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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학중앙연구원 온라인소식지 3월호 A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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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KS 이 땅의 문화를 찾아서
 
이 땅의 문화를 찾아서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홈페이지 바로가기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은 전국 230개 시·군·구 지역의 다양한 향토문화 자료를 발굴․수집, 연구․분석하여 체계적으로 집대성하고, 이를 디지털화하여 인터넷을 비롯한 다양한 정보 통신 매체를 통해 서비스하며, 이용자가 또 새로운 지식의 생산자가 되는 순환형 지식정보시스템을 구축하는 대규모 문화 콘텐츠 편찬사업입니다. 이는 그간 미진했던 전국의 향토문화 자료의 보존 및 계승의 대책 마련과 체계적이고 종합적인 지역문화 정리사업의 필요성에 의해 추진되는 사업으로서, 지식·문화산업의 기반을 마련하고, 지역 간 균형 발전과 지역 경제 활성화에 기여하며, 인터넷을 통해 전국 향토문화의 세계화를 이루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Tip.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이란? 디지털부산문화대전 홈페이지 바로가기 [사진] 1950년대 부산의 극장
1955년 부산 지역 최초의 현대식 대형 영화관으로 건립된 현대 극장과 1957년 개관한 제일극장 지역 문화의 파수꾼, 부산 영화 평론가 협회 부산 영화 평론가 협회는 1958년 영화 평론가 허창과 부산대학교 교수 장갑상을 비롯해 작가 이주홍·여수중·박두석·황용주·김일구 등이 의기투합해 설립되었다. 지역 영화 저널리즘을 선도한 부산 영화 평론가 협회는 부산대학교 내에 영화 연구회 등과 손잡고 영화 시사회 및 비평 모임을 통해 영화 지망생들을 지도하는 등 지역 문화의 파수꾼 역할을 하였다. 특히 부산 영화 평론가 협회 설립의 일등 공신인 장갑상은 같은 해 최초의 영화상인 부일 영화상의 탄생에도 간여하였으며, 영화진흥공사 부산지사 설립을 위해 동분서주하며 후일 영화 도시 부산의 탄생을 돕는 밑거름 역할을 하였다. 장갑상은 부산 영화 평론가 협회 설립을 주도하면서 부산 영화 평론가상 제정에 최우선 과제를 두기도 하였다. 트로피를 직접 디자인하고 재정 확보에 앞장섰으나 끝내 성사되지는 못하였다. 이후 부산 국제 영화제의 성공과 함께 후배 부산 영화 평론가 협회 회원의 노력으로 2000년 부산 영화 평론가 협회상이 제정되어 장갑상의 꿈이 실현되었다. 부산 영화 평론가 협회상 연결 항목 바로가기 한국 최초의 영화상, 부일 영화상 한국 최초의 영화상은 부산에서 탄생하였다. 1958년 부산 국제 영화제의 초석을 다진 부일 영화상이 출범한 것이다. 이는 현존하는 대종상 영화제, 청룡 영화상, 춘사 영화상보다 앞섰다. 서울이 아닌 지방에서, 신문사 최초로 부산일보사가 제정한 제1회 부일 영화상 시상식이 1958년 3월 27일 부산 국제 극장에서 역사적인 막을 열었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한국에서 당시 부일 영화상은 범람하는 외국 영화에 맞서 한국 영화의 발전을 선도하는 구심점이 되었다. 