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학 칼럼

고려 충선왕의 ‘배움’과 몽골 원제국 시기의 한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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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한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한국사학전공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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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지하는 바와 같이 충선왕(忠宣王, 1275-1325)은 고려시대 최초의 혼혈 국왕이었다. 그런 배경 때문인지 이 왕에 대해서는 여러 다양한 관점들이 존재한다. 고려의 상황에는 별 관심을 두지 않은 채 인생의 대부분을 중국에서 보낸 몽골 황실의 일원으로 보기도 하지만, 고려와 몽골 양쪽에 능통하여 원제국시기 한반도와 중국을 오가며 활동했던 세계인으로 보기도 한다.


   물론 고려의 최고 위정자로서의 그의 업적에 대해서는 긍정보다는 부정적인 시각이 조금 더 우세하다. 그가 첫 즉위했던 1298년 1년을 채 못 채우고 퇴위당한 점, 1308년 복위 전은 물론 복위를 하고서도 다시 중국으로 돌아가 1313년 아들 충숙왕에게 고려왕 자리를 양도할 때까지 내내 중국에 머물렀으며, 양위 후에도 계속 중국에 머무른 것이 결정적인 이유였다. 다만 최근에는 또 다른 평가도 제기되었다. 그가 고려-몽골 혼혈이었던 탓에 양쪽 모두의 문물과 관습에 우호적일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 자신의 국정에 고려의 전통, 중국의 구제, 몽골의 관습, 그리고 제국의 제도 모두를 묘하게 섞어 넣을 수 있었다는 평가가 그것이다.


   그가 이렇듯 이질적인 여러 전통들을 다양한 비율로 배합하고, 그것을 고려의 제도개혁에 활용할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일까? 그가 반세기의 짧은 생애 동안 경험했던 수많은 ‘배움’에서 그 단서를 엿볼 수 있다.


   모두가 아는 것처럼, 13-14세기는 흔히 ‘원간섭기’로 불리는 시기다. 1231년 발발한 이래 30여년간 계속된 고려와 몽골의 전쟁, 그 뒤에 이어진 ‘정동행성(征東行省)’의 설치와 정치적 간섭, 13세기말까지 이어진 물자의 징발, 그리고 고려의 전통 규범과 법규에 대한 제국의 공연한 시비 등을 감안한 명명이다. 다만 그러한 암흑의 시기에도 여러 다양한 변화들이 함께 전개됐음이 눈에 띈다. 새로운 불교 종파가 유입되고, 무엇보다도 ‘제국의 관학(官學)’으로 육성된 성리학이 중국에서 전래하였다. 몽골 관습이 침투하는 한편으로 고려의 문물 또한 제국의 궁정에 소개되었다. 고려왕 원종(元宗, 재위 1260-1274)과 충렬왕(忠烈王, 재위 1274-1308)의 집권기간을 거치면서 몽골의 재침 가능성은 사라지고 양국에 공식 외교관계가 성립된 결과, 14세기초 고려 한반도는 본격적으로 원제국과의 ‘공존’을 시작해야 하였다.


   충렬왕과 몽골 공주 쿠틀룩 케르미쉬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충선왕은, 바로 이런 전환기에 성년이 되었다. 이미 다섯 살이 되기 전 중국을 왕래하기 시작했던 그는, 몽골 원제국 최고의 황제 쿠빌라이의 외손이라는 독특한 후광으로 제국의 안팎에서 많은 주목을 받았다. 왕장(王璋)이라는 고려인 이름과 ‘이지르 부카(Ijir Buqa)’라는 몽골 이름을 함께 가졌던 그는 쿠빌라이의 곁에서 중국의 전통을 익혔지만, 고려의 사적(史籍)을 중국으로 갖고 오게 해 고려의 역사 또한 학습하였다. 몽골 궁정에서 시위(侍位)하며 제국의 국정을 지근거리에서 목도하는 한편으로, 이후 원 황제 무종(武宗)과 인종(仁宗)이 될 카이샨과 아유르바르와다 두 왕자와 동거하며 몽골의 관행에도 익숙해졌다. 양위한 후에는 북경의 만권당(萬卷堂)에서 요수(姚燧), 조맹부(趙孟頫) 등 중국의 명유(名儒)들과 교류하며 성리학적 이해를 깊이 하였고, 중국 강남(江南) 지역을 주유하면서는 중국 사원에 경전을 시주하고 고승을 만나는 등 현지 불교계와 다각도로 교류했다. 심지어 티벳으로 유배를 가서도 1279년 멸망한 송나라의 마지막 황제를 만나는가 하면, 샤캬(Shakya) 사원에서 티벳 불교계와 접촉하기도 하였다.


