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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미국은 전두환 권력을 지지하지 않았다’는 근거 1980년 전후 대한민국의 정치적 격변기에 미국은 한국의 민주주의에 대해 모호한 태도를 보였다. 12·12 사건이 발생했을 때는 이를 쿠데타로 여겨 비난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입장을 바꿔 신군부의 실세 전두환을 승인했으며, 5·18 광주민주항쟁 때는 군부의 무력 진압을 묵인해 전두환 정부를 비호하는 듯한 인상을 준 것이다. 지금까지의 통설은 민주주의보다 안보를 우선시한 미국이 비교적 일관되게 전두환 정권을 지지했다는 것이다. 반면 저자는 미국이 수차례 전두환 제거 구상을 도모했다는 사실을 발굴하여 제시하고, 이를 근거로 미국이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전두환 정권에 대해 결코 호의적이지 않았음을 주장한다. 미국의 전두환 제거 구상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는 것은 한국의 정치 전환기에 미친 미국의 영향력을 규명하고 한국에 반미주의가 등장한 상황을 비판적으로 이해하는 차원에서도 의미가 크다. □ 30년이 지나서야 발굴 확인된 미국의 전두환 제거 구상 한국 현대사에서 미국이 입안했던 최고 지도자 제거 공작들은 대부분 도상작전에 그쳤으며, 실제로 실행된 경우는 대부분 철저히 베일에 가려져 있다. 1979년 10·26의 경우도 미국이 수행한 역할의 증거가 남아 있지 않다

  • 경상남도의 창녕과 경상북도의 고령에는 각각 유서 깊은 보부상 단체의 문헌이 현존한다. 이 책은 근대 이행기 대표 상인 조직인 보부상을 입체적으로 조명하기 위해 『보부상자료집(人)』과 창녕박물관, 대가야박물관에 소장된 관련 기록을 총망라하여 탈초·정서·번역하고 상세한 해설을 덧붙였다. 기존 영인본 자료의 한계를 넘어 현존 문헌 및 관련 유물을 포괄함으로써 텍스트만 제시한다거나 발췌 번역하는 기존 연구 방식 대신 원문 전체의 정서, 특이점 확인, 역주를 포함한 번역, 개별 자료에 대한 해설 등을 추가해 차별화를 꾀했다. 지역별 보부상 조직의 차이점을 실증적으로 규명하여 조선 후기 상업사 연구에 새로운 시각을 제공했다.  기출간한 『장돌뱅이의 조직과 기록: 예산·덕산·면천·당진 편』(2015), 『장돌뱅이의 조직과 기록: 저산팔읍 상무우사 편』(2019), 『장돌뱅이의 조직과 기록: 저산팔읍 상무좌사 편』(2021), 『장돌뱅이의 조직과 기록: 홍주·결성·보령·청양·대흥·오천 편』(2023) 등 충청남도 지역의 보부상 자료와 비교할 수 있는 기초가 마련되었다.

  • □ 사도세자, 비극적인 죽음에서 복권까지 사도세자는 아버지 영조의 지나친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고 갈등을 겪다가 1762년 임오년에 결국 뒤주에 갇혀 생을 마감했다. 영조는 사도세자의 장례 절차를 간소화하고, 제문과 묘지문에 세자의 잘못과 그에 따른 처분의 정당성을 세세하게 적었다. 그리고 아들의 처분을 요구했던 사도세자의 생모 영빈이씨에게는 ‘의열(義烈)’이라는 묘호와 시호를 내리면서 그 덕분에 종묘사직이 안정되고 의리와 윤리가 다시 밝아졌다고 현창했다. 반면 사도세자와 관련된 정조의 행보는 크게 달랐다. 정조는 즉위하자마자 스스로 사도세자의 아들임을 천명하고 이후 생부를 적극적으로 추숭해 나갔다. 세손 시절에 영조에게 간청해 임오화변(壬午禍變) 관련 기록을 세초했다면, 왕위에 오른 뒤에는 영조의 뜻을 거슬러 ‘장헌(莊獻)’이라는 시호를 올리고 묘묘(墓廟)를 영우원(永祐園)과 경모궁(景慕宮)으로 승격했다. 또 전례 없이 세자의 태실가봉(胎室加封)을 행하고 자손록을 별도로 만들었으며, 생부의 자질을 높이기 위해 행장 찬술과 문집 간행 과정에서 광범위한 교정을 가했다.   □ 사도세자의 파란만장한 일생을 아버지와 아들의 시각에서 바라본 책 영조 즉위 300주년을 기념해 발간한 이번 도록은 크게 5부로 구성된다. 제