시상식 첫 해인 1958년 「잃어버린 청춘」이 최우수 한국 영화상과 감독상[유현목]을, 「시집가는 날」의 김승호와 「실락원의 별」의 주증녀가 남녀 주연상 수상의 영광을 차지하였다. [사진] 제9회 부일 영화상 시상식 부일 영화상 탄생을 계기로 국내에서는 각종 영화상들이 앞 다투어 제정되었다. 1962년에는 문화공보부가 대종상을, 1963년 조선일보사가 청룡 영화상을, 1965년 한국일보사가 한국 연극 영화 예술상을, 1968년 서울신문사가 서울 신문 문화 대상 등을 만들어 한국 영화 전성시대를 뒷받침하였다. 영화인은 물론 팬들과 부산 시민이 정성 들여 가꾸어 온 부일 영화상 시상식이 열렸던 극장과 퍼레이드가 펼쳐졌던 당시 부산의 거리는 축제의 한마당으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하지만 부일 영화상은 텔레비전의 급속한 보급과 한국 영화 산업의 사양화 등으로 인해 1973년 4월 14일 제16회 시상식을 마지막으로 문을 닫았다. [사진] 부일 영화상 관련 신문 기사와 상패 역사의 무대 뒤로 사라졌던 부일 영화상은 2008년 35년 만에 부활하였다. 부활된 부일 영화상은 18개 부문의 시상자를 선정해 1973년 중단되기 전보다 두 개 부문을 늘렸고, 특히 영화인들이 대거 몰리는 부산 국제 영화제 개막식 다음날로 시상식 날짜를 고정해 한국 영화인의 최대 축제로 거듭나고 있다. 부일 영화상 연결 항목 바로가기 최초의 국제 영화제 탄생과 부산 영화의 성장 1996년 9월 13일 오후 6시 30분, 부산 국제 영화제가 막을 올렸다. 해운대 수영만 야외 상영장은 5,000여 명의 관객으로 가득 찼다. 부산 국제 영화제 첫 회에 31개국, 169편의 작품이 부산에 왔다. 개막일로 잡은 ‘13일의 금요일’에 대한 우려와 걱정도 한순간에 사라졌다. 관객들의 폭발적인 반응 속에서 개막일까지 판매된 입장권은 무려 5만 장을 넘어섰다. 할리우드 영화가 아닌 색다른 영화를 맛보고자 하였던 관객의 갈증은 입장권 판매 숫자로 표현되고 있었다. [사진] 제18회 부산 국제 영화제 개막식 부산 국제 영화제는 최단 기간 내에 아시아권 최고의 영화제로 정착하였고, 남포동 극장가가 BIFF 광장으로 명명되고 여기에 세계의 유명 영화인들의 핸드 프린팅이 부조되는 등 영화제의 개최를 계기로 부산은 영화의 도시가 되었다. [사진] 남포동 BIFF 광장 2015년 제20회를 맞은 부산 국제 영화제는 얼마 되지 않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괄목할 만한 성과를 이루어냈다. 또한 ‘한국 영화의 르네상스’를 선두에서 이끌었다고 평가를 받고 있다. 이와 같은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데에는 다른 영화제와의 차별성을 강조하고 상업성을 배제한 것이 성공의 주요인이다. 또 작품을 선정해 순위를 정하는 칸이나 베를린, 베니스 등의 경쟁 영화제 대신 비경쟁 영화제를 선택한 것도 성공에 힘을 보탰다. 여기에 부산 시민의 영화에 대한 강한 애정과 자발적인 참여, 영화 전문가 및 행정 기관 등의 하나같은 의지를 잘 조화시킨 점도 한몫을 단단히 하였다. 부산 국제 영화제의 성공과 더불어 부산에서도 영화 제작의 열기가 뜨거워져 동녘을 비롯한 프로덕션이 생겨나 극영화, 단편 영화들을 제작하여 국내외의 주목을 이끌었고, 전수일·오석근·김진해·곽경택등 지역 출신 감독들이 큰 활약을 하였다. 그리고 젊은 영화인들이 중심이 되어 부산 독립영화인 협회가 결성되었다. 또한 1999년 미래 영화 인재의 산실이 될 부산, 영화 제작에서 상영에 이르는 모든 업무를 관장하는 부산영상위원회가 들어섰다. 부산영상위원회는 영화의 도시 부산의 이름에 걸맞는 영화 산업의 진흥을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였다. 