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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의 문화를 찾아서
 
한국학중앙연구원 온라인소식지 09월호 A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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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의 문화를 찾아서 디지털진도문화대전 홈페이지 바로가기 Tip.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이란?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은 전국 230개 시·군·구 지역의 다양한 향토문화 자료를 발굴․수집, 연구․분석하여 체계적으로 집대성하고, 이를 디지털화하여 인터넷을 비롯한 다양한 정보 통신 매체를 통해 서비스하며, 이용자가 또 새로운 지식의 생산자가 되는 순환형 지식정보시스템을 구축하는 대규모 문화 콘텐츠 편찬사업입니다. 이는 그간 미진했던 전국의 향토문화 자료의 보존 및 계승의 대책 마련과 체계적이고 종합적인 지역문화 정리사업의 필요성에 의해 추진되는 사업으로서, 지식·문화산업의 기반을 마련하고, 지역 간 균형 발전과 지역 경제 활성화에 기여하며, 인터넷을 통해 전국 향토문화의 세계화를 이루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홈페이지 바로가기 소치기념관 소치기념관은 소치 허련의 가문이 이어온 남종화의 계보와 그들의 활동사항 등을 소개하는 전시관으로서 복제화, 수석, 단지, 그릇 등 허련의 소장품들 및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소치기념관 옆에는 진도역사관이 있는데 진도 출신 서화가들의 작품을 별도의 전시실에 전시함으로써 현대 화단과 연계가 이루어져 더욱 효과적으로 운용되고 있다. 1층 영상실에서는 운림산방의 역사와 전경, 그리고 소치 허련의 작품과 화맥을 한눈에 보여주고 있다. 서화 전시실에서는 소치 허련의「송죽매국」,「양선죽창」, 미산(米山) 허형(許瑩)의「고사선유」,「팔곡백납병」그리고 남농(南農) 허건(許健)의「양유춘색」,「계산유곡」등 소치의 작품들과 5대에 걸쳐 화가로 활동했던 후손들의 작품들을 전시하고 있다. 소치기념관은 한 집안의 그림 전통을 보여주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근대 호남 회화사의 주요 흐름을 보여준다는 데 큰 의의가 있다. [사진] 한 집안의 그림 전통을 보여주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근대 호남 회화사의 주요 흐름을 보여주고 있는 소치기념관. 진도 다시래기 다시래기는 출상(出喪) 전날 밤에 밤샘을 하면서 노는 익살스러운 놀이의 하나이다. 대개의 장례 의식은 고통스러운 절차이지만 진도다시래기의 특징은 슬픈 상황에서 파격적인 우스개짓을 함으로써 슬픔을 웃음으로 바꾸어 놓는 것이다. 전체 과정은 연희자들의 춤과 대화로 이루어져 있다. 다시래기의 연희자는 보통 상두꾼들이지만 진도다시래기에서는 놀이패나 다시래기꾼을 초청하여 같이 놀았다. [사진] 영등축제에서 열린 진도 다시래기 공연 모습 진도다시래기는 출상 전날 밤 초상집에 온 마을 사람들이 모여 죽은 사람의 극락환생을 축원하며, 상주들의 슬픔을 위로하고 달래는 의식이다. 초상집에서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며 노는 것은 죽음을 문화적으로 수용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성적인 재담과 아기를 출산하는 것은 죽음과 배치되는 연극적 설정으로, 죽음의 결손을 성적인 활기와 새 생명의 출산으로 극복하는 것이다. [동영상] 상가(喪家) 마당에서 노는 다시래기 진도 다시래기 동영상 바로가기 진도 소포 걸군 농악 진도의 소포걸군농악은 구전되는 계보로 보아 100여 년간 기능이 끊이지 않고 계속 유지되고 있으며 자체 보존회도 구성되어 있다. 1988년 제17회 남도문화제와 1995년 제23회 남도문화제에 진도군 대표 민속팀으로 참가해 장려상을 받은 바 있는 진도군의 대표적인 농악대다. 『소포걸군악보』는 농악의 진법기록으로 임진왜란 당시 얻어먹고 돌아다니면서 농악으로 가장을 한 의병들의 작전놀이 기록이라고 주장되기도 하는데 농악과 관계되는 진도의 또 다른 문헌들과 마찬가지로 군악적인 성격이 강한 진도농악의 특성을 증명해주는 자료다. 진도군의 대표적 농악인 진도 소포 걸군 농악. 소포걸군농악은 수십 명으로 농기수(農旗手)를 비롯하여 영기(令旗)·상쇠·중쇠·징수·설장구·중장구·종장구·설북·중북·종북·설소고·소고·창부·조리중·포수·집사 등으로 편성되어 있다. 각 지역의 농악은 연희를 중심으로 하지만, 소포걸군농악의 경우에는 적을 색출하는 진법의 걸군악이었다. 