  • □ 한반도 분할의 서막을 연 신탁통치 찬반 논쟁과 좌우대립 해방 후 한반도 거취는 미국과 소련의 이권 쟁탈을 위한 정치적 전략 구상 아래 놓였다. 국내 정치세력은 그러한 외세에 대응하기보다는 도리어 영합했고 갈수록 양극화되었다. 특히 미국과 소련의 한반도 신탁통치 실시에 대한 찬반 논쟁은 국내 정치세력의 이데올로기 대립이 본격화하는 계기였다. 이전까지 한반도는 역사적으로 여러 우여곡절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정치세력의 연대와 제휴를 통해 하나의 한반도를 유지해왔다. 그러나 신탁통치를 둘러싼 민족 내부의 논란과 좌우대립은 미국과 소련의 냉전체제가 형성되던 국제정치 상황과 맞물려 고착되었다. 결국 1948년 남북 각각의 단독정부가 세워지고 분단이 되기에 이르렀다.    □ 1948년 분단에서 통일을 길어 올리다 한반도 분단 연구는 한국인의 미래 과제인 통일을 달성하기 위해 필수적이다. 분단 과정을 살필 때 해방 직후 8년의 정치사에서 좌익과 우익의 이데올로기 대립 과정을 규명할 필요가 있다. 당시 한반도의 내부적 통일, 한국인의 연대를 위해서는 미국과 소련이 결정한 신탁통치 실시에 대한 의견 통일을 이루는 것이 첫째였다. 그러나 국내 정치세력은 자신들의 정치적 신념과 목적에 따라 흩어져 대립했으며, 균형 잡힌 제3의 통합논리는 설 자리를 잃었다. 신

    • 도서명 윤보선과 1970년대 한국정치
    • 저자 김정회·김명구·서희경·윤왕희·정일준·안병욱·황병주·손승호·김정남
    • 발행일 2024-08-30
    • 정가 20,000원

    해위 윤보선(尹潽善, 1897~1990)은 대한민국 제4대 대통령으로, 1962년 대통령직을 내려놓고 난 뒤에도 한국 현대사의 각 시기마다 일정한 역할을 해온 인물이다. 이 책은 그가 정당 정치를 떠나 재야에서 민주화운동을 했던 1970년대를 중심으로, 그의 활동과 사상, 나아가 당대 한국 정치를 살폈다. 먼저 ‘제1부 1970년대 민주화운동과 유신체제’에서는 유신 반대 민주화운동에 대한 재평가를 중심으로, 윤보선의 인권의식과 국가관, 당시 민주화운동에서 배우자 공덕귀 여사의 역할, 유신헌법 반대의 정치사적 의미, 유신시대 정당과 선거의 현재적 의미, 한미관계와 유신체제 붕괴 등을 다루었다. ‘제2부 민청학련 항쟁 재조명’에서는 1974년 일어난 민청학련(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사건을 집중조명하면서 그 전개 과정과 역사적 의의, 재야 민주화운동세력의 형성 과정,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기독교계의 역할을 다루었다. 마지막 부록에서는 1970년대 민주화운동 전개가 유신체제 붕괴로 이어지던 당시의 상황을 회고 형식으로 정리했다.  1970년대는 한국 현대사에서 중요한 전환기였다. 대외적으로는, 미국이 한국전쟁 당시 적국이었던 중국과 데탕트(détente; 긴장 완화)를 추구하면서 안보 환경이 급변했다. 박정희 정권은

    • 도서명 교유와 논쟁으로 본 관계의 문화사
    • 저자 김학수·조현범·정수환·안대회·신상후·한형조·김봉좌·한도현·정치영·신정수·이민주·이남옥
    • 발행일 2024-08-15
    • 정가 22,000원

