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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의 문화를 찾아서
 
한국학중앙연구원 온라인소식지 01월호 A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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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성남문화대전 홈페이지 바로가기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홈페이지 바로바기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은 전국 230개 시·군·구 지역의 다양한 향토문화 자료를 발굴․수집, 연구․분석하여 체계적으로 집대성하고, 이를 디지털화하여 인터넷을 비롯한 다양한 정보 통신 매체를 통해 서비스하며, 이용자가 또 새로운 지식의 생산자가 되는 순환형 지식정보시스템을 구축하는 대규모 문화 콘텐츠 편찬사업입니다. 이는 그간 미진했던 전국의 향토문화 자료의 보존 및 계승의 대책 마련과 체계적이고 종합적인 지역문화 정리사업의 필요성에 의해 추진되는 사업으로서, 지식·문화산업의 기반을 마련하고, 지역 간 균형 발전과 지역 경제 활성화에 기여하며, 인터넷을 통해 전국 향토문화의 세계화를 이루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TIP)『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이란? 망경암 관련 항목 바로가기 칠성대 중수비는 회백색의 화강암으로 만들어졌으며 바위를 비좌 삼아 세워져있다. 비의 규모는 비신 높이 136㎝, 너비 위 53㎝, 너비 아래 47㎝, 두께 14㎝이다.비신의 전후좌우 4면에 모두 비문이 새겨져 있는데, ‘대한민국광주영장산망경암칠성대중수서(大韓民國廣州靈長山望京庵七星臺重修序)’라는 제하에, 망경암과 칠성대의 유래를 기록하고, 영장산 신령과 법륜아미(法輪阿彌), 봉국세존(奉國世尊), 망경약사(望京藥師), 칠성대 성신(星神) 등에게 대한제국 황실의 번영을 기원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비문은 망경암 소비와 마찬가지로 평원대군과 제안대군의 봉사손(奉祀孫)인 이규승(李奎承)이 지었다.비문에서 고종을 황제(皇帝)로 표현한 점이 특이하며, 우리 민족의 자주 정신을 대내외에 과시한 유적이다. 망경암에는 2기의 비가 있는데 1898년에 건립된 칠성대 중수비를 대비(大碑)라 부르고 그 옆에 56㎝ 거리를 두고 나란히 세워진 작은 비를 소비(小碑)라 부른다. 이 중에서 소비는 조선 왕실의 번영과 수복을 기원하기 위해 1874년(고종 11)에 건립되었다. 흰색의 대리석으로 만들어졌으며 바위를 비좌 삼아 세워져있다. 비의 규모는 비신의 높이 87㎝, 너비 42.5㎝, 두께 11.5㎝이다. [사진] 사람들이 와서 복을 빌고 가는 망경암 칠성대 서울을 한눈에 내려다보는 망경암 망경암의 역사에 대해서는 ‘망경암칠성대중수비’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 비문에 의하면, 망경암은 서울이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영장산 중턱 위에 위치하고 있어 망경암이라고 했으며,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 걸쳐 임금이 친히 찾아와 나라와 백성의 안락과 수복을 기원한 장소라 한다. 조선 왕실에서는 세종의 일곱째아들로 천연두를 앓다 19세에 요절한 평원대군[1427~1445]과 예종의 둘째아들로 평원대군의 양자로 입양된 제안대군[1466~1525]의 명복을 빌기 위해 망경암마애여래좌상의 위치에 칠성단을 세워 칠성재(七星齋)를 지냈으며, 이로 인해 이곳을 칠성대라 불렀다고 한다. 