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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학중앙연구원 온라인소식지 03월호 A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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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서각 전시실에서 만난 승정원 일기 [사진] 백영빈 (장서각 국학자료연구실) 장서각에서는 지난 3월 3일부터 ‘조선의 국왕과 선비’라는 주제로 주로 장서각에 소장되어 있는 국가왕실 및 민간사대부 관련 고전적 및 유물 약 100종을 상설 전시하고 있다. 장서각의 새로운 구성원으로서 약간의 의무감을 가지고 둘러보던 중 책 하나가 눈에 띄었다. 겉표지에 ‘承政院日記 卷之一’ 그리고 오른쪽 실로 선침(線針)된 아랫부분에 ‘共四’라고 선명하게 적혀 있었다. 조사를 접대할 때 특히 고심한 것은 그들과의 성공적 수창(酬唱)이었다. ‘소중화’로 자처하던 조선의 문풍을 선양할 기회였기 때문이다. 명나라도 조선 문사와의 수창에서 대국의 체모를 잃지 않기 위해 통상 한림원 학사 중에서 사신을 엄선하여 보냈다. 두 세기에 걸쳐 양국 문사들은 문학적으로 교유했고 그 성과물은 방대한 분량의 『황화집(皇華集)』에 남아 있다. 나름 「승정원일기」와는 질긴 인연을 맺어 왔던 본인으로서는 여러 가지 생각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아니 ‘승정원일기’라 함은 조선의 인조(仁祖)부터 고종(高宗)때까지 승정원에서 작성한 일종의 부서 업무일지로서, 대체로 1개월 동안의 기록이 1책으로 묶여지되 겉표지에는 제목 이외에 그 수록 시기를 나타내는 중국 연호와 간지, 월 정도만 적혀 있기 때문에 전체 책수를 말해주는 ‘共’은 상상하기 힘든 일인데, 눈앞에 딱 펼쳐져 있다니, 그것도 4책 모두. 매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조금 진정하고 다시 바라보니, 본인이 알던 「승정원일기」와는 크기부터가 달랐고, 안의 내용은 여느 「승정원일기」와 비슷한 투식이었지만, 초행서(草行書) 대신 해서체(楷書體)로 단정하게 쓰여 있고 좌목(座目) 부분도 2단의 판식(板式)이 아닌 1행 서술 형식에다가 책 첫머리 제일 앞줄에는 ‘진짜’ 승정원일기에는 없는 ‘承政院日記’가 적혀 있었다. 이후 장서각에서 2010년에 한국학자료총서 43 「李道長의 承政院日記」라는 제목으로 4책 전부를 컬러판으로 영인(影印)하였으되, 본문에는 주점(朱點)으로 표점(標點)을 가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최대한 쉽게 알아볼 수 있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권수(卷首)에 장서각 연구원의 전문적인 연구논고를 게재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도장의 가계(家系)와 사환(仕宦) 및 이도장본(本) 승정원일기의 성격과 특징을 소상히 밝혀놓은 것이다. 이로써 장서각 전시실에서 보았던 4책짜리 「승정원일기」에 대한 의문은 말끔히 해소되었다. 신석호(申奭鎬) 선생의 본격적인 연구 이래로 선배 연구자들의 문자향(文字香)을 느낄 수 있는 순간이었다. 인조(仁祖) 즉위(1623년) 이래로 1910년 8월까지 주서 2명(때로는 가주서 추가)이 288년간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국사의 전반을 기록하여 3,243책을 전하고 있는, 단일 서명으로 현존하는 사상 최고의 기록물이라는 「승정원일기」는 이미 국가적 차원(1999년 국보 303호 지정)을 넘어 세계기록유산으로서 2001년 유네스코에 등재되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승정원일기」의 모년 모월 하루 동안만의 원문을 현대 한글로 옮기려면, 편차가 있기는 하지만 원고지 100장을 예사로 넘긴다. 옛 선인(先人)의 서권기(書卷氣)에 압도당할 뿐이다. 이제 임청각의 사람들은 500년을 지켜온 임청각과 임야 1만 2천여 평을 국가에 헌납하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다. 임청각이 단지 일개 가문의 종택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소중한 건축 문화재이자 독립운동의 역사 현장으로서 대한민국의 산 교육장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서이다. 그러나 석주선생의 자손이 일제의 호적을 거부함에 따라 4인의 친족에게 명의 신탁되어 70년간 방치됨으로써 불분명해진 소유권이 발목을 잡고 있다. 비슷한 시기, 다른 한 편에서는 송병준과 이완용 등 친일파 후손들이 국가를 상대로 토지환수소송을 제기하였다. 일신의 영달을 위하여 불의에 영합하고, 개인과 가문의 보존을 위하여 권력에 복무함으로써 식민지 조선의 지배층이 되고, 부와 권력을 누린 이들의 토지였다. 이제는 탐욕과 방종이 더 이상 낯설지 않고, 부끄러움을 아는 것이 오히려 어리석게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속에서도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것이 바로 석주선생과 임청각이 가지고 있는 진정한 명가로서의 가치 때문은 아닐까? 그렇다면 4책짜리 「승정원일기」는 무언가? 이 책이 곧 이도장(李道長)이라는 사람이 1630년(인조 8년)에 승정원 가주서(假注書)와 1636-1637년에 주서로서 남한산성까지 호종(扈從)하며 당시 호란(胡亂)의 상황을 작성한 초고(草稿)를, 후대에 정서(淨書)한 서책임을 알 수 있었다. 이후 이 책의 소종래(所從來)가 경상북도 칠곡 광주이씨(廣州李氏) 해은고택(海恩古宅)의 이수전(李壽銓) 선생이 본 한국학중앙연구원에 기탁한 자료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