    조선은 주자학의 나라, 양반의 세상이었다. 주자학으로 무장한 양반들은 법과 제도 다양한 윤리 규범을 통해 자기들 외부를 통제하려 했고 그 통제의 수위가 높을수록 유교적 이상 사회에 근접하는 것이라 믿었다. 양반과 평민, 노비와 상전, 유교와 불교, 남자와 여자, 적자와 서자, 정통과 이단, 호론과 낙론, 동양과 서양, 중화와 야만 등 무수한 관계의 불평등을 배태한 조선 유학은, 역으로 이들을 하나로 아우를 상생과 화합의 가치를 모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책은 우리 역사에서 가장 차별이 가장 심했던 조선이라는 상극의 무대에 선 조선 유학자의 타자 인식, 대립과 갈등의 관계, 논쟁과 교유의 양상을 들여다본다. 역사학·철학·문학·종교학·사회학·지리학·복식학 등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들이 각자의 영역에서 탐색한 조선시대 관계의 문화사는 유불 간 사제관계, 충노와 충비의 신화와 그 배경, 시인이 된 노비, 노장학에 몰두한 유학자, 가족과 마을 공동체의 소통 원리 등 차이와 금기를 극복하고 공존과 협력의 가능성을 보여준 우리 역사 이야기다.   

    • 도서명 진주 마진마을과 재령이씨가 고문서
    • 저자 허원영·이민재·라연재·이혜정·신이나·함영대·김승룡·이미진·김건태·정수환·김동일·송양섭·심재우·도주경
    • 발행일 2023-12-30
    • 정가 30,000원

    경상남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 진주 마호당 고문서는 재령이씨 가문이 마진마을을 경영한 모습을 보여주는 방대한 양의 자료이다. 현재 마호당에는 약 1만 2,000점에 달하는 고문서가 전해지며,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서는 2016년부터 이 자료를 조사·수집·선별해 탈초와 해제 작업을 거치고 3년간 공동 연구를 수행했다. 이를 바탕으로 완성된 이 책은 재령이씨 가문의 마진마을 운영 모습을 생생하게 잘 보여준다. 재령이씨 가문과 마진마을의 오랜 인연은 지금으로부터 400여 년 전, 도산공(道山公) 이강(李堈)이 들어와 살면서 시작되었다. 이강의 다섯째 아들 이중인(李重䄄)을 중심으로 재령이씨 소종택이 형성되었고, 마진 재령이씨라고 불리는 이 집안은 후일 마호당(馬湖堂)이라는 사랑채를 짓고 향촌사족으로서 마진마을을 지켜나갔다. 총 4부로 구성된 이 책은 먼저, 마진마을과 마호당 전적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지역 현황과 장서의 특징 등을 개론적으로 소개한다. 2부에서는 마진 재령이씨 인물들의 학술과 문학을 살펴보고, 3부에서는 농업 경영과 노비 경영을 비롯한 마호당의 지주 경영을 본격적으로 다루었다. 마지막 4부에서는 군역 운영, 동림 갈등, 노비계 조직 등 여러 이해관계가 얽히고설켜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마진마을 운영의 실태를 소개했다. 이 책

    • 도서명 조선시대 제주와 제주문화
    • 저자 김학수·이남옥·이창일·김소희·정치영·정은주·박용만·정수환·이욱·김호·강문종·이민주·한도현
    • 발행일 2023-12-30
    • 정가 28,000원

