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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의 문화를 찾아서
 
한국학중앙연구원 온라인소식지 12월호 A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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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의 문화를 찾아서 디지털양주문화대전 홈페이지 바로가기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홈페이지 바로가기 Tip.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이란?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은 전국 230개 시·군·구 지역의 다양한 향토문화 자료를 발굴․수집, 연구․분석하여 체계적으로 집대성하고, 이를 디지털화하여 인터넷을 비롯한 다양한 정보 통신 매체를 통해 서비스하며, 이용자가 또 새로운 지식의 생산자가 되는 순환형 지식정보시스템을 구축하는 대규모 문화 콘텐츠 편찬사업입니다. 이는 그간 미진했던 전국의 향토문화 자료의 보존 및 계승의 대책 마련과 체계적이고 종합적인 지역문화 정리사업의 필요성에 의해 추진되는 사업으로서, 지식·문화산업의 기반을 마련하고, 지역 간 균형 발전과 지역 경제 활성화에 기여하며, 인터넷을 통해 전국 향토문화의 세계화를 이루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고려 말, 조선 초 최대의 왕실사찰, 회암사 양주 회암사지는 경기도 양주시 회암동의 천보산 자락에 위치하며, 고려 말, 조선 초 최대의 왕실 사찰(王室寺刹)인 회암사가 있던 곳이다. 조선 전기의 최대 사찰이자 현재 양주시의 유서 깊은 사적지인 회암사를 그 역사적 내력, 회암사와 인연을 맺은 고승들, 가람의 구조, 유물 들을 중심으로 깊이 있게 살펴보고자 한다. 회암사(檜巖寺)가 정확하게 언제 창건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권2에 ‘1174년(명종 4) 금(金)나라의 사신이 회암사를 다녀갔다’는 기록이 있다. 1313년(충선왕 5)에는 태고(太古) 보우(普遇)[1301~1382]가 회암사에서 광지(廣智)에게 출가하였다고 하며, 1344년(충혜왕 복위 5)에 나옹(懶翁) 혜근(惠勤)[1320~1376]이 회암사에서 수도하던 중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이상의 기록을 통해 회암사는 늦어도 12세기 무렵에는 이미 창건되어 상당한 규모를 갖추고 있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회암사가 현재와 같이 거대한 규모로 중창될 수 있었던 이유는 고려 말~조선 초에 왕실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많은 불사가 이루어졌고, 당시 불교계를 주도하던 고승들이 머물던 최고의 사찰이었기 때문이다. 고려 말인 1372년(공민왕 21)에는 혜근이 공민왕의 명으로 회암사에 와서 지공(指空)의 사리탑을 건립하였고, 1374년(공민왕 23)부터 2년 동안 266칸의 대규모 중흥 불사를 벌여 1376년(우왕 2) 혜근의 제자 각전(覺田)이 완공하였다. 8차까지 이루어진 발굴 조사 결과, 회암사는 일반적인 사찰 건축과는 달리 궁궐 건축의 건물 구조나 방식을 나타낸다. 즉 양주 회암사지(楊州檜巖寺址)는 1997년부터 연차적인 발굴 조사를 통해서 그 규모가 드러나게 되었는데, 가람의 배치가 평지가 아닌 산간에 위치하면서도 8단의 단축을 이루면서 남쪽에 회랑(回廊)을 두고 있는 점은 고려 시대의 궁궐이나 가람 배치의 특징과 같다. 또한 남북의 축을 중심으로 좌우 대칭을 이루면서 모두 64개소의 건물을 배치하여 종교적인 공간으로서의 특성을 유지하고 있으면서도, 각 건물의 기능적인 용도에 따라서 건물의 형태를 조금씩 달리하고 있다. 