특히 로케이션 전담 팀을 꾸려서 3만여 장의 사진을 갖춘 온라인 DB의 구축, 요청을 받아 로케이션 장소를 물색하는 정보력, 도로 통제나 경찰 협조 등 촬영을 성사시키는 행정 지원 시스템을 갖추어 영화 찍기 좋은 로케이션 도시의 토대가 되었다. 영화 「친구」의 흥행으로 부산이 로케이션 촬영이 용이한 지역으로 각인되기 시작하였다. 또한 「친구」에 등장하는 부산 지역에 대한 전국적인 관심은 부산으로의 관광을 이끌어 내기도 하였다. 이후 2001년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2002]도 한국 영화 사상 최대의 교통 통제가 이루어졌던 촬영이었다. 2000년 10편의 영화가 부산 로케이션을 시작한 이후, 꾸준히 늘어나 2001년에 13편, 2002년에 19편, 2003년에 24편, 2004년에 18편, 2005년에 30편, 2006년에 43편, 2007년에 43편이었다. 2008년에 28편으로 약간 줄기는 하였지만, 2009년에 부산에서 촬영한 장편 영화는 모두 30편으로 제작된 전체 국내 장편 영화의 40%를 넘어섰다. 이런 경향은 2010년, 2011년에도 계속 이어졌다. 부산 국제 영화제 연결 항목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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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부산문화대전」으로 떠나는 여행(3부) 한국학중앙연구원의 대표적인 전자 편찬 사업『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이 달에는 부산광역시의 정보와 자료를 총망라한「부산역사문화대전」을 소개합니다. [사진] 디지털부산문화대전 홈페이지 「부산역사문화대전」(http://busan.grandculture.net/)은 부산광역시의 전자 백과사전입니다. 부산의 자연지리, 역사와 문화를 비롯해 정치·경제·사회의 발전상 등에 관한 다양한 자료와 정보를 집대성해 인터넷을 통해 누구나 쉽게 활용할 수 있게 제작되었습니다. 2010년 4월 부산시와 협약을 통해 추진한 이 사업은 크게 네 단계로 진행되었습니다. ①선행(기초)조사 연구(2010년 5월∼2012년 9월, 부산대학교 한국민족문화연구소) ②원고 집필(2011년 4월∼2013년 11월, 부산대학교 한국민족문화연구소) ③멀티미디어 콘텐츠 제작 사업(2011년 5월∼2014년 8월, ㈜지엑스) 및 생활사 영상 제작(2013년 11월∼2014년 10월, ㈜박앤박미디어) ④서비스 시스템 개발 사업(2013년 11월∼2014년 10월, ㈜올인텍아이엔씨)이 수행되었습니다. 2010년 4월부터 2014년 12월까지 4년 9개월에 걸쳐 선행(기초)조사연구에서부터 서비스 시스템 개발이 진행되었고, 6개월의 시범 서비스 기간을 거쳐 2015년 7월 1일에 「부산역사문화대전」으로 개통되었습니다. 여기에는 총 16,000개의 항목(원고지 100,000매), 사진과 동영상·가상현실·도면 등 총 23,219개의 멀티미디어 자료가 담겨 있습니다. 「부산역사문화대전」에 담긴 정보와 자료들은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사이트 및 지역별 사이트(부산역사문화대전), 대형 민간 포털(네이버, 다음, 구글 등)을 통해 언제 어디서나 이용할 수 있습니다. 그럼 부산에 대해 알아보는 여행을 떠나보실까요? 테마 3 : 한국 영화의 고향, 그리고 부산 국제 영화제 부산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여러 가지가 있다. 