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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학중앙연구원 온라인소식지 6월호 A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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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대 이기동 원장 취임식 거행 한국학중앙연구원 제17대 원장으로 선임된 이기동 원장의 취임식이 12월 12일(월) 대강당에서 열렸다. 이기동 원장은 취임사에서 한국 문화에 관한 폭넓은 경험과 한국학자로서의 통찰을 바탕으로 「제4차 산업혁명의 도래와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연구 추진 방향」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여 참석자들로부터 박수갈채를 받았다.  취임식사진  제17대 이기동 원장 손병두 이사장 김정배위원장 민현구 명예교수 정정길 이사장 제4차 산업혁명은 재화나 서비스의 창출에 있어 인간의 기호, 취향 및 욕구 등을 보다 심층적으로 파고 들어가는 것이 주요한 과제인 데다가 민족의 정통성을 탐구함에 있어서는 인문·사회·과학 전반에 걸친 학제적인 접근 방법이 중요하다고 피력하면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중추적 기능과 부합됨을 강조했다. 손병두 이사장은 축사에서 ‘신분과 계급 간의 어울림을 중시하는 신라 화랑도 정신을 천착해온 이기동 원장은 각기 다른 이해와 가치를 지닌 구성원들의 목소리를 청종하고, 상황을 풍부하게 이해하여 공동선(共同善)을 추구하는 데 지도력을 발휘 할 것’이라며 기대를 나타냈다. 이어서 제14대 원장인 국사편찬위원회 김정배 위원장, 제15대 원장인 울산공업학원 정정길 이사장과 고려대학교 민현구 명예교수가 참석하여 축하의 메시지를 전하였으며 각계각층의 축하가 잇따랐다. 취임사 제4차 산업혁명의 到來와 本院의 연구 추진 方向- 平生 학교 연구실에서 書冊을 뒤적이며 다소간 作文해 본 것 외에는 거의 한 일이 없는 白面書生에 지나지 않는 제가 本院처럼 국가와 사회로부터 부여받은 使命이 莫重하고 또한 기구가 복잡한 연구기관을 이끌고 가기에는 여러 모로 부족한 점이 많다고 自覺하고 있습니다. 다만 平素 일개 서생의 몸으로 體得하고 있는 시대의 상황에 대한 인식이랄까 이런 저런 문제에 부딪칠 때마다 市民으로서 느낀 바 雜感은 전혀 없는 것도 아닌 까닭에 오늘 이 자리를 빌려서 감히 所懷의 一端을 말씀드려 볼까 합니다.    마침 금년 3월에 서울 시내 한복판 世宗路 所在의 한 건물에서 최신 과학기술을 갖고 人工知能을 한껏 부여한 로봇과 세계 최고봉에 오른 한국의 어떤 바둑 名人이 碁力을 겨루는 世紀的인 행사가 전 지구촌 사람들의 크나큰 관심을 집중시킨 바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의 계기가 되었음인지 近來 언론에서는 인류가 바야흐로 제4차 산업혁명 단계에 進入하고 있으며, 이에 대한 적극적인 대처가 切實히 要望되는 실정이라고 連日 大書特筆하고 있습니다. 知하는 바와 같이 한국은 西유럽 제국과 미국, 日本이 200년 혹은 100년 전에 이미 달성한 제1차 산업혁명을 1960, 70년대에 도전하여 아주 단기간 내에 압축 성장을 통해 성취했을 뿐 아니라 그 여세를 몰아 70, 80년대에는 인간의 다양한 물질적 욕망을 충족시키는 제2차 산업혁명의 기틀을 구축하는 데도 성공했습니다. 지난 6월 하순에 別世한 저명한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는 1980년에 『제3의 물결』을 出刊하여 농업혁명과 산업혁명에 뒤이어 고도의 지식 정보화 사회가 곧 다가오고 있다고 예고했습니다만, 다행히 한국은 이 정보화혁명에도 적극적으로 대응한 결과 현재 높은 인터넷망 구축과 스마트폰 보급률, 손색없는 정보기술에 비추어 볼 때 세계 유수의 인터넷 强國으로 우뚝 서게 되었다고 自負할 만한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그런데, 앞으로 전개될 제4차 산업혁명의 방향 설정 문제와 관련해서는 몇 몇 有關 분야에서 각기 의견을 開陳하고 있을 뿐, 아직 본격적인 談論에 돌입하지 못한 듯합니다. 다만 인간의 財貨와 서비스 생산을 로봇과 인공지능에 위탁한 이 새로운 단계의 산업혁명에서는 우선 디지털•생물학•물리학 등 여러 가지 기술을 융합해 산업에 적용하는 것이 필수적이지만, 궁극적으로 인간의 각양각색의 嗜好와 欲求를 충족시켜야 하는 것이 근본 命題인 만큼 필경 이를 근원에서부터 탐구해 갈 수 있는 人文분야의 혁명이 불가피하다고 봅니다. 