이와 같이 망경암은 칠성신앙의 주요 도량이었으며, 고려 말기에 봉국사, 법륜사와 함께 영장산에 지어진 3대 사찰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사진] 영장산에 지어진 3대 사찰 중 하나인 망경암. -망경암 마애여래좌상 망경암 우측의 자연 암벽 상단에 작은 장방형의 감실(龕室)을 만들고 그 안에 부조(浮彫)한 불상인 망경암 마애여래좌상이 있고, 그 주위 14군데에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다. 망경암 마애여래좌상 동영상 바로보기[사진] 망경암 마애여래좌상 관련 동영상 화면 망경암 마애여래좌상은 결가부좌(結跏趺坐: 오른발을 왼쪽 넓적다리 위에 놓은 뒤 왼발을 오른쪽 넓적다리 위에 놓고 앉음)의 좌상으로 양 어깨를 덮은 통견(通肩)의 법의(法衣)를 입고 있으며, 왼손은 가슴에 대고 오른손은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 왼손은 무릎 위에 두고 오른손은 땅을 가리키는 형상)을 취하고 있다. 머리는 민머리를 하고 있는데 얼굴 모습은 마모가 심하여 그 정확한 형태를 파악하기 어렵다. 마애여래좌상 우측과 아래로는 암벽을 평평하게 다듬은 다음 14곳에 얕은 감실을 파고 그 안에 ‘大皇帝陛下萬萬歲(대황제폐하만만세)’ 등의 명문을 새겨놓았다. 망경암 소비와 대비 망경암 마애여래좌상은 조형미나 조각 기법이 그다지 우수하지는 않지만 정확한 건립 연대를 알 수 있는 몇 안 되는 조선 후기 불상 중 하나이며, 또한 당시의 칠성 신앙을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로서 가치가 있다. [사진] 흰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망경암 소비는 조선 왕실의 번영과 수복을 기원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사진] 조선 후기 칠성신앙을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인 망경암 마애여래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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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국사 연결 항목 바로가기 「디지털성남문화대전」속으로의 여행 한국학중앙연구원의 대표적인 사업『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그 중 경기도 성남 지역 정보를 총망라한 「디지털성남문화대전」을 소개합니다. [그림]「디지털성남문화대전」홈페이지 화면 「디지털성남문화대전」(http://seongnam.grandculture.net/)은 경기도 성남시의 디지털 백과사전으로, 성남의 역사와 문화를 비롯한 모든 정보를 집대성하여, 인터넷을 통하여 누구든지 이를 쉽게 활용할 수 있게 제작되었습니다. 2003년 6월 성남시와의 협약을 통해 추진된 이 사업은 2003년 8월부터 10월까지 기초조사연구를 통해 성남시의 향토문화 자원을 조사ㆍ분석하는 작업이 진행되었습니다. 이후 특별기획항목 조사작업(2003년 10월~12월, 한국학중앙연구원), 성남 지역 마을 항목 콘텐츠 제작 사업(2003년 12월~2004년 2월, 한국학중앙연구원), 텍스트데이터 제작 및 가공(2004년 1월~2004년 8월, ㈜다할미디어), 서비스 시스템 구축 사업(2004년 9월~10월, 애듀미디어 콘소시엄)이 수행되었습니다. 편찬이 완료된 후 2006년부터 2012년까지는 콘텐츠에 대한 수정증보사업을 진행하였습니다. 2003년 6월부터 2005년 2월까지 약 2년에 걸친 작업 기간을 통해 총 2,712개의 항목, 원고지 19,700매, 사진과 동영상 등 총 3,189종의 멀티미디어 자료를 담고 있습니다. 디지털 콘텐츠로 구축된 정보는 지역별 사이트와 대형 민간 포털(네이버, 다음, 구글 등)을 통해 이용자들이 손쉽게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그럼 성남에 대해 알아보는 여행을 떠나보실까요? 요절한 두 공주의 명복을 비는 봉국사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태평동에 위치한 봉국사는 영장산 서남쪽 기슭에 있다. 고려 현종 19년(1028년)에 창건되었으며, 그 뒤 폐허화된 것을 조선 태조 4년(1395년) 왕명으로 담화(曇華)가 중수하였다. 