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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러시아 한인의 다양한 이주 양상을 분석해 정체성 문제 심층 탐구 이 책은 귀화라는 관점에서 20세기 초 러시아 한인들의 정착 과정과 삶을 조명한다. 기존 연구가 주로 독립운동사나 민족주의적 서술에 초점을 맞췄다면, 러시아로 이주한 한인을 단순한 디아스포라(diaspora)를 넘어 초국적(transnational) 행위자로서 주목한다. 저자는 러시아 이주 한인이 생존을 위해 어떤 선택을 했으며, 국가권력과 어떻게 상호작용했는지를 실증적으로 분석한다. 이를 통해 그들이 고국과 거주국 사이에서 정체성을 형성하고, 생존과 정치적 입장을 조율한 과정을 보다 생동감 있게 설명하고자 한다. 다양한 사료를 활용하여 한인의 일상생활과 법적 지위, 노동 및 정치활동 등을 입체적으로 조망했다는 점도 돋보인다.   □ 역사적 맥락과 개인의 삶을 연결하여 해석한 러시아 한인 이주사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화하는 과정에서 많은 한인이 생계를 유지하거나 정치적 탄압을 피해 러시아로 이주했다. 그러나 러시아에서 삶도 녹록지 않았다. 러시아 당국은 거주와 취업을 규제하면서 한인 정착을 어렵게 만들었으며, 이 과정에서 한인은 불법 거주자로 몰리기도 했다. 저자는 러시아 당국의 단속 아래서 입국과 거주 허가증 발급을 거쳐 한인이 어떻게 대응했는지를 상세하게 서술한다. 특히 귀화 문제를 중심으로

  • 『호락논쟁』은 한국 사상가와 철학적 개념을 탐구하여 우리 안에 잠재한 사유와 문화의 근원을 이해하기 위해 기획·발간한 ‘사유의 한국사’ 시리즈 중 한 권이다. 호락논쟁(湖洛論爭)은 18세기에서 19세기에 걸쳐 조선 성리학에서 벌어진 중요한 학술 논쟁으로, 본연지성(本然之性), 미발(未發), 지각(知覺), 명덕(明德) 등 주자학의 주요 개념과 관련된 심성(心性)과 본성(本性), 기질(氣質) 등에 대한 이해를 둘러싸고 전개되었다. 충청도 지역의 호학(湖學)은 인간과 사물의 본성이 다르다는 입장을 취한 반면 서울 지역의 낙학(洛學)은 인간과 사물의 본성이 근본적으로 같다고 보았다. 호학은 권상하를 중심으로, 낙학은 김창협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가 이후 이간과 한원진을 포함한 후학들 사이에서 논쟁이 더욱 깊어졌다. 호락논쟁은 조선 후기 성리학의 두 주류 학파 간의 학문적 차이와 정치적 배경을 드러내며, 당시 성리학의 발전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 또한 조선 철학사에서 성리학의 발전 양상을 연구하는 데 필수적인 논쟁이다. 이 논쟁은 성리학 내부에서 이성과 기질의 관계, 인간과 사물의 본성 문제 등을 정밀하게 분석하며, 이후 한국 유학의 발전 방향에 큰 영향을 미쳤다. 호락논쟁은 정치적 당파성과 결부되면서 조선 사회의 철학적 논의가 학문적 논쟁