해운대, 항구 도시, 야구, 먹거리 등 다양한 대답을 들을 수 있는데, 그 중 하나로 종종 언급되는 것 중 하나가 ‘부산 국제 영화제’이다. 부산 국제 영화제 기간에는 연일 언론에서 ‘영화의 바다’ 부산의 동향에 대해 보도할 뿐 아니라 서울에서 밤기차를 타고 부산으로 내려가 영화를 봤다든가, 인기 있는 영화를 보기 위해 새벽부터 극장 앞에서 기다렸다는 등의 경험담을 말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세계적인 영화제로 자리 잡은 부산 국제 영화제는 부산을 대표하는 문화 축제, 관광 상품이 되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사실 부산과 영화의 인연은 오래되었다. 1876년 개항하면서 부산은 근대문화를 받아들이는 관문 역할을 하였고, 이런 분위기에 속에서 자연스레 영화도 일본을 거쳐 부산에 소개되었다. 한국에 영화가 처음 상륙한 곳이 부산이었던 셈이다. 이후 부산은 도시가 발전하면서 영화 제작과 상영의 중심지로서 성장해 왔다. 부산 영화의 역사를 살펴보자. 영화의 고향, 부산 영화 역사의 시작 1895년 12월 28일 프랑스에서 탄생한 영화는 이후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세계에 퍼져 나갔다. 불과 두 달 만에 영국에 상륙하였고, 10개월 안에 러시아, 미국, 인도, 중국까지 진출하였다. 일본에는 1897년 2월에 도착하였다. 개항 이후 부산은 다른 지역보다 외래문화를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고, 활동사진이라 불리던 영화도 일본을 거쳐 부산에 소개되면서 조선에 상륙하였다. 당시 부산에는 전국 최초로 ‘극장 취체 규칙’[1895년], 즉 공연장 시설과 운영에 관한 법이 제정되었는데 이러한 법이 있었다는 사실은 그 즈음에 이미 극장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짐작에 그칠 뿐이고 아직 명확하게 확인된 것은 없다. 영화가 국내에 첫 선을 보일 즈음 부산에는 이미 6,000여 명이나 되는 일본인 거류민이 용두산을 중심으로 한 조계지에 모여 ‘작은 일본’을 이루며 살고 있었다. 그래서 국내 최초로 영화를 상영한 곳이 부산이며, 영화를 최초로 본 한국인은 아마도 부산 사람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래서 부산은 한국 영화의 고향으로 불린다. [사진] 부산 극장 부산 최초의 극장 행좌 문헌 기록으로 보면, 부산 최초의 극장은 1903년 설립된 행좌(幸座)이다. 행좌는 현 부산광역시 중구 광복동 할매 회국수집과 서울 깍두기 사이의 좁은 골목길에 있었다. 그러나 옛날의 화려한 모습과 달리 지금은 양쪽의 건물들이 서로 등지고 있는 길이 되어 버려서 인적이 거의 닿지 않고 있다. 이후 1914년 3월 욱관(旭館)이 개관되면서 ‘상설관 시대’가 열렸다. 현재 ‘피프 광장’이라 불리는 부산광역시 중구 남포동과 용두산 공원 인근에 극장들이 들어서기 시작하였다. 보래관[1914년], 태평관[1922년], 소화관[1931년], 부산 극장[1934년] 등이 신축되어 극장가를 형성하면서 부산은 근대 한국 영화의 중심지로 우뚝 섰다. 행좌, 송정좌를 비롯해 수많은 극장들은 일본 전통극 공연장으로 출발하였지만 연극의 지위를 영화가 잠식해 가는 동안 서서히 영화관으로 바뀌어 갔다. 행좌 역시 일본 전통극인 가부키 공연장이지만 초창기부터 영화를 함께 상영하였다. 다다미 바닥에 앉아 전통 연희를 보는 장소를 뜻하였던 좌(座)라는 이름은 근대적 복합 공연장인 관(館)으로 변모되었고 영화관인 극장이 된 것이다. 