1674년(현종 15)에는 1년 사이에 요절한 공주 명혜와 명선의 명복을 빌기 위해 현종이 공주의 능 근처에 있던 이 절을 축존화상에게 명하여 중창하게 하고 절 이름을 봉국사라 하였다. [사진]봉국사의 석탑과 석등, 봉국사 대광명전 앞에 있는 삼층석탑에는 부처의 진신사리와 불경을 봉안하고 있다.  - 봉국사의 역사 한국전쟁 후 절이 퇴락하자 1958년 비구니 법운(法雲)이 중수하였으며, 1967년 혜성(彗星)이 삼성각을 세우고, 1969년 요사채를 신축하였다. 1974년에는 법당을 완전 해체하여 복원하고, 목조 본존불에 다시 금칠을 하였다. 1977년 5월 삼층석탑과 석등을 조성하고, 타이에서 가져온 부처의 진신사리(眞身舍利) 3과 중 1과를 수정함(水晶函), 금함(金函), 자기(磁器), 대리석함(大理石函) 등에 차례로 넣어 불경과 함께 3층 석탑에 봉안하였다. 조선 후기의 불전 양식을 잘 간직한 대광명전 봉국사의 주전인 대광명전은 설립 연대가 분명하며 조선 후기의 불전 형식을 잘 간직한 건물로 문화재적 가치가 커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 101호로 지정되었다. [사진] 경기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봉국사 대광명전 전경 운주사 석조 불감 대광명전의 주존불인 아미타여래좌상은 1674년(현종 15) 대광명전이 건립될 때 함께 조성되었다. 좌우에 협시한 관음보살과 지장보살은 1993년에 조성된 것이다. 아미타불은 대승불교에서 서방정토(西方淨土) 극락세계에 머물면서 법(法)을 설한다는 부처이다. 봉국사 대광명전의 주불이 아미타불이라는 사실은 봉국사가 현종[1641~1674]의 어린 두 딸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워진 절이라는 건립 동기를 뒷받침해주고 있다. -봉국사 아미타여래좌상 [사진] 봉국사 아미타여래좌상, 봉국사 아미타여래좌상은 본래 목조 불상으로 조선 후기의 불상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쌍봉사 철감선사 탑 봉국사 목조 아미타여래좌상은 본래 목조 불상이지만 1974년 봉국사를 해체하고 복원할 때 겉에 금칠을 다시 입혀 외관상 나무 재질로 보이지는 않는다. 전체 높이는 112㎝, 너비는 76㎝이며, 법의(法衣)는 양 어깨에 걸친 통견(通肩) 형식이다. 조선 후기의 불상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고 평가되나, 고려 불상의 조형기법이 드러나 있다는 견해도 있다. 일반적으로 아미타불은 극락전, 또는 극락보전에 봉안하고, 대광명전에는 비로자나불을 안치하는 것이 상례이므로 봉국사 대광명전의 본래 명칭은 아미타불을 봉안한 극락보전이었을 것으로 추측하기도 한다. [사진] 봉국사 천왕문과 누각. 일주문을 들어서면 천왕문 위에 범종루가 있다.  [사진] 봉국사 관련 동영상 화면봉국사 동영상 바로보기 도심속의 사찰인 봉국사에는 대광명전 이외에도 삼성각, 요사채 등이 있으며, 일주문과 천왕문, 범종루 등의 부속건물도 갖추고 있다. 대광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로 지붕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에 풍판(지붕 밑으로 다는 널빤지)이 있으며, 지붕의 처마를 받치는 공포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으로 몸체에 비해 지붕이 커서 외관이 장중하다. 자연석 기단에 놓인 고복형(鼓腹形) 초석 위에 민흘림기둥이 세워져 있으며, 쇠서의 장식적 형태, 연봉과 봉황 조각 등이 18세기 말의 수법을 보이고 있다. 대광명전은 원래 비로자나불을 모시는 법당이나 이 절에서는 아미타여래를 모시고 있다. 때문에 공주의 명복을 빌기 위해 건립된 이 전각의 본래 명칭이 아미타불을 봉안한 극락보전이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법당의 내부에는 중앙에 불단이 설치되어있고, 나무로 만든 아미타여래좌상이 있으며 그 위에는 화려한 닫집이 있다. 불상의 좌우로 관음보살, 지장보살을 모시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