  • 동래정씨는 조선 초기부터 구한말까지 고관대작을 꾸준히 배출한 명문가이다. 정승 자리에 오른 동래정씨 인물은 총 17명에 달하는데, 이는 전주이씨 22명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수이다. 동래정씨 가문은 조선 전기 훈구파의 중진으로 활동한 명신이자, 서예에서도 업적을 남긴 동래부원군 정난종(鄭蘭宗, 1433~1489)을 파조로 하는 익혜공파(翼惠公派)의 종가이다. 정난종은 경기도 군포시 속달동의 수리산 기슭과 그 일대를 왕으로부터 사패지(賜牌地)로 받았고, 그의 장자 정광보(鄭光輔, 1457~1524)가 이곳에 거처를 마련한 이래로 후손의 묘역과 종택이 오늘날까지 이어졌다. 정난종 종가가 500년 동안 사패지를 대대로 지켜올 수 있었던 것은 조선 사회가 추구하는 정체성과 가치를 충실히 실천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 정난종 종가는 동래정씨 문중을 대표하며 속달을 경영했고, 일제강점기 이후에는 지역 유지이자 마을의 대표 가문으로서 지도적 역할을 해왔다. 현재도 종택과 구성원들은 마을과 사회를 위한 다양한 활동을 지속하고 있다. 정난종 종가는 2012년에 문화유산국민신탁과 국민신탁 계약을 체결하여 종택과 묘역, 전답 등 70억 원 상당의 부동산을 기증하여, 토지의 혜택을 시민과 공유하는 뜻깊은 선택을 했다. 또한 2015년과 2017년에는 두 차례에 걸쳐 가전유물과 전적

  • 정제두는 주자학이 주류를 이룬 조선 후기에 양명학을 연구한 인물로 자주 언급된다. 그러나 정제두의 학문은 양명학만으로 논하기에는 복잡하게 이루어져 있다. 정확하게는 그는 명도학을 바탕으로 주자학과 양명학을 아울러 자신만의 학문체계를 완성했다. 여러 사상을 포괄하고 있는 정제두의 학문은 그의 문인들로 이어지며 다양한 방식으로 전개된다. 특정 가계를 중심으로 강화, 광주, 진천으로 뻗어나갔고, 주자학・양명학・명도학의 폭넓은 기반 위에 각자의 방식으로 정제두의 학문을 이해하고 계승・변용해나갔다. 이 책은 정제두와 그를 따르는 일군의 학자들을 다른 용어로 칭한다. 저자는 정제두의 호 ‘하곡’을 따라 이들을 ‘하곡학파’로 재정의하고, 18세기부터 20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시대적 요구에 맞게 하곡학파가 어떻게 모습을 달리하며 전개되었는지를 추적한다. 이를 통해 주자학만이 정통으로 인정되던 조선 후기에 다양성과 포용성, 시대 변화에 대한 유연성을 갖추고 끊임없이 변화해나갔던 하곡학파의 의미를 새롭게 재조명한다.  

    • 도서명 책으로 본 영조와 그의 시대
    • 저자 김덕수·권기석·김영진·이근호·이현진·최주희·임성수·김우진·박진성·이재준
    • 발행일 2024-12-30
    • 정가 25,000원

    조선 숙종 연간부터 영조 즉위 초반까지는 환국과 당쟁이 끊이지 않은 시기였다. 특히 경종 즉위 직후의 정국은 그 어느 때보다도 급박하고 혼란스러웠다. 1721년 노론은 연잉군(훗날 영조)의 왕세제 책봉과 대리청정을 강하게 추진했지만, 소론의 반격으로 계획이 무산되면서 정계에서 축출되는 신축옥사가 일어났다. 이후 소론이 정국을 주도하던 1722년에, 목호룡이 노론 일파가 경종을 시해하려 했다고 고변하는 임인옥사가 발생했다. 이 사건으로 노론사대신을 비롯한 다수의 인사와 그 가족들이 참혹한 최후를 맞았다. 이처럼 예측할 수 없는 혼란 속에서 왕세제가 된 영조는 수많은 어려움을 겪은 끝에 왕위에 올랐다. 즉위 후 영조는 특유의 치밀함과 추진력을 바탕으로, 숙종과 경종 시대를 거치며 심화된 당파 간 균열과 갈등을 상당 부분 해소했다. 강력한 왕권을 기반으로 국가 재정과 민생 안정을 위한 다양한 정책도 펼쳤다. 노년기에는 탕평책, 균역법 시행, 청계천 준설을 자신의 대표적인 업적으로 손꼽기도 했다. 또한, 여종의 공역 폐지, 서얼의 허통 및 적통 승계 정책 등은 사회적 약자를 향한 따뜻한 배려를 보여주며 애민 군주의 전형을 보여주었다. 이 책은 이러한 영조 시대를 책이라는 주제를 통해 그의 치세 52년의 흐름을 조망해 보려는 시도다. 한 시대를 살펴보는 방법은 다양하다. 대표적인