이와 같은 회암사 가람의 특징은, 남북의 축 선상에 건물을 배치하는 가람 배치 원칙을 고수하면서도 왕실 사찰로서의 성격에 부합되도록 건물을 배열하고 위계를 설정하면서 나타나게 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양주 회암사지에서는 왕실에서만 한정적으로 사용된 용무늬 기와, 봉황 무늬 기와, 청기와, 잡상 등의 기와류나 왕실 전용 자기를 생산하던 관요(官窯)[경기도 광주 소재]의 도자류를 비롯하여 당시 왕실과 불교문화를 이해하고 연구하는 데 핵심이 되는 귀중한 유물들이 많이 출토되었다. ▲ 양주 회암사지 전경 ▲ 양주 회암사지 무학대사탑 ▲ 양주 회암사지 무학대사탑 앞 쌍사자 석등 양주 회암사지 특화콘텐츠 바로가기 양주 회암사지 특화콘텐츠 바로가기 고려 말, 조선 초 최대의 왕실사찰, 회암사 관련 영상 바로보기 고려 말, 조선 초 최대의 왕실사찰, 회암사 관련 영상 바로보기 고려 말, 조선 초 최대의 왕실사찰, 회암사 관련 항목 부록 : 양주의 맛집과 특산물 양주의 맛집과 특산물 관련 동영상 바로보기 양주의 맛집과 특산물 관련 동영상 바로보기 양주의 맛집과 특산물 관련 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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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의 문화를 찾아서’ 코너에서는 기존에 소개한 향토문화전자대전 중 우수 사례를 3회에 걸쳐 소개하는 기회를 마련하였고 그 세번째 순서로 12월호에는 ‘디지털양주문화대전’을 소개하게 되었습니다. 「디지털양주문화대전」속으로의 여행 2부 한국학중앙연구원의 대표적인 사업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그 중 34번째 완성되었던「디지털양주문화대전」을 소개합니다. [그림] 디지털양주문화대전 홈페이지 화면 경기도 양주시에는 지역민들이 전통 사회로부터 계승 발전시키고 있는 삶과 농경 관련 놀이와 굿, 농악, 소리 등이 있다. 양주의 신명과 흥을 대표하는 양주소놀이굿[중요 무형 문화재 제70호], 「양주 들노래」[양주시 향토 문화재 제18호], 양주농악[경기도 무형 문화재 제46호], 양주별산대놀이[중요 무형 문화재 제2호], 「양주 상여와 회다지 소리」[경기도 무형 문화재 제27-1호] 등이 이것이다. 이들은 각기 그 전통성과 원형성을 인정받아 무형 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며, 각기 체계적 전수 교육과 정기 공연을 통해 그 가치를 확산시키고자 노력하고 있다. 이들 속에는 말 그대로 양주 지역민들의 생산 활동 진작과 삶의 기쁨 및 슬픔이 깃들어 있다. 그 다섯 마당 이야기를 여기에 담아 보았다. -양주소놀이굿
양주소놀이굿은 소를 매개로 하면서 추수 감사와 풍년 기원과 재액(災厄)을 막는 농경의례이자 굿이다. 그렇기 때문에 본래는 추수 후나 동짓달, 정월에 마을에서 정말 신명나게 올려졌다고 한다. 1980년 11월 17일 중요 무형 문화재로 지정된 후 양주소놀이굿보존회에서는 전용 회관과 놀이마당을 마련하고 이곳에서 농번기로 들어가는 5월을 중심으로 신명을 울려 풍년과 무사함을 기원하고 있다. 시대는 변했지만 그러한 바람은 오늘도 농사일로 연결된다. ▲ 양주소놀이굿 공연 - 양주 들노래
「양주 들노래」는 논농사를 지으면서 양주 토박이말로 부르는 농업 노동요이다. 양주는 예로부터 논농사가 발달한 곡창 지대로서 노동요가 매우 발달할 수 있었다. 1930년대에 출생한 김병옥·김환익·허영이·황상복·박인병 등의 들노래 소리를 전하고 있는 점으로 볼 때 적어도 1900년대 초반에 이미 들노래가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지역적 특색으로 인해 조금씩의 차이점을 가지고는 있지만 「양주 들노래」와 유사한 소리를 이웃 고장인 파주·고양·동두천·포천 등지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 「양주 들노래」 상설 공연 - 양주농악
양주농악 두레농악대는 장단에 맞춰 농사일을 즐겁게 하도록 유도하고 동시에 단합을 통한 작업 능률을 올리는데 목적이 있다. 선조들은 마을에서 새벽에 징과 북을 울려 ‘두레패’를 모아 ‘두레’를 조직하여 우장과 호미 등을 갖추고 모심기 및 밭 붙임 김을 맬 때, 또는 이 논에서 저 논으로 옮길 때, 집으로 돌아올 때, 두레패를 중심으로 농악에 맞추어 일을 하면서 농사일의 고단함을 농악과 춤으로 풀었다. 안성농악이나 평택농악의 걸립 농악과는 달리 두레 농악의 소박한 가락을 유지하는 등 다른 지역 농악과 비교되는 뚜렷한 특색을 가지고 있어 2006년 3월 20일 경기도 무형 문화재 제46호로 지정되었다. ▲ 양주농악 공연 - 양주별산대놀이
