨부인의 혼인 과정을 <김신부부전(金申夫婦傳)>으로 지어 내각 일력에 실었다. 두 사람의 신상정보, 노총각과 노처녀가 되기까지의 상황, 혼인에 이르게 되는 과정, 혼례 절차와 장면 등을 상세하게 기록하였다. 그리고 마지막에 작자 자신의 평을 달아 한 편의 전을 완성하였다. 천재 문인의 손을 거쳐 최초의 희곡작품으로 탄생하다 남자로 태어나면 아내 가지기를 원하여 일처일첩(一妻一妾)은 사람이면 모두 둔다고 하는데, 대저 장안의 팔만 가구에…… 여염집 백성이라도 밥덩이를 먹을 만한 집이면 열다섯에 장가가고 열여섯에 아내를 얻지 않은 이가 없다. 우리는 이 글에서 18세기 후반 서울의 가구 수가 8만 정도 된다는 사실, 당시 결혼 정년기가 16세 정도라는 것, 서울에 사는 남성은 첩 한 명쯤은 두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최고급 혼수품, 화려한 신랑 신부의 의복, 러시아산 거울 등이 포함된 신방 물품, 전문 요리사가 만든 각종 음식들과 과일 등이 매우 구체적으로 제시되어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의 압권은 결혼을 바로 앞둔 노처녀 신씨의 심리묘사에 있다. 더는 참을 수 없어 측간으로 달려가 가만히 개를 불러 말하였다. “멍멍아, 내가 내일 모레면 시집을 간단다.” … 단지 하품만 한 번 하니, 그 처녀 민망하고 민망하여 또 개를 보고 말하였다. “멍멍아, 내가 너에게 허황된 말을 할 것 같으면 내가 너의 딸자식이다.” 혼인한다는 사실이 너무도 기쁜 노처녀가 체면 때문에 그 즐거운 마음을 마음껏 표현할 수 없어 화장실로 달려가 그곳을 지키는 개를 불러 ‘나 시집간다! 나 결혼한다고! 정말이라니까!’라고 외치는 모습을 통해 신씨의 심리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옥은 이 작품에서 당시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세 가지를 ‘세력 없는 무반이 벼슬하는 것’, ‘가난한 선비가 과거시험 보는 것’, ‘가난한 처녀가 혼인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신씨는 가난할 뿐만 아니라 노처녀였으니 혼인의 어려움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간다.  그런 그녀가 국가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성대한 혼인식을 하게 되었으니 그 기쁨을 어찌 짐작이나 하겠는가? 2016년 역대 최저치의 혼인률 보도를 보고 있자니 18세기 후반 정조가 추진한 노총각 노처녀 혼인 이벤트가 떠오른다. 경제적 문제로 결혼을 할 수 없는 현실은 개인이 아닌 사회와 국가적 문제이고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가장 기본적인 국가 정책이 되어야 한다. 온 힘을 기울여 혼인을 성사시키고 기뻐하는 정조의 모습이 눈에 보이는 듯하다. 가정이 번성하고 백성들이 즐거운 것이 태평성대 아니고 무엇일까? 또 한 해가 가고 연말 이벤트로 우리 마음을 분주하게 한다. 옆에 누가 있어도 추운 이 겨울, 대한민국의 쏠로 들은 안녕하신가? 이 칼럼은 2016년 12월 17일자 세계일보에도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