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사람의 향기

옥산부대빈(玉山府大嬪), 장희빈의 마지막 이름

이민주 사진
김윤정
한국학중앙연구원 정연구원

사극의 단골 주인공인 장희빈은 조선시대 가장 유명한 여성 중 한 명이다. 장희빈과 인현왕후 그리고 숙빈최씨의 이야기는 궁중암투를 넘어, 숙종대 서인과 남인의 환국정치 속에서 라이벌이자 희생양이 되었던 그녀들의 삶을 조망한다.


장희빈의 이름은 장옥정, 역관 집안 출신의 궁녀로서 1686년(숙종 12) 승은후궁이 되었다. 후궁은 품계와 성씨를 붙인 호칭으로 불렸으므로, 궁녀 장옥정은 종4품 숙원(淑媛)의 품계를 받으면서 장숙원이 되었다. 왕자를 낳은 후 1689년(숙종 15) 1월 15일에 내명부 정1품 빈(嬪)에 책봉되면서 비로소 장희빈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1689년 5월 기사환국으로 인현왕후가 폐위되었고, 1690년(숙종 16) 10월 희빈은 왕비로 책봉되어 중전으로 불리게 되었다. 1694년(숙종 20) 갑술환국으로 인현왕후가 복위되면서 중전 장씨는 다시 희빈으로 강등되었다. 인현왕후가 1701년(숙종 27) 8월 14일에 승하하자 희빈의 복위를 위한 남인들의 정치적인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장희재의 복권과 희빈의 상복을 다른 후궁과 구분해야 한다는 상소가 이어졌다. 그러나 숙빈최씨의 고변으로 희빈은 인현왕후를 저주했다는 혐의를 받고 10월 10일에 자진했다.


사극에서 희빈은 사약을 마시고 사망하지만, 『실록』에서 숙종은 희빈에게 자진을 명했을 뿐 사약을 내리지는 않았다. 세자의 생모에게 일반적인 형벌을 가할 수 없다는 주장에 따라 공식적인 절차를 통한 사약 집행은 없었다. 성종대 폐비 윤씨의 사사(賜死)와 연산군의 복수를 거울삼아 관련 기록을 남기지 않은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좌) 단의빈상장등록 (우)경인년대빈장씨축문 ,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

(좌) 단의빈상장등록 (우)경인년대빈장씨축문 ,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

희빈이 자진한 당일 밤, 시신은 소금저(素錦褚)로 덮혀 선인문(宣仁門)의 협문을 통해 정릉동 본가로 보내졌다. 희빈이 죄인으로 사망하면서 상장례 과정에서는 더 이상 희빈이 아닌 장씨로 호칭되었다. 당시 14세의 세자였던 경종은 법적인 어머니인 인현왕후의 국상에서 아들로서의 역할을 다했다. 그러나 생모를 위해서는 가장 가벼운 시마(緦麻) 상복을 입고 곡하는 것 외에 어떤 상례 절차도 행할 수 없었다. 장례 전날 빈소에 친림한 것이 생모와 영원히 이별하는 마지막 인사였다.


1772년(경종 2) 신임옥사로 소론이 득세하면서 비로소 추존(追尊)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었다. 경종은 생모를 옥산부대빈(玉山府大嬪)으로 추존하고, 대빈묘(大嬪廟)를 새로 조성하여 신주를 봉안토록 했다. 옥산부대빈은 희빈의 본관인 옥산(인동의 옛 이름)에 덕흥대원군의 예와 같이 ‘대’자를 결합해 만든 칭호로서 경종이 어머니에게 바치는 새로운 이름이었다.


이 과정에서 죄인으로 죽은 장씨를 ‘대빈’으로 추존하는 것은 숙종의 뜻을 어기는 것이라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그럼에도 경종은 관련자를 처벌하고 추존을 강행했다. 1723년(경종 3) 5월 26일 큰비가 내리는 날, 경종은 신하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대빈묘에 신주를 봉안하는 의례를 거행했다. 다음해 경종이 승하하면서 옥산부대빈은 장희빈의 마지막 이름이 되었다.


1724년 즉위한 영조는 생모 숙빈최씨의 사당인 숙빈묘(淑嬪廟)를 경복궁 북쪽에 조성했고, 1744년(영조 20)에는 육상(毓祥)이라는 묘호를 새로 정했다. 1753년(영조 29) 6월 25일 숙빈에게 ‘화경(和敬)’이라는 시호를 더하고, 육상묘를 육상궁(毓祥宮)으로 승격시켰다. 영조는 생모를 왕후로 추존하지는 않았지만 시호를 계속 추가하여 숙빈의 위상을 높이고자 했다. 숙빈의 마지막 이름은 ‘화경휘덕안순수복숙빈최씨(和敬徽德安純綏福淑嬪崔氏)’로 남아있다.


현재 대빈과 숙빈의 신주는 후궁인 왕의 생모를 위한 사당인 칠궁에 모셔져 있다. 대빈의 소박한 이름은 그녀의 파란만장했던 삶뿐만 아니라 아들인 경종의 불안하고 짧은 일생을 함께 보여준다. 반면, 숙빈의 화려한 이름은 영조의 길고 안정적인 치세를 통해 가능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