    조선시대 제주는 한반도 내륙과 떨어진 독특한 지리적 환경으로 인해 문화적으로도 뚜렷한 차별성을 드러냈다. 따라서 중앙에서는 제주를 국가체제 안으로 동화하고자 끊임없이 노력했다. 조정에서는 지방관을 파견해 행정적 통치 아래에 두는 동시에 유배 간 지식인들은 주자학적 가르침을 전파하면서 문화적 동화를 시도했다. 하지만 제주문화의 특수성은 뿌리 깊게 자리해 쉽게 근절되지 않았다. 18세기 초 제주목사로 부임한 이형상의 경우가 대표적 예이다. 그는 유교 이데올로기를 바탕으로 풍속 교화를 시도했지만, 무격들의 파행을 끝내 단절하지 못했다. 이처럼 조선시대 제주는 중앙과 팽팽한 긴장 관계를 유지하며 보편성과 특수성 사이에서 고유한 문화를 발전시켰다. 이 책은 이러한 제주문화의 특수성에 주목하여 지식문화, 지리공간, 경제환경, 생활문화라는 네 가지 관점에서 조선시대 제주문화를 재검토한다. 역사학·지리학·미술사학·민속학·사회학 등 다양한 학문 분야를 종합하여 조선시대 제주문화가 육지와의 교류와 갈등 속에서 어떻게 형성되고 변화했는지 심층적으로 조명한다.

  • □ 위정척사, 19세기 유림 지식인의 의식과 변화 『위정척사』는 한국 사상가의 발자취와 철학적 개념을 탐구하여 우리 안에 잠재한 사유와 문화의 근원을 이해하기 위해 기획·발간한 ‘사유의 한국사’ 시리즈 중 한 책이다. ‘위정(衛正)’과 ‘척사(斥邪)’는 조선의 유교 문화와 가치를 서양 세력으로부터 수호하기 위한 대응 전반을 가리키는 개념이다. 18~19세기 한국 사회의 주요 사상적 조류였으며, 성리학을 기반으로 한 한국 정신문화의 중요한 자산으로 평가한다. 지금까지 위정척사 연구는 주로 개인이나 학파 중심으로 지엽적으로 진행되었고, 전체적인 시각에서 조망하는 연구는 부족했다. 이 책은 이러한 한계를 넘어서서 위정척사에 대한 종합적인 검토를 시도한다. 다양한 학파와 인물의 동향을 분석하고 시대 상황에 따라 유림의 인식이 어떻게 변화했는지 따라가면서 위정척사의 전체상을 그려낸다.    □ 위정척사의 변화 과정  이 책은 천주교 수용 이후 일제 강제 합병 이전까지의 시기를 5단계로 구분하여 위정척사의 변화 과정을 살펴본다. 1단계인 18세기와 19세기 중반은 천주교의 사회적 영향력 증가에 따라 척사론이 등장한다. 2단계 병인양요 이후 신사척화운동기까지는 서양 세력에 따른

  • 연행록에 담긴 문물과 사상의 국제 교류 현장 전근대 동아시아에서 중국과 주변국의 외교 관계는 화이(華夷) 질서에 입각한 조공 체제를 따랐다. 조공의 절차는 대개 사신 일행이 황제가 있는 중국 수도에 가서 외교 문서와 조공품을 바치고, 황제가 주관하는 주요 행사에 참여하여, 답장과 답례품을 받아서 귀국하는 것이었다. 조선 후기 정기적인 사행은 동지를 전후하여 파견하는 동지사였으며, 이 밖에 외교적인 중대 사안이 발생했을 때 사신단을 파견했다. 연행 사절의 규모는 적게는 250여 명부터 많게는 500여 명에 이르렀다. 대규모 인원이 매년 4~6개월에 걸쳐 한양에서 북경에 이르는 먼 길을 왕복했는데, 18세기의 연행 노정은 1780년에 박지원, 1790년에 서호수 일행이 열하로 간 경우를 제외하면 모두 북경이 목적지였고 경로도 동일했다.  연행사는 압록강을 건너 봉황성 책문에서 입국 절차를 거치고 심양과 산해관을 지나 북경에 이르는 동안 연로 곳곳에서 중국 문사를 만났다. 매년 같은 노정을 반복하여 왕래함에 따라 해당 지역에 대한 정보가 축적되었고, 그 지역을 지날 때면 그곳을 대표하는 중국 문사를 만나 교유했다. 연행의 주역이라 할 수 있는 삼사(三使)와 자제군관(子弟軍官)은 당대의 대표적인 문사이며 대부분 연행록의 저자이기도 했다. 이들이 중국 문사와 나눈 필담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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