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사람의 향기
영조만의 특별한 과거회상법
   계절의 여왕이라 일컬어지는 5월은 1년 중 가장 아름다운 시절이면서도 기억하고 기념해야하는 날이 유독 많은 달이기도 하다. 그중에서도 특히, 어린이날(5일), 어버이날(8일), 부부의 날(21일) 같이 가족을 위한 날이 많아서 우리는 5월을 ‘가정의 달’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에 매년 5월이 되면 가족의 의미를 되새기면서 가족과 관련된 좋았던 기억, 혹은 가슴 아팠던 순간들을 떠올리는 사람 또한 많을 것이다.

   그런데, 과거의 우리 선현 가운데에서도 자신의 가족을 끊임없이 추억하고 그리워하면서 누구보다 애틋하고 애절한 심정을 드러낸 인물이 있다. 그 주인공은 바로 조선의 제21대 왕인 영조이다.
   장서각에는 『열성어제』에 수록된 작품 외에 영조가 말년에 지은 시문을 따로 모아놓은 영조어제첩이 소장되어 있다. 장서각 유일본인 이 자료는 5,300여 편의 방대한 시와 산문이 수록되어 있어 영조 노년의 삶과 심정을 면밀히 살필 수 있다. 이 가운데 지난 과거에 대한 회상을 다룬 작품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며, 그중에서도 부모 형제에 대한 추억과 추모가 월등하게 많은 편이다. 그런데 영조어제첩을 살펴보면, 영조가 과거를 회상하고 부모 형제에 대한 애절한 심정을 표현함에 있어서 몇 가지 남다른 글쓰기 방식을 선보이고 있어 주목이 된다. 그 독특한 글쓰기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바로 간지(干支)를 활용한 과거회상이다.

   사실, 옛 사람들의 시문에서 간지를 사용한 예는 흔히 살필 수 있지만, 영조의 경우는 조금 특별하다. 『어제간지(御製干支)』(K4-461~462), 『어제간지흥회(御製干支興懷)』(K4-463)과 같이 ‘간지’ 용어 자체를 어제의 제목으로 삼거나, 『어제갑오년(御製甲午年)』(K4-624~626), 『어제갑오년갑오일(御製甲午年甲午日)』(K4-628), 『어제경자일억경자년(御製庚子日憶庚子年)』(K4-1077)와 같이 특정 간지를 제목으로 내세운 작품이 많을 뿐 아니라, 내용에서 간지와 얽힌 사연과 감회를 기술한 작품 또한 수두룩하다. 간지와 얽힌 사건은 거의 자신의 부모, 형제, 자식과 관련되어 있다.

   이상에서 정리한 간지들은 영조어제첩에서 반복적으로 언급되면서 영조 노년의 과거 회상에 있어 핵심 소재이자 기억의 지표가 되고 있다. 그리고 위 간지를 언급한 작품에서 대부분 지난 시간과 추억에 대한 회한과 탄식, 강개함, 사모의 심정을 강렬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갑오년에 관한 애상이 두드러진 편이다.
   영조는 1714년 갑오년에 선형 경종과 함께 강화도 사고에 어진(御眞)을 봉안하러 다녀오며 정족산성과 연미정 등을 유람한 일이 있으며, 강화도를 다녀온 뒤에는 숙종의 병환을 직접 살피면서 8개월 동안 시탕(侍湯)을 하였다. 이렇게 갑오년은 형과 아버지에 얽힌 각별한 추억이 자리한 해였다. 그런데 영조는 뜻밖에 장수를 하면서 생의 말년에 다시 한 번 갑오년을 맞이하게 된다. 바로 81세이던 1774년의 일이었다. 1774년 갑오년을 맞이한 영조는 자연스레 60년 전의 갑오년을 회상하면서 깊은 애상에 젖었고, 이해에 『어제갑오년』, 『어제갑오년갑오일』, 『어제갑오년하중봉(御製甲午年何重逢)』(K4-630), 『어제억갑오(御製憶甲午)』(K4-3142)와 같은 작품을 비롯하여 갑오년의 옛일과 감회를 읊은 수많은 작품을 남겼다.
   “갑오년 갑오일, 이 해를 만나니 회포가 천만이로다. 옛 일을 떠올리니 21살 때이거늘, 지금은 몇 살인가 팔순을 넘겼구나.……아, 천지는 예나 지금이나 같거늘, 아, 노년은 아득하기만 하네. 옛 전각 바라보며 이 당에 누워 있으니, 어찌 효라 하였으며, 자식의 도라 하겠는가?(甲午年, 甲午日. 逢此歲, 懷千萬. 若問昔, 二十一. 今何歲, 踰八旬.……嗟乾坤, 古今同. 噫暮年, 何冥然. 瞻舊殿, 臥此堂. 是豈孝, 亦子道.)”
  -『어제갑오년갑오일』(K4-628) 중-
   흥미로운 사실은 영조가 80세가 넘도록 장수를 하는 가운데, 갑오년과 같이 간지의 회갑을 맞이한 경우가 종종 있었다는 것이다. 1770년 경인년에 60년 전인 1710년을 떠올리며 당시 숙종의 50세 생신과 병환의 호전을 경축했던 일을 기록한 『어제인경세만억추모록(御製因庚歲萬億追慕錄)』(K4-3843)이나 1772년 임진년에 19세 때 임진년(1712)에 어머니 숙빈최씨와 함게 창의궁 구저(舊邸)로 나아갔던 때를 추억하며 감회를 읊은 『어제만회(御製萬懷)』(K4-1854) 같은 작품에서 그러한 사례를 확인할 수 있다. 1772년 임진년의 경우에는 영조가 직접 창의궁에 거동하여 이 사저에서 나온지 60년이 되었음을 기억하고자 “구저회갑(舊邸回甲)”이라는 현판을 친히 써서 걸기도 했다. 이러한 일들은 모두 영조가 80세가 넘도록 장수하고 52년 간이나 왕위에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도 말할 수 있다.

   영조는 어린시절부터 자신의 친형제들을 모두 잃었고, 성년이 되어서는 친모 숙빈최씨와 부친 숙종, 모후인 인원왕후, 의형 경종과 형수 선의왕후, 아들 효장세자와 사도세자, 손자인 의소세손과 연이어 이별하면서 늙어갈수록 점점 더 외로운 처지가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정작 자신은 죽지도 않고 오래도록 삶을 영위하고 있으니, 해가 갈수록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미안한 마음이 더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에 자신의 가족과 관련된 해의 간지를 철저히 기억하고 기념하면서 가족 일원으로서의 도리를 다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재확인하였던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영조어제첩에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간지 관련 작품들은 영조 노년의 외롭고 애절한 상황에서 탄생한 영조만의 특별한 과거회상법이자 글쓰기 방식이라고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