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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학중앙연구원 온라인소식지 01월호 A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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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의 애틋한 효심이 담겨 있는 주상전하 팔고조도 [사진] 원창애 (장서각 책임연구원) 장서각에는 조선시대에 편찬된 여러 종류의 왕실 족보가 소장되어 있다. 그 중 특히 눈길이 가는 족보가 주상전하 팔고조도(장서각 K2-1079)이다. 이 팔고조도는 영조의 것인데, 영조가 오로지 어머니 숙빈최씨를 위해서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숙빈최씨는 무수리 출신으로 숙종의 후궁이 되어 왕의 어머니 자리에까지 오른 드라마틱한 인물이기에, 사극에서도 자주 다루었다. 숙빈최씨의 아들 영조는 이복형인 경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왕으로서 그의 권위에 걸림돌이 되었던 것은 그의 생모였다. 이외에도 영조가 생모의 신분 상승을 위해서 노력한 흔적이 장서각에 고스란히 남아있는데, 주상전하 팔고조도가 바로 그것이다. 팔고조도는 족보의 일종으로 기록 대상자의 아버지 쪽과 어머니 쪽 4대조부모를 각각 기록한 족도(族圖)이다. 영조의 경우 아버지 쪽 4대조부모들은 국왕과 현달한 왕후 가문 인물이 기록되어 있지만, 어머니 쪽 4대조부모는 초라하였다. 영조가 즉위하여 그의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만이 영의정과 정경부인으로 추증되었을 뿐이었다. 1744년(영조 20) 영조는 사서인(士庶人)들도 동지중추부사가 되면 3대를 추증하는데, 왕의 사친(私親)은 아버지만을 추증해서 되겠느냐면서 이조에 숙빈최씨의 3대까지 관직을 추증하도록 명하였다. 그 해 영조는 어머니 쪽 선조들에게 새롭게 추증된 벼슬이 기록된 자신의 팔고조도를 특별히 제작하여 숙빈최씨의 사당인 육상묘에 봉안하였다. 왕의 팔고조도는 종부시와 사고(史庫)에만 보관하는 것이 상례이다. 왕의 팔고조도가 사친의 사당에 봉안된 것은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영조가 이 팔고조도를 어머니 사당에 특별히 봉안한 것은 미천한 출신으로 무시당하였던 어머니의 한을 어루만져 주고자 한 것이다. 한 나라의 왕이지만 자신의 생모를 왕의 어머니로서 예모를 갖추는데 20년 이상이 걸렸다. 어느 신료 한 사람도 숙빈최씨를 왕의 어머니로 대우하는 데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지만, 영조는 꿋꿋하게 기회가 될 때마다 생모의 지위를 높여갔다. 이 팔고조도에는 영조의 그러한 노력과 효심이 깃들여 있다.  그런데, 이 도면에 대한 설명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놀라운 사실이 그 이면에 숨겨져 있다. 1929년 조선총독부는 전국에 산재한 왕실 자녀들의 태실을 지금의 파주 서삼릉(西三陵)으로 옮기는 일을 추진했다. 태실 안에 있던 태를 담은 항아리와 지석(誌石)을 빼내어 옮겨 묻는 일이었다. 겉으로는 전국의 태실을 안전하게 통합 관리해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왕조의 정기를 끊기 위한 속셈이 깔려 있었다. 그리고 궁궐에 있던 태봉까지도 예외 없이 찾아내어 서삼릉으로 옮겼다. 이 도면은 1929년, 궁궐 안에 있던 세 곳의 태봉을 봉출해 간 자리를 그린 것이 된다. 이러한 사실은 장서각의 필사본 도서인 『태봉 胎封』에 상세한 기록이 있어 그 실상을 알게 된다.  창덕궁에 위치가 확인된 것은 영왕과 덕혜옹주, 고종 제8남의 태실 등 세 곳뿐이다. 현재 세 분의 태실은 서삼릉으로 가있지만, 태항아리는 국립고궁박물관 수장고에 있다. 있어야 할 자리를 지키지 못했지만, 태실은 왕조의 번창과 생명 존중의 뜻이 담긴 조선왕실의 주요 유적이 아닐 수 없다. 창덕궁의 태봉이 있던 자리에 작은 표석 하나 세우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 아닐까. 도 3. 동궐도, 견본채색, 584×273㎝, 고려대 박물관 도 1 에 그려진 공간을 동궐도에 표시하면 붉은색 원이 있는 지점임.  창덕궁의 후원( 後園) 이자 일제강점기 때 비원( 秘苑) 으로 불린 장소다. 사진1. 주상전하 팔고조도(K2-1079) 무수리라는 미천한 신분의 어머니를 둔 영조는 자신의 생모가 합법적으로 왕의 어머니에 맞갖은 예우를 받을 수 있는 전례(前例)를 만들어 갔다. 그 모범이 된 인물은 인조의 할머니이며, 추숭된 원종의 어머니 인빈김씨였다. 영조는 선조의 후궁이었던 인빈김씨에게 왕의 어머니로서의 예우를 갖추어 현양하고, 그러한 전례를 숙빈최씨에게도 적용시켰다. 그 결과 1758년(영조 29) 숙빈최씨의 사당인 육상묘(毓常廟)를 육상궁으로, 묘소인 소령묘(昭寧墓)를 소령원으로 승격시켰으며, 여러 차례 시호를 올린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