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사람의 향기
왕실의 가계도, 『돈녕보첩』의 작성과 보관
   조선시대 왕의 친인척을 관리하는 일은 굉장히 중요한 일 중 하나이다. 따라서 관청을 별도로 설치해 그러한 일을 전담하게 했다. 왕의 친족을 관리하는 종친부, 왕과 왕세자의 사위를 담당하는 의빈부, 그 외 친인척을 관리하는 돈녕부가 대표적이다. 왕의 친인척을 관리하기 위해서는 그에 해당하는 사람들의 명단을 확보하고 때때로 수정하는 것이 중요한 업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돈녕부에서는 왕의 친인척을 예우하기 위해 왕과 왕비의 친인척을 몇 년에 한 번씩 조사해 별도의 책으로 만들어 비치하였다. 그것이 바로 『돈녕보첩』이다.

   『돈녕보첩』은 조선전기부터 만들어졌지만 임진왜란으로 인해 모두 없어지고 인조 대에 다시 만들자는 의견이 반영되어 효종대부터 다시 작성되기 시작했다. 『돈녕보첩』은 대왕편과 왕후편으로 구분해 별도의 책으로 작성했다. 작성 시기는 3년에 1번씩 쥐띠, 토끼띠, 말띠, 닭띠에 해당하는 식년에 만드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다만 예외적으로 1649년(효종원년, 기축년) 소띠, 1652년(효종3년, 임진년) 용띠에 만들어진 『돈녕보첩』도 확인이 되고 있다. 『돈녕보첩』은 순종대까지 계속 작성되었다.
   『돈녕보첩』을 만들기 위해서는 친인척에게서 관련 정보를 수집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해당되는 집집마다 가계 구성원을 적어서 제출하는데 그 때 사용하는 것이 바로 ‘돈녕단자(敦寧單子)’다. 자격을 갖춘 집이라면 모두 제출할 수 있었고, 아들의 자손 뿐 아니라 딸의 딸의 자손들, 즉 외외손(外外孫)도 촌 수 이내라면 모두 제출할 수 있었다. 물론 문중이나 지방 관리 등의 확인을 거쳐 올려야 했다.
   이렇게 제출된 돈녕단자를 정리해 『돈녕보첩』으로 만든다. 원고지와 같은 형태의 종이 위에 모두 붓으로 한글자씩 정성스럽게 써서 필사본으로만 총2부를 만들어 두었다. 조선시대에는 세로쓰기로 작성하는 것이 일반적이었기 때문에, 오른쪽 위에서 아래 방향으로 쓰고, 다시 왼쪽 방향으로 가서 위에서 아래로 쓰는 방식으로 작성되었다. 제일 첫 줄에는 태조강헌대왕(太祖康獻大王), 태종공정대왕(太宗恭定大王)과 같이 대왕의 묘호와 시호를 적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 다음 왼쪽 줄에는 1칸 아래에 남(男), 혹은 여(女)를 기록해 아들인지 딸인지를 밝히고, 아들이면 ‘남’자 밑에 이름과 관직 등을 적고, 딸이면 ‘여’자 밑에 남편의 이름과 관직 등을 적었다. 아들 딸의 자손은 대왕의 2칸 아래에 동일하게 기록하고 있는데, 태어난 순서에 따라 기입되지는 않았다. 왕의 자손은 아들의 자손일 경우에는 9대손까지, 딸의 자손은 6대손까지 기입했고, 왕비의 가계에서는 왕비를 기준으로 부계쪽 친척은 위로 4대, 후대로 4대까지, 모계 혹은 여성 친척의 자손 등 성이 다른 이성친은 위로 3대, 후대로 3대까지만 확인해 수록했다.

   만들어진 『돈녕보첩』 2부 중 1부는 돈녕부 내에 두어서 쉽게 참고할 수 있도록 하고, 나머지 1부는 훗날 돈녕부에 비치해 둔 자료가 훼손되었을 때 대비할 수 있도록 안전한 곳에 보관했다. 바로 북한산성 행궁이다.
   북한산성은 인가와 떨어져 있어 화재나 전란에 대비할 수 있었지만 문제는 행궁에 아무도 상주하지 않아서 매년 여름 장마 이후에 물난리가 날 가능성이 높다는 데에 있었다. 종이로 만든 책은 불에도 약하지만 물에도 취약한 편이라 한번 젖으면 종이끼리 달라 붙어 내용을 알 수 없게 되거나 쉽게 곰팡이가 피어 종이가 삭아버릴 수 있다는 점이 큰 문제였다. 따라서 돈녕부에서는 북한산성 행궁에 주기적으로 사람을 보내 매년 봄, 가을이 되면 『돈녕보첩』을 보관해 둔 행궁 건물에 문제는 없는지, 『돈녕보첩』에 습기는 차지 않았는지, 벌레는 먹지 않았는지 등을 점검했다. 만약 보관해뒀던 전각에 큰 문제가 생겨 수리를 해야하는 경우가 생기면 행궁 내 다른 전각으로 옮겨 보관해두는 일도 있었다. 이렇게 자료를 확인할 때면 날이 좋은 날 그늘에서 책장을 한 장 씩 넘기며 확인하는 작업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렇게 북한산성 행궁에 보관되었던 『돈녕보첩』은 1909년 궁내부 규장각 도서과에서 북한산성 행궁 자료 일체를 일괄적으로 조사할 때 작성했던 『북한책목록』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그 후 돈녕부에 보관되어 있었던 『돈녕보첩』과 함께 북한산성 행궁에서 보관한 『돈녕보첩』은 봉모당 보각을 거쳐 현재 장서각으로 이관되어 안전하게 보존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