요컨대 제4차 산업혁명에서는 과학기술과 더불어 경제•사회, 그리고 인문학의 융•복합, 즉 창조적, 초월적인 융합이 關鍵이 된다는 데 대략 의견의 일치를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돌이켜 보면 本院은 수천 년 간 지속되어 온 전통적인 농업사회를 공업에 기반을 둔 산업사회로 탈바꿈하게 한 近代化 작업에 본격적으로 착수하여 그 최초의 結實을 맛보게 된 1978년에 開院하여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창립 당시의 권위주의적 정치체제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일부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최고 집권자가 復古的인 국가주의를 고취할 목적으로 본원을 창립한 것이 아닐까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기도 했습니다만, 이는 결국 杞憂였음이 곧 입증되었습니다. 민족국가의 中興을 至上 목표로 설정했던 당시의 집권당국은 공업화를 主軸으로 한 근대화 시책만으로는 중흥을 이룩할 수 없으며, 이와 병행하여 진정 민족의 자신감을 회복하는 일이 긴요하다고 판단한 끝에 그 正體性을 탐구•확립하기 위한 전문 연구기관으로 본원을 개설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朝鮮왕조 500년의 역사를 보더라도 국가사회의 대대적인 更張 내지 중흥을 위한 지배체제의 재편성이 절실히 요구되었을 때마다 이른바 法古創新의 정신에 입각하여 필수적으로 國故를 정리하는 사업이 시행되어 크게 文運이 일어났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신왕조 開創 직후인 15세기 前半의 世宗代가 그러했고, 임진왜란과 당쟁으로 말미암아 국가사회가 몹시 피폐해 졌던 18세기 英•正祖시대가 또한 그러했습니다. 조선왕조 말기에 13년간의 短命으로 끝난 大韓제국시대에도 開港 이래 한 世代에 걸쳐 급격히 전개된 제도와 문물의 變貌를 정리•수록하려는 뜻 깊은 시도가 없지 않았으나, 20세기 벽두에 나온 『增補 文獻備考』에서 볼 수 있듯이 기껏해야 일부 중앙 행정기구 및 郡·縣의 개편을 반영하는 데 그쳤을 따름입니다. 그런 까닭으로 18세기 초부터 19세기 초에 걸쳐 한국 학술계를 휩쓴 實學운동의 성과와 같은 것은 거의 손도 대보지 못한 채 1945년의 민족 해방 이후 시기까지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1910년 대한제국을 강제로 倂呑한 日本은 35년간의 식민통치 기간 중 朝鮮史編修會를 두어 총독부가 독점적으로 관리하면서 막 공개를 시작한  『朝鮮王朝實錄』을 활용하여 10여 년 동안 40책에 가까운 편년체 『조선사』를 편찬한다거나 혹은 中樞院을 통해 이른바 舊慣조사라는 명목으로 조선시대의 법제•민속•風水신앙 등에 관한 수많은 조사연구보고서를 만들어 냈으나, 처음부터 식민 지배를 합리화하려는 목적에서 출발한 사업이었던 만큼 그 내용상의 왜곡이랄까 사업의 한계는 自明한 것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這間의 과정을 살펴볼 때 本院이 부여받은 역사적 位相은 18세기 후반의 奎章閣, 바로 그것에 後續하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즉, 本院은 한국학의 진흥 및 민족문화 창달을 목표로 창설되어 그동안 한국학에 대한 연구와 교육을 先導하여 왔습니다. 附設기구인 ‘한국학대학원’은 인문·사회과학 분야 연구 중심 대학원으로 한국학 연구의 秀越性 제고와 세계화에 기여할 수 있는 우수한 인재를 양성해 왔으며, 또한 대한제국 말기에 규장각과 전국 각지의 史庫 혹은 軍營에 흩어져 있던 典籍, 書冊 등을 한 곳에 모아 황실도서관을 건립할 계획 아래 수집된 자료를 보관한 藏書閣의 도서를 문화재관리국에서 移管받아 보존 관리하고 있으며, 현재도 끊임없이 새로운 민간의 고문헌 자료를 발굴하여 이를 확충함으로써 剝製된 書庫가 아니라 생동감 넘치는 한국학 아카이브로서의 구실을 다하고 있습니다. 현재 本院이 기획 추진 중에 있는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은 전국 230여 개 시·군·구 지역 향토문화의 자원을 집대성하여 한국인의 문화 정체성 확립과 지역문화가 세계의 문화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하려는 야심적인 사업입니다. 