치는 순서로는 당맞이(들당산)굿, 문재비굿, 샘굿, 가정굿, 새립(사립)굿, 마당굿, 휘안굿, 마당인사굿, 날당산굿 순이다. [사진] 100여 년간 끊이지 않고 유지되고 있는 진도 소포 걸군 농악은 자체 보존회가 구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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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진도문화대전」속으로의 여행 2부 한국학중앙연구원의 대표적인 사업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그중 전라남도 진도 지역 정보를 총망라한 「디지털진도문화대전」을 소개합니다. [그림] 디지털진도문화대전 홈페이지 화면「디지털진도문화대전」(http://jindo.grandculture.net)은 전라남도 진도군의 디지털 백과사전으로, 진도의 역사와 문화를 비롯한 모든 정보를 집대성하여, 인터넷을 통하여 누구든지 이를 쉽게 활용할 수 있게 제작되었습니다. 2004년 9월부터 2005년 2월까지 전남대학교에서 선행조사를 통해 진도군의 향토문화 자원을 조사ㆍ분석하는 작업을 진행하였습니다. 이후 2005년 8월 진도군과의 협약, 텍스트 데이터 제작 및 시청각 자료 수집 사업(2005년 11월~2006년 9월, 전남대학교), 진도 지역 마을항목 현장조사 연구 사업(2005년 12월~2006년 7월, 전남대학교), GIS 제작 사업(2006년 8월~2006년 12월, (주)멀틱스), 서비스시스템 개발 사업(2006년 9월~12월, (주)애듀미디어, (재)광주정보문화산업진흥원, 한국예총진도지부, (주)에듀시티)이 수행되었습니다. 2004년 9월부터 2006년 12월까지 약 2년에 걸친 작업 기간을 통해 월고 집필, 멀티미디어 제작, 서비스 시스템 구축 사업이 진행되었고, 총 1,618개의 항목, 원고지 10,420매, 사진과 동영상 등 총 2,814종의 멀티미디어 자료를 담고 있습니다. 디지털 콘텐츠로 구축된 정보는 지역별 사이트와 대형 민간 포털(네이버, 다음, 구글 등)을 통해 이용자들이 손쉽게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그럼 진도에 대해 알아보는 여행을 떠나실까요? 운림산방 운림산방은 소치 허련이 49세 때부터 84세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작품 활동을 하였던 곳으로 남종문인화를 대표하는 호남화단의 산실이다. 운림각(雲林閣) 또는 소허암(小許庵) 이라고도 하며, 서울에서 활약하던 허련이 그의 나이 49세 때인 1857년 스승인 김정희가 세상을 떠나자 고향으로 돌아와 작품 활동을 하기 위해 건립하였다. 허련에서 시작되어 54년을 이어오던 운림산방은 1911년 아들 허형이 50세 되던 때에 다른 사람에게 팔고 강진으로 이사하였다. 그러다가 1982년 허련의 손자인 남농 허건에 의해 다시 사들여져 쇠락한 운림산방이 복원되었고, 진도군에 기증되어 현재는 진도군 소유로 진도군에서 일괄 관리하고 있다. 허련이 기거하던 초가로 된 안채와 사랑채, 기와로 된 그림을 그리던 화실, 그리고 운림지(雲林池)라고 부르는 연못이 있다. 운림산방에는 백일홍, 매화, 동백과 오죽 등 갖가지 나무와 화초가 심어져 있다. 허련이 직접 심었다고 하는 백일홍, 백매에 대한 기록이 그의 저술인『몽연록』에 전하나 현재 남아 있는 것은 아니다. 운림산방 앞의 연못은 복원되어 한 변 35m 가량 되는 사각형 연못의 중심에는 백일홍을 심은 둥근 섬이 있다. [사진] 허련이 직접 심은 백일홍과 백매 등 온갖 나무와 화초로 이루어진 운림산방. 최근 운림산방 주변에는 허련의 작품과 그의 가법을 이은 후손들의 작품을 전시할 수 있는 소치기념관, 진도의 역사를 보여주는 진도역사관이 건립되고, 연못 등이 보수되어 이곳을 찾는 관광객들의 좋은 볼거리가 되고 있다. 전라남도 지정기념물 제51호로 지정되어 있다. 운림산방은 허련의 화실일 뿐만 아니라 소치 허련, 미산 허형, 남농 허건, 임전 허림, 의재 허백련, 그리고 허건의 손자들에 이르는 화맥의 산실이다. 호남을 남종문인화의 고장이라 부르는 근거가 되는 중요한 유적지라 할 수 있다. [동영상] 운림산방은 남종문인화를 대표하는 호남화단의 산실이다. 운림산방 동영상 바로가기 
허련 - 
허련은 어려서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였으나 본격적인 그림 수업을 받지는 못하였다. 28세 때인 1835년에 허련은 전라남도 해남 연동에 있는 윤선도의 고택 녹우당에 가서 윤두서의 『공재화첩』을 빌려 몇 달에 걸쳐 모사해 보면서 그림 공부를 시작하였다. 이후 오랫동안 그림 그리기에 정진하다가 49세 때인 1856년에 진도로 낙향하여 화실인 운림산방을 마련하고 84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각처를 유람하며 작품 활동을 하였다. [사진] 한국 남종문인화의 대가 허련. 문인화를 중심으로 특유의 필치를 구사한 허련의 회화는 당대에도 추사 김정희로부터 “압록강 동쪽에 소치를 따를 만한 화가가 없다”거나 “소치 그림이 내 것보다 낫다”는 찬사를 들으면서 당시 화단을 풍미하였다. 허련은 조선 말기 한국의 남종문인화의 발전에 기여하면서 이를 근대로 이어주는 가교 역할을 하였다. 허련의 화풍은 아들인 미산(米山) 허형(許瀅), 손자인 남농(南農) 허건(許楗), 방손인 의재 허백련 등에게 계승되었고, 이들에 의해 호남 화단의 특징으로 자리 잡아 호남 남종문인화의 종조라 할 수 있다. [사진] 소치 허련이 헌종에게 바친 산수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