   이렇듯 실로 다양한 원천을 통해 여러 문물을 접한 그는 이후 국정에서도 실로 흥미로운 모습을 보였다. 그가 정치개혁 및 재정개선책의 일환으로 시행한 정책들은 쿠빌라이 이래 제국정부에서 견지해 온 개혁담론과 상당히 닮아 있다. 그는 또 천인(賤人)을 군역(軍役)에 동원하지 않는 고려의 오랜 금기를 깨고는 천인을 군구(軍驅)라는 이름으로 군호에 편성해 온 몽골의 관습을 도입했고, 원제국정부의 중국 강남지역 행정체계 개편 방식을 참고해 고려 한반도에 기존의 4도호부(都護府) 8목(牧) 외에 15개의 지역 중심지(‘부府’)를 새로 지정하기도 했다. 심지어 그가 원제국의 ‘직염국(織染局)’ 제도를 도입해 고려의 모시와 마포에 제국의 직금(織金) 기법을 적용한 이른바 직문저포(織文苧布)라는 신(新) 직물의 생산을 기획했다는 추론도 있다.


   그러나 그가 그의 국정에서 몽골과 제국의 제도만 활용했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통념과 달리 그는 중국의 구제(舊制)와 한반도의 고제(古制)에 대한 애정이 매우 깊었다. 고려의 백관제도를 두 차례 개편하면서 처음에는 중국의 전통 백관제도로 회귀하고, 다음에는 국초였던 태조 왕건 시기의 백관 요소들을 부활시켰다. 고려의 태묘(太廟, 종묘)를 복원하면서는 제국의 눈치를 보느라 종전의 ‘7묘(廟)’ 체제를 고수하지 못했지만, ‘협실(夾室)’이라는 절충책을 동원해 종전(고려 중기)처럼 9명의 국왕 신위를 모시는 데는 성공했다. 게다가 태조 왕건의 신위를 제국 제도에 의거해 ‘중앙’으로 이동시키면서도, ‘불천(不遷)’의 대상이었던 고려초 혜종과 현종을 ‘서쪽 협실’에 모시는 등 고려초 이래의 ‘서상(西上)’ 원칙도 지켜내었다.


   이렇듯 충선왕은 자신의 국정에서 다양한 실험을 했던 국왕이라 할 수 있다. 그의 정책 중에는 실패로 끝난 것도 있고 상황의 호전에 성공한 것도 있다. 과거제 개편이 고려의 전통을 헝클어 버린 경우라면, 군역제와 지방제도는 일찍이 어려움을 겪어오던 제도들을 개선한 사례에 해당한다. 그런 만큼 공과가 다양한 국왕이지만, 한편으로는 오늘날의 우리에게 시사점도 제공한다. 전환기의 한반도가 맞닥뜨린 여러 다양한 ‘소스’들을 당시인들이 어떻게 바라봤고, 뭔가를 선택적으로 배척하기보다는 다양한 배율로 균형 잡힌 조합들을 창출해 냄으로써 결국 민중의 삶과 왕조의 위상을 어떻게 회복하려 노력했는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21세기 대한민국도 그의 삶에서 배울 바가 적지 않다. 그것을 영감으로 볼지 반면교사로 삼을지는 각자의 판단과 선택의 문제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