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러시아 한인의 다양한 이주 양상을 분석해 정체성 문제 심층 탐구
이 책은 귀화라는 관점에서 20세기 초 러시아 한인들의 정착 과정과 삶을 조명한다. 기존 연구가 주로 독립운동사나 민족주의적 서술에 초점을 맞췄다면, 러시아로 이주한 한인을 단순한 디아스포라(diaspora)를 넘어 초국적(transnational) 행위자로서 주목한다. 저자는 러시아 이주 한인이 생존을 위해 어떤 선택을 했으며, 국가권력과 어떻게 상호작용했는지를 실증적으로 분석한다. 이를 통해 그들이 고국과 거주국 사이에서 정체성을 형성하고, 생존과 정치적 입장을 조율한 과정을 보다 생동감 있게 설명하고자 한다. 다양한 사료를 활용하여 한인의 일상생활과 법적 지위, 노동 및 정치활동 등을 입체적으로 조망했다는 점도 돋보인다.
□ 역사적 맥락과 개인의 삶을 연결하여 해석한 러시아 한인 이주사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화하는 과정에서 많은 한인이 생계를 유지하거나 정치적 탄압을 피해 러시아로 이주했다. 그러나 러시아에서 삶도 녹록지 않았다. 러시아 당국은 거주와 취업을 규제하면서 한인 정착을 어렵게 만들었으며, 이 과정에서 한인은 불법 거주자로 몰리기도 했다. 저자는 러시아 당국의 단속 아래서 입국과 거주 허가증 발급을 거쳐 한인이 어떻게 대응했는지를 상세하게 서술한다. 특히 귀화 문제를 중심으로 이들의 사회적 지위와 정치적 활동을 분석하는데, 일부 한인은 러시아 국적을 취득하여 안정적인 삶을 살고자 했으나 귀화 이후에도 차별을 경험하거나 고국의 독립운동에 가담하는 경우도 많았다. 이러한 한인의 다양한 삶의 양식을 ‘동화형’과 ‘양립형’으로 구분하며, 그들의 정치적·사회적 역할을 추적한다. 또한, 이 책에서는 러시아 내에서 한인 사회가 어떻게 형성되고 발전했는지도 이야기한다. 이들은 현지 사회와 공존하면서도 민족 정체성을 유지하려 했으며, 교육과 경제활동을 통해 독립적인 커뮤니티를 형성해갔다. 그러나 러시아 정부의 정책 변화에 따라 귀화한 한인도 다시 국적을 박탈당하는 등 불안정한 삶이 이어졌다. 그럼에도 한인들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생존의 문제를 넘어 자신만의 정체성을 재구성해 갔다. 이 책은 이러한 그들의 삶과 역사에 집중하는 동시에 귀화를 통해 ‘외국인’에서 ‘내국인’이 되었을 때 어떤 태도를 지니게 되는가 하는 질문의 답을 찾아간다.
경인일보 “강대국 틈 이주민들의 생존 전략… 신작 ‘귀화를 넘어서: 러시아로 간 한인 이야기’”
중부일보 “[새로 나온 책] '귀화를 넘어서: 러시아로 간 한인 이야기'”
송영화. 성균관대학교에서 한인의 러시아 이주 역사를 주제로 석사 및 박사 학위를 받았다. 주요 연구로 「1920년 ‘4월 참변’ 후 일본의 통제와 블라디보스토크 조선인거류민회」(2019)를 포함한 다수의 논문이 있으며, 『동북아 근대 공간의 형성과 그 영향』(2022)을 공동 번역했다. 현재는 에듀테크 분야에서 웹 개발자로 활동하며, 역사 연구와 교육에 디지털 기술을 접목하는 데 관심이 있다. 인류의 이주와 관계망을 시각화하는 웹 서비스인 ‘히스넷뷰(HisNetVu)’를 개발하고 운영하며 연구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프롤로그 | 한국을 떠난 한인들
1부. 한인, 러시아에 자리 잡다 (1905~1910)
1장. 까다로운 입국 과정 속 체류 전략
2장. 귀화·취업 단속에 대응하다
3장. 호의와 적의, 그 사이에 선 의병
2부. 한인, 러시아 국적을 얻다 (1910~1914)
4장. 러시아 국적 취득의 기회를 잡다
5장. 정치적 방패와 그 이면
6장. 도시 속 ‘내 집 마련’의 꿈
7장. 일과 땅을 찾아서
3부. 한인, 정치적 목소리를 내다 (1914~1917)
8장. 제2차 러일전쟁의 예감 속 정치세력의 재편
9장.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 간도로 간 망명자
10장. 러시아 전시체제에 참여하다
11장. 러시아혁명기, 두 가지 정치적 과제
에필로그 | 경계를 넘어: 양립하는 정체성
“귀화자의 경제적 상태 역시 궁핍해졌다. 이는 러시아 당국이 극동 러시아화 정책의 일환으로 귀화 한인에게 분배되는 토지의 규모를 줄인 사실과 관련이 있다. 1890년대에는 러시아 국적을 취득할 때 1인당 15데샤티나(약 49,550평)의 토지가 주어졌으나, 운테르베르게르 시기에는 그 규모가 5데샤티나로 감소하여 약 3분의 1로 줄어들었다. 그라베는 한인에게 국유지 임대를 금지하면 사유지에 소작인으로 유입될 것이라 분석했다. 황인종을 노동력으로 사용하고자 했던 러시아 민간 차원의 수요가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황인종 사용을 찬성하는 사람들의 주된 논리는 러시아인 노동자는 고임금에도 불구하고 “성질이 방종하고 음주벽이 있”는 반면, 황인종은 저임금으로도 근면하게 일을 한다는 것이었다.” - 본문 47쪽
“한인과 중국인의 갈등은 블라디보스토크 내 상권을 둘러싼 경쟁에서 비롯된 측면도 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쌀 상점을 운영하는 김정구라는 인물의 사례가 그러하다. 그는 한인의 상권이 “모두 저 중국인의 수장에 들어갔도다”라고 개탄하며, 믿을 수 있는 것은 “본촌(신한촌—인용자)에 거류하는 우리 동포뿐”이라 강조했다. 한인들은 신한촌에서 중국인을 배척하며 공간을 독점하고자 한 동시에, 개척리 철거 유예, 신한촌 내 건축 규정 완화, 부지 임대료면제 요청 등 다양한 방식을 통해 커뮤니티를 지켜내고자 했다." - 본문 141쪽
“그라베는 포시에트가 러시아보다 조선에 가깝다는 인상을 받았다. 포시에트에 거주하는 한인들은 대부분 조선식 생활방식을 유지했고, 러시아어를 잘 알지 못했다. 겉으로는 러시아 정교회를 믿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무속신앙을 믿고 있었다. 그라베는 한인들이 러시아 정교에 미지근한 태도를 보인 이유가, 지역의 러시아 정교회 사제들이 전도를 수입의 한 방편 정도로만 생각하고 조선어와 조선문화에 대해 무관심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포시에트의 한인들은 러시아 관료를 거치지 않고 비밀리에 재판을 열어 형을 집행하기도 했다. 그라베뿐만 아니라 페소츠키도 포시에트 지역에 러시아의 공권력이 깊숙이 침투하지 못해, 러시아인이 지역을 제대로 지배하지 못하는 실태를 지적했다.” - 본문 16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