그리고 한국학 연구의 새로운 지평을 열기 위하여 고전 자료의 현대화 사업, 한국문화의 심층연구 사업 등 다양한 사업을 수행하고 있으며, 한국학의 세계화를 목표로  한국문화교류사업, 한국바로알리기사업, 한국학자료 정보화사업 등 폭넓은 활동을 진행함으로써 국내외 한국학 연구를 先導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지난 시기 본원이 이루어 놓은 연구 및 敎學의 실적을 하나 하나 枚擧할 여유가 없고, 한편 이를 평가하기에 아직 이른 感이 없지도 않습니다. 더욱이 지금까지 外部의 한 관찰자에 불과했던 저는 그 適任도 아닙니다만, 開院 이래 10여 년 간에 걸쳐 學界의 전폭적인 협력을 받아 완성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이야말로 國故 정리의 차원에서 볼 때 매우 의미 깊은 사업으로 한국문화의 精粹를 집약함으로써 국가의 이미지를 제고시켰다고 평가하고 싶습니다. 하긴 이 편찬사업은 『朝鮮王朝實錄』이나 許多한 문인•관료들의 文集 등 주요 문헌자료의 電算化작업이 아직 이루어지기 이전 시기에 이룩된 것인 만큼 앞으로도 계속 增補작업이 요망되는 실정입니다.  조선시대의 온갖 통치상의 비밀사항을 간직한 채 산 속 깊은 史庫에 秘藏되어 있던 이 『實錄』은 비록 국왕일지라도 마음대로 열람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만, 현재는 디지털 기술혁명 덕분에 보통사람도 인터넷 검색을 통해 자유로이 그 전체 내용을 샅샅이 뒤져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본원에서도 국내외에서 수집한 조선시대 中人들을 대상으로 한 과거시험 入格者 6천여 명의 총명부인 이른바 雜科榜目을 1990년 발간함으로써 컴퓨터에 入力하여 데이터 베이스(DB)를 구축, 통계처리에 의한 과학적 분석의 길을 개척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그런데 冒頭에서 言及한 것처럼 현재 始動을 걸고 있는 제4차 산업혁명의 물결에서는 財貨나 서비스의 創出에 있어 인간의 嗜好랄까 趣向 내지 欲求 등을 보다 深層的으로 파고 들어가는 것이 그 주요한 과제가 되어 있습니다. 이는 본질에 있어 본원에 주어진 使命과도 일맥상통하는 점이라고 하겠습니다. 우리가 민족의 정통성을 탐구함에 있어서는 전통사회의 정치체제라든지 신분제도, 토지제도에 대한 究明과 더불어 특히 가족제도와 價値觀에 대한 연구가 필수적인데, 이는 인문•사회과학 전반에 걸친 學際的인 접근 방법이 아니고서는 所期의 성과를 거둘 수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를 가령 저의 전공인 역사학분야에 국한시켜 적용해 본다면 문화인류학과 심리학, 비교신화학 분야의 최신 知見을 援用하지 않고서는 아주 불충분하다기보다는 차라리 불가능에 가깝다는 생각이 듭니다. 一例를 든다면 20세기 초반에 프랑스 역사학계에서 胎動하여 그 뒤 세계학계로까지 확산되어 큰 영향을 끼친 아날學派는 실로 다양한 방법론을 구사하여 역사 연구의 地平을 크게 확장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만, 그들이 공통적으로 지리적 조건, 風土, 기후, 주변 환경(milieu), 인구의 推移를 중시하는 기운데, 일부 연구자들은 인간의 식료품 需給상황, 生涯週期(life cycle), 그리고 특히 心性(mentalité)을 중시하고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는 지금 제가 너무나 時流에 민감하게 대응하는 발언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실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굳이 변명을 꾀한다면, 근래 저는 역사 연구에서 컴퓨터를 이용한 통계처리 萬能 풍조에 대해 은근히 불만을 품고 있음을 고백해야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이와 같은 연구 방법은 관심의 대상을 文件에서 大量 관찰하여 각 시기에 따른 변화의 폭을 수치(百分率)로 제시하는 데 매우 有用하지만, 그 反面 변화를 일으키는 여러 가지 요인에 대한 省察을 소홀하게 만드는 결함이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어쨌든 앞으로 전개될 제4차 산업혁명을 계기로 역사학계가 아날학파의 연구 방법론을 다시 吟味•點檢할 기회가 오지 않을까 기대되고 있습니다.  끝까지 인내하며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2016년 12월 12일

한국학중앙연구원  원장  李 基 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