양주별산대놀이는 서울과 중부 지방에 전승되어 온 산대놀이의 한 분파이다. 양주별산대는 200여 년 전에 양주 사람 이을축(李乙丑)이 서울 사직골 딱딱이패들에게 배워 양주에 정착시킨 것이다. 이을축은 양주 최초의 가면 제작가였다. 그는 양주별산대놀이를 주로 사월 초파일, 단오, 추석 때에 연희하였고, 그밖에 가뭄 때의 기우제(祈雨祭) 행사로 연출하였다. 산대(山臺)는 산의 형상을 본떠 만들어서 수직으로 배치한 여러 개의 좁은 무대이다. 기암괴석 여기저기에 동굴과 절벽이 있고, 그곳에서 잡상(雜像)들이 널리 알려진 고사 장면을 재현하고 있다. 산대에는 한 장소에 고정시켜 놓은 대산대(大山臺)와 밑에 바퀴가 달려 있어 이동할 수 있는 예산대(曳山臺)가 있다. 궁정에서 주관한 산대는 행사를 위하여 설치하였지만, 현재의 산대놀이는 궁정의 공연물을 계승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산대놀이는 연희자들이 그들의 권위를 나타내기 위하여 ‘산대’라는 명칭을 사용한 것으로, 별산대는 본산대와 구별하여 붙인 명칭이다. 양주별산대놀이는 1964년 12월 7일 중요 무형 문화재 제2호로 지정되었다. ▲ 양주별산대놀이 공연 - 양주 상여와 회다지 소리 
「양주 상여·회다지 소리」는 고릉말에서 사람이 죽어 발인에서 무덤을 만드는 데까지의 장례 절차마다 부르는 선소리와 회다지 소리를 말한다. 고릉말이란 능이 있던 마을 혹은 능을 조성하기에 적합한 지역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공평하다. 아무리 왕후장상, 영웅호걸이라도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의 과정도 그렇지만 죽음을 처리하는 과정은 공평하지 않다. 그러한 내용을 양주 지역에서는 일찍부터 상여를 메며 부르는 상여 소리와 시신을 묻은 후 땅을 다지며 봉분을 쌓는 소리를 통해 반영하였다. 따라서 장례 의식요이자 노동요라고도 할 수 있다. 양주 지역에서 이러한 소리가 발달하게 된 데에는 옛 양주 지역에 동구릉, 태릉, 강릉, 온릉 등 많은 왕릉이 들어서면서 여기에 양주 사람이 많이 동원되었던 배경이 있었다. 「양주 상여·회다지 소리」는 1998년 9월 21일 경기도 무형 문화재 제27-1호로 지정되었다. ▲ 「양주 상여·회다지 소리」 공연 신명과 흥의 미학, 양주 5대 무형 문화재 관련 영상 바로보기 신명과 흥의 미학, 양주 5대 무형 문화재 관련 영상 바로보기 신명과 흥의 미학, 양주 5대 무형 문화재 관련 항목 「디지털양주문화대전」(http://yangju.grandculture.net/)은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편찬사업을 통해 완성된 34번째 디지털문화대전입니다. 「디지털양주문화대전」은 양주의 디지털백과사전으로, 양주시의 역사와 문화를 비롯한 모든 정보를 집대성하여, 인터넷을 통하여 누구든지 이를 쉽게 활용할 수 있게 제작되었습니다. 2010년 5월 양주시와의 협약을 통해 추진된 이 사업은 2010년 8월부터 2011년 1월까지 기초조사연구를 통해 양주시의 향토문화 자원을 조사ㆍ분석하는 작업이 진행되었습니다. 이후 원고 집필 사업(2010년 12월~2011년 9월, 양주문화원), 원고 윤문‧교열 사업(2011년 5월~12월, ㈜휴머니타스), 멀티미디어 콘텐츠 제작 사업(2011년 8월 2012년 6월, ㈜한국기록문화연구소), 대표 콘텐츠 입체 영상 제작 사업(2011년 12월~2012년 4월, ㈜위코프), XML 데이터 제작 사업(2012년 4월~6월, ㈜지식공학), 서비스 시스템 개발 사업(2012년 8월~9월, ㈜초록넷), 콘텐츠 감수 수행(2012년 9월, 양주시 추천 자문위원)이 수행되었습니다. 2010년 5월부터 2012년 11월까지 약 2년에 걸친 작업 기간을 통해 원고 집필, 교열‧윤문, 멀티미디어 제작, XML 데이터 제작, 서비스 시스템 구축 사업이 진행되었고, 총 1,970개의 항목, 원고지 11,409매, 사진과 동영상 등 총 4,896종의 멀티미디어 자료를 담고 있습니다. 디지털 콘텐츠로 구축된 정보는 지역별 사이트와 대형 민간 포털(네이버, 다음, 구글 등)을 통해 이용자들이 손쉽게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그럼 양주를 알아보기 위한 여행을 떠나보실까요? 신명과 흥의 미학, 양주 5대 무형 문화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