행좌(행관) 연결 항목 최초의 영화사 조선 키네마 1924년 7월 11일 한국 최초로 영화사인 조선 키네마가 부산에서 탄생되어 영화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이경손, 김정원 등 도쿄 유학생들이 조직한 무대예술연구회를 중심으로 영화 제작소 설립에 대한 이야기가 오가면서 자본금 20만 원으로 최초의 영화사가 부산에서 탄생하게 된 것이다. 조선 키네마를 통해 안종화, 이경손 등 영화감독과 이채전, 유수준 등이 영화배우로 데뷔하였고 영화 「아리랑」의 나운규도 조선 키네마에서 활동하였다. 부산항에서 바로 마주 보이는 복병산 꼭대기, 옛 러시아 영사관 자리에 보금자리를 튼 조선 키네마는 2년간 운영되었으며 이 후 일본 요새사령부를 거쳐 광복 후에는 미군 장교 구락부로 사용되다가 1953년 11월 27일 발생한 부산 역전 대화재 때 소실되었다. 조선 키네마의 창립작은 「해의 비곡」이었다. 촬영은 영화 제작에 의욕을 가졌던 다카사가 왕필열(王必烈)이라는 한국 이름으로 감독을 맡았고, 무대예술연구회 회원이던 이경손이 조감독을 맡았다. 「해의 비곡」은 우연히 만난 두 젊은 남녀가 깊은 사랑에 빠지게 되는데 알고 보니 이복 남매라는 사실이 드러나자 이룰 수 없는 사랑의 한을 안고 바다에 몸을 던진다는 내용을 그렸다. 출연진은 주연인 이주경을 포함해 모두 우리나라 사람이었다. [사진] 영화『해의 비곡』의 한 장면 조선 키네마는 창립 다음 해인 1925년 「운영전」, 「암광」, 「촌의 영웅」 등을 내놓았으나, 영화 시장이 예상보다 협소하였고 일본 배급 회사와 관계도 틀어져 수출 판로가 막히게 되자 네 편의 영화만을 제작하고 문을 닫았다. 하지만 조선 키네마에서 활동한 제작진과 연기진은 서울로 올라가 당시의 무성 영화 시대에 힘을 보탰다. 유성 영화인 토키 시대를 맞아 1929년 7월 부산 행관에서 우리나라 최초로 토키 영화인 일본 시대극 「돌아오는 다리」가 상영되었다. 이어 1930년대 부산 영광키네마 등에서 극영화 제작 운동이 처음 일어났으며, 1948년 순 부산 제작 영화 1호인 「해연」이 탄생하는 등 일제 강점기를 지나 해방과 광복을 맞기까지 부산은 한국 영화의 고향으로 자리매김하였다. 조선 키네마 주식회사 연결 항목 바로가기 부산 문화 지형의 변동을 몰고 온 6·25 전쟁 1950년 6·25 전쟁은 부산 문화 지형의 지각 변동을 몰고 왔다. 1·4 후퇴 후 피난민 유입으로 부산 인구는 47만 명에서 84만 명으로 늘어났다. 거주민과 유입민이 반반씩 뒤섞인 셈이었다. 영화도 예외가 아니었다. 부산에 이주한 영화인 중 절반은 영화 제작으로 담배 한 대 피울 짬도 없을 정도로 분주하였으며, 나머지는 금강 다방과 바닷가를 어슬렁거리며 무료한 피난지의 시간을 보내야 하였다. 전시 기간 중 한국 영화는 부산과 진해, 대구로 나뉘어 제작되었다. 부산에서는 1·4 후퇴 이후 한형모, 양주남 감독이 이끄는 국방부 정훈국이 보수동 목욕탕에 짐을 풀었다. 공보처는 경상남도청 지하실에서 종군 기자들이 촬영해 온 필름을 현상하고 편집해 뉴스를 내보냈다. 공보처의 중심인물은 조선 키네마에서 활동하였던 안종화 감독이었다. 전쟁이라는 역사적 우연으로 부산은 다시 한국 영화 제작의 중심지로 부상하였다. 하지만 1953년 7월 휴정 협정이 체결되자 영화인들의 서울 이주가 시작되었다. 국방부 정훈국은 현 부산광역시 중구 영주동에서 서울 남산의 한옥 마을로 시설과 자재를 옮기고 필동 촬영소로 이름 붙였다. 필동 촬영소는 1950년대 중반 이후 한국 영화의 메카인 ‘충무로 시대’를 견인하는 한 축을 담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