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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학중앙연구원 온라인소식지 12월호 A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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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실재와 후대인의 기억 임선빈(한국학중앙연구원 선임연구원) 전통적으로 역사연구는 문헌자료에 의존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런데 역사적 실재(實在)는 당대에 기록으로 남기도 하고, 기록되지 않은 채 기억(記憶)으로만 전해지기도 한다. 기억의 일부는 후대에 다시 기록(記錄)으로 정리되기도 한다. 문치주의 전통이 강한 조선시대에는 국가의 공적인 기록물이 전근대 어느 왕조보다도 많이 생산되었으며, 사대부 지식인들도 개인의 기록물인 문집을 많이 남기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기록물들이 반드시 공정성을 지니고 있는 것만은 아니다. 특히 기억에 의존하다가 후대에 정리된 기록물은 종종 역사적 실재에서 벗어난 경우가 있다. 그런데 간혹 이러한 후대의 기록물에 입각하여 ‘공증’된 역사서술이 이루어지기도 한다. 따라서 ‘공증’되어 있는 역사서술이 진실을 담지 못한 경우도 있다. 이 경우 텍스트의 철저한 비판을 통해 역사적 실재를 재확인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필자는 이와 같은 관점에서 최근 임진왜란의 역사적 실재와 이에 대한 후대인의 기억에 주목하고 있다. 16세기말 17세기초의 왜란과 호란은 당대인들에게 매우 충격적인 사건이었으며, 이는 후대인의 기억에도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특히 임진왜란은 전란으로 인해 당대의 기록이 남겨지는데 한계를 지녔었기 때문에 후대인의 기억에 의존하는 비중이 더욱 큰 시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간혹 후대인의 기억으로 남겨지고, 또 후대의 기록화 과정에서 사실이 의도적으로 왜곡되기도 하는데, 이에 대해서 철저한 역사적 검증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채 역사지식이 된 경우도 없지 않다. 하나의 사례를 소개해 보자. 16세기 후반기에 충청도 공주의 한 마을에서 만경노씨 삼형제가 태어났는데, 이들은 임진왜란 때 중봉 조헌의 휘하에서 의병으로 활약하다가 순절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들의 생가지는 현재 지방문화재(도 기념물)로 지정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국가에서 편찬된 공신력을 지닌 사전에도 항목으로 설정되어 금산전투 순절인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서술은 이들의 순절 내용을 자세히 기록하여 전하는 조선후기의 자료들에 근거하고 있다. 그러나 당대의 신뢰할 만한 다른 자료를 통해 확인해 보면, 만경노씨 삼의사의 역사적 실재는 그동안 세간에 알려져 있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만경노씨 삼의사가 임진왜란 때 중봉 조헌의 의병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여 혁혁한 공을 세운 것은 사실이지만, 아무도 금산전투에서 순절하지는 않았다. 이들은 오히려 임란이 끝난 후에도 선조조에 오현(五賢)의 문묘종사 논의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고 있으며, 광해군 즉위 후에는 충청도를 대표하는 유생으로 조헌의 사당이 표충사 사액을 받는 일을 주도하였고, 나아가 생원시에 입격하고, 문과에 급제했음을 실록과 방목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임진왜란 참전만이 아니라, 임란 이후의 활약상도 두드러진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역사적 실재와는 달리, 18세기 중엽에 편찬된 중봉집 중간본에서는 삼형제 가운데 큰 아들이 임진왜란의 금산전투에서 중봉 조헌과 함께 순절한 것으로 기록되기 시작하며, 19세기 초 성해응의 글에서는 둘째 아들도 순절인으로 기록된다. 