    • 도서명 종묘와 종묘제례
    • 저자 이욱·한형주·신진혜·구혜인·이정희·강문식·이수정
    • 발행일 2024-12-30
    • 정가 22,000원

    □ 종묘의 역사적 위상과 그 실체 종묘는 사직과 더불어 조선왕조의 대표적인 상징 공간이다. 이곳에 모신 역대 왕과 왕비의 신주는 왕위 전승의 계보를 드러내고, 그들의 공덕을 기리며 때마다 열린 성대한 의례는 왕권의 지엄함을 시각화했다. 조선 팔도에서 나는 각종 음식과 희생을 올리고 음악, 무용 등을 대동한 의식은 실로 웅장했다. 종묘는 그 위상에 걸맞게 역사, 종교, 미술, 음악 등 다양한 분야에서 십수 년간 중요한 연구 대상이었다. 그 결과, 의례집에 따라 이곳에서 치러진 국가의례의 형식과 절차가 정리되고, 여기서 드러나는 유교적 상징성이 밝혀졌다. 그에 반해 실제로 국가의례를 수행하는 인적・물적 기반은 아직까지도 충분한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있다. 종묘의 일상적이고 주변적인 것들도 조명받지 못함은 마찬가지다.   □ 종묘와 종묘제례, 새로운 연구의 시작 이 책은 앞서 말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여 종묘와 종묘제례를 크게 세 가지 시각에서 새롭게 바라보고자 했다. 첫째, 형식과 절차를 넘어 종묘와 종묘제례의 구체적인 실재를 파악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종묘를 관리하고 의례를 수행했던 종묘서 관원들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본격적으로 탐구하고, 악장 등  의례의 실제 운영 과정에서 있었던 우여곡절과 그에 따른 노력이 드러날 수 있게 했다. 둘째, 그동안 소홀하

  • 기원전 100년경 진·변한지역은 군집목관묘와 철기로 대표되는 철기사회로 전환된다. 그로부터 기원후 170년까지에 해당하는 목관묘기에는 한동안 무문토기, 괴정동유형기의 청동기, 통나무관묘 등 기존의 유구와 유물이 지속되다가, 와질토기가 출현하고 철기와 한식문물이 다량 부장되는 등 점차 새로운 변화를 겪는다. 경상북도 경산시 양지리 1호묘는 전기 목관묘기 최고 수장층의 무덤이 생생하게 조사된 사례이다. 관 내부에 격벽이 설치된 독특한 구조의 대형 통나무관이 발견되었고, 와질토기, 청동기, 철기, 칠기 등 106종의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다. 부장 유물에서는 성숙한 철기사회이면서도 청동기의 위세가 정점에 이른 분위기가 감지된다. 이 책은 2017년에 조사되어 최근 학계에서 획기적인 무덤 구조와 부장 유물로 크게 주목받은 양지리 1호묘의 본격적인 연구이다. 유구, 청동기, 한경과 한식문물, 철기를 중심으로 양지리 1호묘를 통해 진·변한 내외 무덤문화의 공유와 변용, 기술혁신과 확산, 생산과 유통 등의 문제를 살펴보고자 한다.

