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종묘의 역사적 위상과 그 실체 종묘는 사직과 더불어 조선왕조의 대표적인 상징 공간이다. 이곳에 모신 역대 왕과 왕비의 신주는 왕위 전승의 계보를 드러내고, 그들의 공덕을 기리며 때마다 열린 성대한 의례는 왕권의 지엄함을 시각화했다. 조선 팔도에서 나는 각종 음식과 희생을 올리고 음악, 무용 등을 대동한 의식은 실로 웅장했다. 종묘는 그 위상에 걸맞게 역사, 종교, 미술, 음악 등 다양한 분야에서 십수 년간 중요한 연구 대상이었다. 그 결과, 의례집에 따라 이곳에서 치러진 국가의례의 형식과 절차가 정리되고, 여기서 드러나는 유교적 상징성이 밝혀졌다. 그에 반해 실제로 국가의례를 수행하는 인적・물적 기반은 아직까지도 충분한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있다. 종묘의 일상적이고 주변적인 것들도 조명받지 못함은 마찬가지다. □ 종묘와 종묘제례, 새로운 연구의 시작 이 책은 앞서 말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여 종묘와 종묘제례를 크게 세 가지 시각에서 새롭게 바라보고자 했다. 첫째, 형식과 절차를 넘어 종묘와 종묘제례의 구체적인 실재를 파악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종묘를 관리하고 의례를 수행했던 종묘서 관원들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본격적으로 탐구하고, 악장 등 의례의 실제 운영 과정에서 있었던 우여곡절과 그에 따른 노력이 드러날 수 있게 했다. 둘째, 그동안 소홀하
기원전 100년경 진·변한지역은 군집목관묘와 철기로 대표되는 철기사회로 전환된다. 그로부터 기원후 170년까지에 해당하는 목관묘기에는 한동안 무문토기, 괴정동유형기의 청동기, 통나무관묘 등 기존의 유구와 유물이 지속되다가, 와질토기가 출현하고 철기와 한식문물이 다량 부장되는 등 점차 새로운 변화를 겪는다. 경상북도 경산시 양지리 1호묘는 전기 목관묘기 최고 수장층의 무덤이 생생하게 조사된 사례이다. 관 내부에 격벽이 설치된 독특한 구조의 대형 통나무관이 발견되었고, 와질토기, 청동기, 철기, 칠기 등 106종의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다. 부장 유물에서는 성숙한 철기사회이면서도 청동기의 위세가 정점에 이른 분위기가 감지된다. 이 책은 2017년에 조사되어 최근 학계에서 획기적인 무덤 구조와 부장 유물로 크게 주목받은 양지리 1호묘의 본격적인 연구이다. 유구, 청동기, 한경과 한식문물, 철기를 중심으로 양지리 1호묘를 통해 진·변한 내외 무덤문화의 공유와 변용, 기술혁신과 확산, 생산과 유통 등의 문제를 살펴보고자 한다.
오늘날 한국 사회는 청년 실업, 경기 하락, 양극화, 공동체의 와해 등 심각한 문제들을 마주하고 있다. 사회적 안전망과 신뢰와 연대의 관계망이 무너진 이 위기를 어떻게 이겨낼 수 있을까? 이 책은 1997년 IMF 금융위기 이래 신자유주의적 경제 질서로 급속히 편입되며 노출된 한국 사회의 문제들을 진단하고 호혜와 협동으로 그 해법을 제시한다. 호혜와 협동은 어떻게 이론과 제도로 정립되어 왔을까 이 책은 한국 사회에서 호혜와 협동을 어떻게 증진할 수 있을지 큰 틀에서 고민하며 시작된다. 구체적인 사례를 살펴보기에 앞서 이론과 제도를 점검하는 ‘제1부 호혜와 협동의 이론과 제도’에서는 먼저 호혜와 협동이 거버넌스와 맺는 복잡한 관계를 재설정한다. 그리고 볼로냐와 스페인 바스크의 선진 사례를 통해 거버넌스 구조가 호혜와 협동의 문화를 어떻게 강화하는지 살펴본다. 또한 호혜와 협동의 사회적 가치가 한국에서 어떻게 제도적으로 자리 잡아 왔는지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사회적경제의 정착 경로를 담론 확장과 국가 정책의 법제화 차원에서 집중적으로 검토한다. 현대 한국의 미래 지향적인 실천 사례들 ‘제2부 현대 한국의 실천 사례들’과 ‘제3부 공동자원의 새 모색’에서는 오늘날 한국에서 호혜와
□ 조선 유학 시대의 토대를 마련한 사상사, 이색 『이색』은 한국 사상가와 철학적 개념을 탐구하여 우리 안에 잠재한 사유와 문화의 근원을 이해하기 위해 기획·발간한 ‘사유의 한국사’ 시리즈 중 한 권이다. 조선 유학 시대의 연원을 마련한 인물로 평가받는 목은 이색(李穡, 1328 ~1396)의 정치사상을 살펴보고, 그 사상이 한국 중세 사상사 및 한국 사상사에서 차지하는 역사적 의미를 탐색한다. 이색은 유교·불교·도교의 전통적 사상 기반 위에 성리학을 수용하여 당대 사상과 학술을 주도하고, 왕조 유지의 관점에서 정치활동을 전개했다. 그의 제자들은 이색이 제시한 유학사상을 바탕으로 조선시대 사상과 학문을 주도하며 유교 사회를 전개했기에, 이색 사상 연구는 고려 말 성리학 수용기 사상의 성격, 조선 건국의 사상적 배경, 그리고 조선 유학 시대의 이해를 위한 중요한 단초를 제공한다. □ 한국 사상사에서 정치사상가 이색의 의미 사상의 역사적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상가가 살았던 시대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특히 독자적인 사상을 정립하고 사회 활동을 펼친 이색의 사상은 시대적 맥락 속에서 비로소 올바르게 평가할 수 있다. 이색이 활동했던 14세기는 국내외적으로 사회 변화와 위기가 빈번했던 시기였다.