이후 이러한 집단적 기억은 확대되어 나갔고, 역사적 실재와는 달리 새로운 기억의 사회화가 이루어졌다. 19세기에는 만경노씨 집안의 족보 기록도 18세기 족보와는 달리 금산전투 순절인으로 바뀌고 있으며, 문중에 오늘날까지 보존되어 있는 수십건의 고문서를 분석해 보면 지역 유생들의 공론을 바탕으로 삼의사 충절에 대한 추숭사업을 1세기 간에 걸쳐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결과 삼의사는 정포(旌褒)되고, 증직되며, 특히 1870년에는 당대의 거유였던 임헌회가 ‘만경노씨삼의사행장(萬頃盧氏三義士行狀)’을 찬술함으로써 추숭사업의 화룡점정(畵龍點睛)이 이루어졌다.(졸고, 「만경노씨 삼의사의 ‘역사적 실재’와 ‘기억된 역사’」, 『역사민속학』 47, 2015) 그러면 이와 같이 역사적 실재와 다르게 후대인들의 기억이 바뀌게 되는 연유는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사실 만경노씨 가문은 임진왜란 시기 왕세자로 공주에 80여일간 머물면서 무군사를 진두지휘 하는 등 선조를 대신해 전란극복을 위해 동분서주했던 광해군과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런데 조선후기에는 광해군을 몰아내고 왕위를 차지한 인조의 혈손들에 의해 통치되는 상황이 300년 가까이 지속된다. 이제 만경노씨 가문도 현실을 인정하면서 광해군과의 각별한 인연을 씻어내고 새로운 충신가문으로 거듭나기 위한 과정이 필요하지 않았을까? 사실 임진왜란과 관련하여 역사적 실재와 후대의 기억 사이에 커다란 간극이 존재하는 사례는 이외에도 많이 찾아진다. 권율의 행주대첩도 오늘날 우리에게는 ‘행주치마’나 ‘변이중의 화차’ 등이 각인되어 있으나, 당대의 자료를 치밀하게 분석해 보면, 이는 역사적 실재와 거리가 먼 후대인의 기억일 뿐이다. 조선후기의 실기 가운데에는 임란 의병활동이 미화된 경우가 상당수 존재하는데, 이 분야의 연구로는 정유재란기 곽재우가 주둔했던 화왕산성의 역사적 실재와 후대의 역사적 기억에 대해 다룬 하영휘의 「화왕산성의 기억 ; 신화가 된 의병사의 재조명」(『임진왜란 동아시아 삼국전쟁』 113~143쪽, 2007)이 주목된다. 오늘날 유럽사의 연구에서는 ‘새로운 새로운’ 역사를 추구하는 페르낭 브로델 이후 세대에 의해 ‘작은 역사’가 부활하면서, ‘정통’을 자처하는 해석들에 많은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고 한다. 여기에서 ‘기억의 역사’가 주목된다. 이와 같은 관점의 연구가 이제 한국사에서도 진행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관찬자료, 문집을 비롯한 다양한 사찬자료의 가공과 정보화, 고문서 자료의 발굴과 적극적 활용 등으로 새로운 관점의 한국사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우리에게는 당대의 역사를 정리하여 후대에 전하고자 하는 강한 역사의식을 지니고 왕대별로 편찬된 조선왕조실록이 온전히 남아 있다. 물론 실록이라고 하더라도 반드시 객관성을 담보한다고 할 수는 없으며, 당대의 지식인들에 의해 의도적으로 편찬된 실록은 일부 편파성을 지니기도 한다. 그나마 이러한 당대의 실록기사를 조선시대에는 일반인이 쉽게 접근할 수 조차 없었다. 따라서 조선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의 조선시대에 대한 인식과 기억은 종종 실록에 수록되어 있는 정보와 무관하게 이루어졌으며, 일부에서는 당시의 역사적 실재와 거리를 지닌 ‘전설’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따라서 이러한 자료의 다각적인 활용을 통해 역사적 진실을 밝히려는 조선시대 연구자들은 종종 ‘희열’을 맛보기도 한다.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에 대한 후대의 기억이 반드시 객관적인 사실을 묘사하고 있는 것만은 아니다. 한국사를 소재로 이를 구체적으로 추적하여 실재와 기억 사이의 간극을 밝히고, 이와 같은 후대의 다양한 기억들이 어떠한 배경하에서 이루어진 것이며, 어떠한 의도로 왜곡되었는지를 밝히는 작업은 한국사의 역사서술과 역사인식의 지평을 확대해 나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