    • 도서명 이색(李穡)
    • 저자 도현철
    • 발행일 2024-10-30
    • 정가 25,000원

    □ 조선 유학 시대의 토대를 마련한 사상사, 이색 『이색』은 한국 사상가와 철학적 개념을 탐구하여 우리 안에 잠재한 사유와 문화의 근원을 이해하기 위해 기획·발간한 ‘사유의 한국사’ 시리즈 중 한 권이다. 조선 유학 시대의 연원을 마련한 인물로 평가받는 목은 이색(李穡, 1328 ~1396)의 정치사상을 살펴보고, 그 사상이 한국 중세 사상사 및 한국 사상사에서 차지하는 역사적 의미를 탐색한다. 이색은 유교·불교·도교의 전통적 사상 기반 위에 성리학을 수용하여 당대 사상과 학술을 주도하고, 왕조 유지의 관점에서 정치활동을 전개했다. 그의 제자들은 이색이 제시한 유학사상을 바탕으로 조선시대 사상과 학문을 주도하며 유교 사회를 전개했기에, 이색 사상 연구는 고려 말 성리학 수용기 사상의 성격, 조선 건국의 사상적 배경, 그리고 조선 유학 시대의 이해를 위한 중요한 단초를 제공한다.   □ 한국 사상사에서 정치사상가 이색의 의미 사상의 역사적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상가가 살았던 시대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특히 독자적인 사상을 정립하고 사회 활동을 펼친 이색의 사상은 시대적 맥락 속에서 비로소 올바르게 평가할 수 있다. 이색이 활동했던 14세기는 국내외적으로 사회 변화와 위기가 빈번했던 시기였다.

  • 오늘날 한국 사회는 청년 실업, 경기 하락, 양극화, 공동체의 와해 등 심각한 문제들을 마주하고 있다. 사회적 안전망과 신뢰와 연대의 관계망이 무너진 이 위기를 어떻게 이겨낼 수 있을까? 이 책은 1997년 IMF 금융위기 이래 신자유주의적 경제 질서로 급속히 편입되며 노출된 한국 사회의 문제들을 진단하고 호혜와 협동으로 그 해법을 제시한다.   호혜와 협동은 어떻게 이론과 제도로 정립되어 왔을까 이 책은 한국 사회에서 호혜와 협동을 어떻게 증진할 수 있을지 큰 틀에서 고민하며 시작된다. 구체적인 사례를 살펴보기에 앞서 이론과 제도를 점검하는 ‘제1부 호혜와 협동의 이론과 제도’에서는 먼저 호혜와 협동이 거버넌스와 맺는 복잡한 관계를 재설정한다. 그리고 볼로냐와 스페인 바스크의 선진 사례를 통해 거버넌스 구조가 호혜와 협동의 문화를 어떻게 강화하는지 살펴본다. 또한 호혜와 협동의 사회적 가치가 한국에서 어떻게 제도적으로 자리 잡아 왔는지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사회적경제의 정착 경로를 담론 확장과 국가 정책의 법제화 차원에서 집중적으로 검토한다.   현대 한국의 미래 지향적인 실천 사례들 ‘제2부 현대 한국의 실천 사례들’과 ‘제3부 공동자원의 새 모색’에서는 오늘날 한국에서 호혜와

  • □ ‘미국은 전두환 권력을 지지하지 않았다’는 근거 1980년 전후 대한민국의 정치적 격변기에 미국은 한국의 민주주의에 대해 모호한 태도를 보였다. 12·12 사건이 발생했을 때는 이를 쿠데타로 여겨 비난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입장을 바꿔 신군부의 실세 전두환을 승인했으며, 5·18 광주민주항쟁 때는 군부의 무력 진압을 묵인해 전두환 정부를 비호하는 듯한 인상을 준 것이다. 지금까지의 통설은 민주주의보다 안보를 우선시한 미국이 비교적 일관되게 전두환 정권을 지지했다는 것이다. 반면 저자는 미국이 수차례 전두환 제거 구상을 도모했다는 사실을 발굴하여 제시하고, 이를 근거로 미국이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전두환 정권에 대해 결코 호의적이지 않았음을 주장한다. 미국의 전두환 제거 구상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는 것은 한국의 정치 전환기에 미친 미국의 영향력을 규명하고 한국에 반미주의가 등장한 상황을 비판적으로 이해하는 차원에서도 의미가 크다. □ 30년이 지나서야 발굴 확인된 미국의 전두환 제거 구상 한국 현대사에서 미국이 입안했던 최고 지도자 제거 공작들은 대부분 도상작전에 그쳤으며, 실제로 실행된 경우는 대부분 철저히 베일에 가려져 있다. 1979년 10·26의 경우도 미국이 수행한 역할의 증거가 남아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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