경상남도의 창녕과 경상북도의 고령에는 각각 유서 깊은 보부상 단체의 문헌이 현존한다. 이 책은 근대 이행기 대표 상인 조직인 보부상을 입체적으로 조명하기 위해 『보부상자료집(人)』과 창녕박물관, 대가야박물관에 소장된 관련 기록을 총망라하여 탈초·정서·번역하고 상세한 해설을 덧붙였다. 기존 영인본 자료의 한계를 넘어 현존 문헌 및 관련 유물을 포괄함으로써 텍스트만 제시한다거나 발췌 번역하는 기존 연구 방식 대신 원문 전체의 정서, 특이점 확인, 역주를 포함한 번역, 개별 자료에 대한 해설 등을 추가해 차별화를 꾀했다. 지역별 보부상 조직의 차이점을 실증적으로 규명하여 조선 후기 상업사 연구에 새로운 시각을 제공했다. 기출간한 『장돌뱅이의 조직과 기록: 예산·덕산·면천·당진 편』(2015), 『장돌뱅이의 조직과 기록: 저산팔읍 상무우사 편』(2019), 『장돌뱅이의 조직과 기록: 저산팔읍 상무좌사 편』(2021), 『장돌뱅이의 조직과 기록: 홍주·결성·보령·청양·대흥·오천 편』(2023) 등 충청남도 지역의 보부상 자료와 비교할 수 있는 기초가 마련되었다.
□ 사도세자, 비극적인 죽음에서 복권까지 사도세자는 아버지 영조의 지나친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고 갈등을 겪다가 1762년 임오년에 결국 뒤주에 갇혀 생을 마감했다. 영조는 사도세자의 장례 절차를 간소화하고, 제문과 묘지문에 세자의 잘못과 그에 따른 처분의 정당성을 세세하게 적었다. 그리고 아들의 처분을 요구했던 사도세자의 생모 영빈이씨에게는 ‘의열(義烈)’이라는 묘호와 시호를 내리면서 그 덕분에 종묘사직이 안정되고 의리와 윤리가 다시 밝아졌다고 현창했다. 반면 사도세자와 관련된 정조의 행보는 크게 달랐다. 정조는 즉위하자마자 스스로 사도세자의 아들임을 천명하고 이후 생부를 적극적으로 추숭해 나갔다. 세손 시절에 영조에게 간청해 임오화변(壬午禍變) 관련 기록을 세초했다면, 왕위에 오른 뒤에는 영조의 뜻을 거슬러 ‘장헌(莊獻)’이라는 시호를 올리고 묘묘(墓廟)를 영우원(永祐園)과 경모궁(景慕宮)으로 승격했다. 또 전례 없이 세자의 태실가봉(胎室加封)을 행하고 자손록을 별도로 만들었으며, 생부의 자질을 높이기 위해 행장 찬술과 문집 간행 과정에서 광범위한 교정을 가했다. □ 사도세자의 파란만장한 일생을 아버지와 아들의 시각에서 바라본 책 영조 즉위 300주년을 기념해 발간한 이번 도록은 크게 5부로 구성된다. 제
해위 윤보선(尹潽善, 1897~1990)은 대한민국 제4대 대통령으로, 1962년 대통령직을 내려놓고 난 뒤에도 한국 현대사의 각 시기마다 일정한 역할을 해온 인물이다. 이 책은 그가 정당 정치를 떠나 재야에서 민주화운동을 했던 1970년대를 중심으로, 그의 활동과 사상, 나아가 당대 한국 정치를 살폈다. 먼저 ‘제1부 1970년대 민주화운동과 유신체제’에서는 유신 반대 민주화운동에 대한 재평가를 중심으로, 윤보선의 인권의식과 국가관, 당시 민주화운동에서 배우자 공덕귀 여사의 역할, 유신헌법 반대의 정치사적 의미, 유신시대 정당과 선거의 현재적 의미, 한미관계와 유신체제 붕괴 등을 다루었다. ‘제2부 민청학련 항쟁 재조명’에서는 1974년 일어난 민청학련(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사건을 집중조명하면서 그 전개 과정과 역사적 의의, 재야 민주화운동세력의 형성 과정,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기독교계의 역할을 다루었다. 마지막 부록에서는 1970년대 민주화운동 전개가 유신체제 붕괴로 이어지던 당시의 상황을 회고 형식으로 정리했다. 1970년대는 한국 현대사에서 중요한 전환기였다. 대외적으로는, 미국이 한국전쟁 당시 적국이었던 중국과 데탕트(détente; 긴장 완화)를 추구하면서 안보 환경이 급변했다. 박정희 정권은
