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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학중앙연구원 온라인소식지 04월호 A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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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문인, 명나라 사신과 필력을 겨루다 [사진] 김덕수 (장서각 국학자료연구실) 조선은 개국과 함께 ‘사대’와 ‘교린’이라는 기준 하에 중국 및 주변국과의 긴밀하고 지속적인 외교관계를 유지했다. 이 가운데 대중국 관계를 중시했기 때문에 양국 간 사신의 왕래가 빈번했다. 중국에서 파견된 사신을 조사(詔使), 혹은 천사(天使)라 칭했는데 이들은 조선에 상당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에 조사의 접대는 국가적 사업으로 추진되었고 조선은 막대한 국력의 소모를 기꺼이 감내해야만 했다. 조사를 접대할 때 특히 고심한 것은 그들과의 성공적 수창(酬唱)이었다. ‘소중화’로 자처하던 조선의 문풍을 선양할 기회였기 때문이다. 명나라도 조선 문사와의 수창에서 대국의 체모를 잃지 않기 위해 통상 한림원 학사 중에서 사신을 엄선하여 보냈다. 두 세기에 걸쳐 양국 문사들은 문학적으로 교유했고 그 성과물은 방대한 분량의 『황화집(皇華集)』에 남아 있다. [사진]『황화집』(1773년), 장서각 소장 조선에서는 당대 최고의 문장가를 원접사(遠接使)와 관반(館伴) 등으로 선발했다. 조사를 수행하며 시편을 주고받는 일이 이들의 주된 임무였다. 관반을 선발할 때는 신분이나 처지조차 불문했고 현직 수령까지도 불러들였다. 실례로 사헌부의 탄핵을 받던 이희보(李希輔)는 민첩한 제술력을 인정받아 관반에 임명되었고, 한산군수(韓山郡守) 이약빙(李若氷)도 수창을 위해 급히 소집되었다. 성종 연간에는 서얼 출신 조신(曹伸)을 매번 불러들여 시편을 윤색케 했다. 17세기 권필(權韠)과 정두경(鄭斗卿)은 포의로서 제술관에 임명된 대표적 인물이다. 조사들이 사행 관련 서적의 도움을 받아 수많은 작품을 미리 지어오자, 조선에서도 이에 준하는 노력을 필사적으로 행했다. 즉 의주(義州)로 떠나기에 앞서 의주에서 벽제까지 모든 역참의 판상 제영에 차운시를 준비했고, 한양에서 유람할 여러 승경지의 제영과 이전 󰡔황화집󰡕 수록 작품을 대상으로 화운시를 미리 지어놓았다. 이밖에 문장에 능한 연소한 인물을 의관(醫官) 사이에 은밀히 끼워 넣어 조사의 시편을 몰래 엿보기도 하였다. [사진] 영조어제 <황화집서> (1773년) 양국은 사대라는 중세의 보편적 질서 속에서 종적인 외교관계를 이루었다. 이에 조선은 명나라 사신에 대해 저자세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원접사와 관반들은 조사와 대등하게 필력을 겨루고 싶은 생각을 지니기도 했다. 이러한 대결의식의 기저에는 조선을 대표하는 ‘능문자’로 선발되었다는 강한 자부심이 깔려 있다.임진왜란 직후 1602년, 황태자 책립을 반포하기 위해 조사가 왔을 때의 원접사 행렬은 유례없이 성대했다. 이정구(李廷龜)가 원접사를 맡았고 이안눌(李安訥), 박동열(朴東說), 홍서봉(洪瑞鳳), 이수광(李晬光), 권필(權韠), 차천로(車天輅), 양경우(梁慶遇) 등 목릉성세를 대표하는 문호들이 대거 참여했다. 임란 이후 조선에 대한 중국인의 멸시가 만연했고 바닥난 국력 탓에 성대한 접대가 사실상 불가능했다. 이처럼 굴욕적인 사태를 회복하고자, 이정구가 전례를 들어 사한(詞翰)의 대가를 총동원할 것을 임금께 간청했고, 선조가 이를 윤허한 것이다. 바닥에 떨어진 조선의 체모를 문장으로 회복하려는 ‘이문화국(以文華國)’의 의지와 부족한 물질적 접대를 풍성한 문장으로 만회하려는 절박한 노력이 성대한 원접사 행렬 속에 숨어 있던 것이다. 명나라 사신의 입국은 1633년을 끝으로 종국을 맞았고 두 나라 간의 풍성했던 문학적 교유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청나라와의 사신 왕래는 지속되었으나 청 조사와의 공식적 수창은 한 차례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1773년 영조는 󰡔황화집󰡕이 산실될 것을 우려하여 1450년본(本)부터 1633년본까지 총 25회분의 󰡔황화집󰡕을 모아 50권 25책으로 중간하였다. 그리고 친히 서문을 지었다. 이러한 영조의 노력 속에서 문화 강국으로서의 자부심을 느낄 수 있다. 당시 두 나라 문사가 경유하며 유람했던 수많은 승경은 양국 문장의 수준을 겨루는 전장(戰場)이자 작시(作詩)의 대상이었고, 원접사와 관반들은 조선의 국가대표 시인이었다. 이제 임청각의 사람들은 500년을 지켜온 임청각과 임야 1만 2천여 평을 국가에 헌납하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다. 임청각이 단지 일개 가문의 종택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소중한 건축 문화재이자 독립운동의 역사 현장으로서 대한민국의 산 교육장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서이다. 그러나 석주선생의 자손이 일제의 호적을 거부함에 따라 4인의 친족에게 명의 신탁되어 70년간 방치됨으로써 불분명해진 소유권이 발목을 잡고 있다. 비슷한 시기, 다른 한 편에서는 송병준과 이완용 등 친일파 후손들이 국가를 상대로 토지환수소송을 제기하였다. 일신의 영달을 위하여 불의에 영합하고, 개인과 가문의 보존을 위하여 권력에 복무함으로써 식민지 조선의 지배층이 되고, 부와 권력을 누린 이들의 토지였다. 이제는 탐욕과 방종이 더 이상 낯설지 않고, 부끄러움을 아는 것이 오히려 어리석게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속에서도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것이 바로 석주선생과 임청각이 가지고 있는 진정한 명가로서의 가치 때문은 아닐까? 조선 시문에 대한 중국인의 폄하에 불만을 품은 사가(四佳) 서거정(徐居正)이 제천정(濟川亭)에 올라 조사 기순(祁順)에게 항복을 받을 요량으로 명편의 한시를 선창하는 장면, 조선 문사를 궁지로 몰기 위해 황홍헌(黃洪憲)과 왕경민(王敬民)이 미리 지어놓은 여러 편의 한시를 한꺼번에 내놓으며 차운을 요구하자 응구첩대(應口輒對)의 기민한 제술능력으로 즉석에서 아름다운 시상을 쏟아낸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솜씨는 시단의 드라마틱한 일화로서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