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사람의 향기
『지정조격(至正條格)』: 고려가 마주한 제국의 법제
  『지정조격』은 특이한 존재다. 한국이 보유하고 있는 문화유산이지만 한반도에서 만들어진 자료는 아니다. 몽골 원제국에서 만든 자료이자, 역사서도 문집도 아닌 법전이다. 그런데 원제국사 및 법제사 전공자들은 물론 전공이 다른 학자들도 큰 관심을 갖고 있다. 과연 왜일까?

  『지정조격(至正條格)』은 1340년대 중반 간행된 몽골 원제국의 최후의 법전이다. 1323년 반포된 『대원통제(大元通制)』의 개정 노력이 1338년 시작됐고, 1323년 이래 반포된 여러 조문들을 담은 새 법전이 1345년 11월 완성돼 다음 해 4월 반포되었다. 『대원통제』와 달리 원제국의 마지막 황제 순제(順帝, 재위 1333-1367)의 연호 ‘지정(至正)’을 법전명에 사용했고, <조격>과 <단례> 모두를 포괄하면서도 책명은 <조격>이라고만 적어놓았다.
   조문의 수는 『대원통제』의 1,962조에서 2,909조로 크게 늘었다. 20여년간 축적된 조문들을 새로 담았으니 당연한 결과이다. 다만 안타깝게도 현존하는 『지정조격』 판본은 전체 분량의 1/3이 채 못 된다. <조격>의 경우 총 27개 분야 1,700 건의 조문 중 10개 분야 373조만 남아 있고, <단례>는 11문 1,059 조문 중 5문 427조만 남아 있다. 현전하는 <조격> 항목들에는 경제, 사법 쪽 조항들이 담겨 있고, <단례> 항목에는 군사와 직제, 혼인 등에 관련된 조항들이 담겨 있다. ‘만몽직역체(滿蒙直譯體)’라는 문체로 기술돼 있어 판독은 매우 어렵지만, 법조문이 만들어지게 된 과정 전체가 담겨 있어 풍부한 정보량을 자랑한다.
  『대원통제』가 1234-1316년 사이의 조문들을 담고 있고, 『대원성정국조전장(大元聖政國朝典章, 원전장)』은 1260-1323년 사이의 조문들을 담고 있음을 감안하면, 『지정조격』은 1320년대 중반 이후의 원제국 법률 조문들을 담은 세계 유일의 현전 법전이라 하겠다. 그런 법전이 우리 장서각에 보존되게 된 것이 갖는 의미는 무척 큰데, 세종대 승문원(承文院) 박사를 역임한 손사성(孫士晟)이 대중국 외교업무차 수시로 북경을 왕래하던 와중에 이 책을 확보한 것으로 추정되며, 이후 경주 손씨 가문에서 2003년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이를 기탁해 주셨기에 2004-2005년 보존처리를 거쳐 학계에 공개되었다. 2007년에는 연구원에서 성대하게 학술대회를 개최하고 『지정조격』의 교주본과 역주본도 출판하였다.
   이러한 원제국의 법전이 한국학 연구에서 갖는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
   원 법전(法典)들은 단순한 형정서(刑政書)가 아니며, 제국 제도의 거의 모든 것, 특히 원사(元史) 등의 정사류 기록에 담기지 않은 상세정보를 담고 있다. 자료가 희소한 한국 중세사 연구에서도 당연히 그를 적극적으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 정사류, 문집, 묘지명, 지리지 등에 남아 있지 않은 고려후기 역사의 편린들을 당시 한반도의 핵심 파트너였던 원제국의 법전에서 발굴하고, 법전에 드러나는 제국 제도를 고려 제도와 비교해 원 제도가 고려제도에 미친 영향, 고려가 원제국 제도를 활용한 방식 등을 검토해야 할 것이다.
   물론 고려후기의 경우 몽골의 침공, 정치 간섭 및 경제 수탈로 인해 원제국 법률에 대한 입장이 매우 부정적이었다. 원제국과의 문물교류가 왕성했던 14세기전반에도 고려인들은 여전히 제국법의 사용에 소극적이었다. 그러다가 원제국이 해체된 이후인 14세기말 고려정부가 실용적 견지에서 『지정조격』을 비롯한 제국법을 부분적으로나마 활용하고, 조선시대에 들어가서는 다른 중국 법전들과 함께 국정에 그를 적극 활용하는 모습이 확인된다. 고려후기와 조선초의 정책사 연구에서 원제국법에 주목할 필요가 여기에 있다.
   예를 들어 1320년대의 『원전장』과 『대원통제』를 통해 14세기초 고려 안팎의 사정에 대한 이해를 얻을 수 있다. 고려 무역선이 중국 항구에 입항할 때 부담했을 관세(關稅)의 규모, 인도와 서역의 노예상인들이 몽골 노예들을 태운 채 고려에 들르곤 했다는 사실을 엿볼 수 있다. 충렬왕이 제국법의 한반도 적용을 극력 반대한 것이 그로 인한 한반도 신분질서의 동요 때문이었음을 제국의 양천 교혼(良賤交婚) 소생의 신분 판정 관행으로부터 엿볼 수 있고, 고려의 군역(軍役)에 천인(賤人)을 동원한 충선왕의 새로운 시도가 원제국 군역제도의 영향을 받은 결과였음을 제국의 군구(軍驅, 군역 노예) 관련 규정들을 통해 살펴볼 수 있으며, 공민왕이 한반도에 설치된 5개 만호부(萬戶府)를 없애려 노력한 것이 원제국 만호부들의 경제단위적 속성 때문이었음은 제국내 만호부들의 비위 행위를 언급한 여러 조문에서 확인할 수 있다.
  『지정조격』도 마찬가지다. 14세기 전·중반 한반도가 처한 상황을 잘 보여준다. 1320-30년대 환전(換錢) 행정의 불안정으로 인해 야기된 원제국 보초(寶鈔, 지폐) 가치의 하락을 언급한 수많은 조문들을 통해, 당시 고려에도 많이 들어왔던 원제국 지폐가 실질가치와 액면가치 간의 괴리로 인해 고려에 끼쳤을 영향은 정작 제한적이었을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 1332년 반포된 수많은 해상무역 통제 조치들도, 무역에 진심이었던 충혜왕이 육로 위주의 무역 동향을 보인 이유를 설명해 준다.

[그림] (좌) 지정조격 1권, 2권 표지 (우) 지정조격 본문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이렇듯 한국 중세사 연구, 고려시대 대외관계사 연구에도 여러모로 큰 도움을 줄 수 있는 『지정조격』을 앞으로 연구자들이 적극 활용할 필요가 있다. 세계사에 대한 학계와 대중의 시각을 크게 확장시켜 줄 것은 물론이고, 고려후기의 역사에 대해 한국인들 스스로 가져온 편견을 깨는 데도 크게 유용하리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