조선은 주자학의 나라, 양반의 세상이었다. 주자학으로 무장한 양반들은 법과 제도 다양한 윤리 규범을 통해 자기들 외부를 통제하려 했고 그 통제의 수위가 높을수록 유교적 이상 사회에 근접하는 것이라 믿었다. 양반과 평민, 노비와 상전, 유교와 불교, 남자와 여자, 적자와 서자, 정통과 이단, 호론과 낙론, 동양과 서양, 중화와 야만 등 무수한 관계의 불평등을 배태한 조선 유학은, 역으로 이들을 하나로 아우를 상생과 화합의 가치를 모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책은 우리 역사에서 가장 차별이 가장 심했던 조선이라는 상극의 무대에 선 조선 유학자의 타자 인식, 대립과 갈등의 관계, 논쟁과 교유의 양상을 들여다본다. 역사학·철학·문학·종교학·사회학·지리학·복식학 등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들이 각자의 영역에서 탐색한 조선시대 관계의 문화사는 유불 간 사제관계, 충노와 충비의 신화와 그 배경, 시인이 된 노비, 노장학에 몰두한 유학자, 가족과 마을 공동체의 소통 원리 등 차이와 금기를 극복하고 공존과 협력의 가능성을 보여준 우리 역사 이야기다.
□ 한반도 분할의 서막을 연 신탁통치 찬반 논쟁과 좌우대립 해방 후 한반도 거취는 미국과 소련의 이권 쟁탈을 위한 정치적 전략 구상 아래 놓였다. 국내 정치세력은 그러한 외세에 대응하기보다는 도리어 영합했고 갈수록 양극화되었다. 특히 미국과 소련의 한반도 신탁통치 실시에 대한 찬반 논쟁은 국내 정치세력의 이데올로기 대립이 본격화하는 계기였다. 이전까지 한반도는 역사적으로 여러 우여곡절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정치세력의 연대와 제휴를 통해 하나의 한반도를 유지해왔다. 그러나 신탁통치를 둘러싼 민족 내부의 논란과 좌우대립은 미국과 소련의 냉전체제가 형성되던 국제정치 상황과 맞물려 고착되었다. 결국 1948년 남북 각각의 단독정부가 세워지고 분단이 되기에 이르렀다. □ 1948년 분단에서 통일을 길어 올리다 한반도 분단 연구는 한국인의 미래 과제인 통일을 달성하기 위해 필수적이다. 분단 과정을 살필 때 해방 직후 8년의 정치사에서 좌익과 우익의 이데올로기 대립 과정을 규명할 필요가 있다. 당시 한반도의 내부적 통일, 한국인의 연대를 위해서는 미국과 소련이 결정한 신탁통치 실시에 대한 의견 통일을 이루는 것이 첫째였다. 그러나 국내 정치세력은 자신들의 정치적 신념과 목적에 따라 흩어져 대립했으며, 균형 잡힌 제3의 통합논리는 설 자리를 잃었다. 신
□ ‘미국은 전두환 권력을 지지하지 않았다’는 근거 1980년 전후 대한민국의 정치적 격변기에 미국은 한국의 민주주의에 대해 모호한 태도를 보였다. 12·12 사건이 발생했을 때는 이를 쿠데타로 여겨 비난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입장을 바꿔 신군부의 실세 전두환을 승인했으며, 5·18 광주민주항쟁 때는 군부의 무력 진압을 묵인해 전두환 정부를 비호하는 듯한 인상을 준 것이다. 지금까지의 통설은 민주주의보다 안보를 우선시한 미국이 비교적 일관되게 전두환 정권을 지지했다는 것이다. 반면 저자는 미국이 수차례 전두환 제거 구상을 도모했다는 사실을 발굴하여 제시하고, 이를 근거로 미국이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전두환 정권에 대해 결코 호의적이지 않았음을 주장한다. 미국의 전두환 제거 구상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는 것은 한국의 정치 전환기에 미친 미국의 영향력을 규명하고 한국에 반미주의가 등장한 상황을 비판적으로 이해하는 차원에서도 의미가 크다. □ 30년이 지나서야 발굴 확인된 미국의 전두환 제거 구상 한국 현대사에서 미국이 입안했던 최고 지도자 제거 공작들은 대부분 도상작전에 그쳤으며, 실제로 실행된 경우는 대부분 철저히 베일에 가려져 있다. 1979년 10·26의 경우도 미국이 수행한 역할의 증거가 남아 있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