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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학중앙연구원 개원 47주년을 기념하며
  이번 6월 30일은 연구원 개원 47주년이었다. 곧 반세기를 바라보는 연구원의 앞날을 응원하며, 연구원의 역사를 관련 자료와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개원
   1978년 6월 30일 개원식 당일에는 비가 내렸다(기상청 날씨누리 일별자료 참조). 주요 인사들이 연구원에 방문했을 무렵에는 잠시 그쳤다. ‘운중동’이라는 지명에 어울리게 연구원 주변 산자락에는 구름이 걸려 있었다. 이런 모습은 개원식 현장을 담은 1978년 7월 1일자 대한뉴스에서 확인할 수 있다.
   => e영상역사관 대한뉴스 제1191호, 1978. 7. 1.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개원식」 바로가기

[그림 1] 개원 당시의 연구원 전경 (출처:『韓國精神文化硏究院 10年史』(1988))

   영상에 보이는 연구원 본관, 강당, 식당, 국은관 등의 건물들은 47년의 시간이 무색하게 느껴질 정도로 지금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연구원의 개원을 소개하는 또 다른 기록 영상인 문화영화 「예지의 등불: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개원」에서는 연구원의 시설을 더욱 자세히 설명한다.
   => e영상역사관 문화영화, 1978, 「예지의 등불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개원」 바로가기
   영상을 보면 연구원에서 국제학술대회를 개최할 것에 대비해 동시통역시설을 갖추고 있는 데 대한 언급이 나온다. 영상의 나레이션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당당한 위용을 갖춘 800여평의 대강당은 300여명이 회합할 수 있는 대회의장이 있고 …… 6개국 동시통역시설까지 갖춤으로써 대규모의 국제적인 학술대회나 세미나 등도 개최할 수 있게 되어 있다.”

개원 1주년 기념 한국학 국제학술회의
   동시통역시설을 완비하고 있는 자신감 때문이었을까? 1979년 연말, 총 15개국 388명의 학자들이 참가한 제1회 한국학 국제학술회의가 5일 동안 개최되었다. 주제는 ‘산업사회와 정신문화’로 3부에 걸쳐 진행되었고 총 88편의 논문이 발표되었다.

[그림 4] 1979. 12. 17. 한국학 국제학술회의 참가자 단체사진 (출처:『한국학중앙연구원 30년사』(2008))
   당시 학술회의 참가자들에게 설문조사를 한 결과, 대체로 학술회의에 대한 만족도가 높았다. 일부 마이크, 동시통역, 번역의 개선 요구가 제기되기도 했다(편집부, 1980, 「第1回 韓國學 國際學術會議 結果報告 외」, 정신문화연구 3-1, 43쪽). 이날 학술회의 현장을 전하는 영상을 1979년 12월 20일자 대한뉴스에서 확인할 수 있다.
   => e영상역사관 대한뉴스 제1270호, 1979. 12. 20. 「한국학 국제 학술회의」 바로가기
한국학 자료 전산화의 선도

   연구원은 한국학 자료 전산화에도 일찍부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지금이야 자료의 데이터베이스화는 그 중요성을 강조할 필요도 없이 기본이 되었지만 예전에야 사정이 달랐다. 개인용 컴퓨터가 제작,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후반에서 80년대 초반이었고 본격적으로 개인용 컴퓨터 사용이 대중화된 것은 1990년대에 와서였다. 그러한 여건에서 연구원은 개원 초기부터 한국학 연구자료의 전산화 작업을 구체적으로 진행하기 시작했다. 그 출발점으로 1981년 8월 ‘한국학 연구자료의 전산화 국제회의’를 개최했다. 에드워드 와그너, 마르티나 도이힐러를 비롯한 국내외 한국학 연구자들이 모여 한국학 자료 전산화의 구체적인 방안을 모색했다. 이 국제회의의 자료는 이듬해 『한국학자료의 전산화연구』로 정리되어 출간되었다.
   => 『한국학자료의 전산화연구』(1982) 바로가기
   이후 연구원은 1979년에 출간한 『한국학연구인명록』을 1983년에 수정·증보하여 재출간하는데 전산작업을 이용하였다. 1983년에 출간한 『한국학연구인명록』은 국내 최초로 한국학자료 종합 전산화 계획에 의거, 컴퓨터로 작업한 첫 출판물이었다. 연구원은 전산작업의 결과물을 활용하여 당시의 한국학 연구 현황과 연구자 분포를 시대, 분야, 지역별 등으로 수치화해서 발표했다. 이는 한국학 연구의 현주소를 파악하는데 유용한 좌표가 되었다.

[그림 6] 『한국학연구인명록』 1979년 출간본(왼쪽)과 1983년 출간본(오른쪽)
한국학올림픽, 세계한국학대회

   1980년대 후반 국제 환경의 변화는 연구원에도 영향을 주었다. 1988년 여름, 개원 10주년을 기념해 개최된 세계한국학대회에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의 학자들이 참여한 것이다. ‘한국학의 과제와 전망’을 주제로 개최된 학술대회에는 동독, 헝가리, 폴란드 등을 포함한 18개국의 학자 90명이 논문을 발표했다. 세계 한국학 연구 교류의 대상이 그동안 미국, 일본에 집중되어 있던 상황에서 한 단계 나아간 의미 있는 자리였다. 그 해 가을 서울올림픽에 사회주의 국가들이 대거 참석하여 동서화합을 보여줬는데, 세계한국학대회는 그 분위기를 미리 보여주는 것 같았다. 당시 언론은 서울올림픽에 빗대어 이 학술대회에 ‘한국학올림픽’이라는 별명을 붙이기도 했다(경향신문 1988. 5. 14. 「「韓國學올림픽」 내달 서울서 개최」).
   이때의 발표논문들은 『한국학의 과제와 전망』(1988)이라는 제목 아래 전2권으로 출간되었다. 이 책을 통해 당시 학술대회의 내용을 자세히 확인할 수 있다.

[그림 8] 1988년 세계한국학대회 자료집 『한국학의 과제와 전망』(1988)
   => 1988년 세계한국학대회 자료집 『한국학의 과제와 전망』 바로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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