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연 사람들

이렇게 찾은 자료가 국가문화재로 지정되는 것이 또 하나의 즐거움이었습니다.

이번 한중연사람들에서는 장서각 왕실문헌연구실에 근무하는 박용만 선생님을 만나보았습니다.


황정연 사진

독자들을 위한 자기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저는 장서각 왕실문헌연구실에서 국가왕실자료를 정리하고 연구하는 박용만입니다. 처음 연구원에 입사하여 맡았던 업무도 장서각 국가왕실문헌이니, 지금의 하는 일과 인연이 깊다고 할 수 있겠네요.


하시는 일에 대해 말씀해주세요.


알다시피, 장서각은 조선시대 국가왕실문헌을 소장하는 있는 수장고이며 동시에 자료를 정리하여 연구하는 부서입니다. 조선시대 국가왕실문헌은 대체로 서울대학교 규장각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분산되어 관리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자료들은 대부분이 한자로 되어 있고, 하나하나가 역사와 사연이 있어 정리가 쉽지만은 않습니다. 그것들을 조사하여 정리하고, 연구자료로 제공하거나 일반인이 알 수 있도록 소개하는 일들을 하고 있습니다. 어찌 보면 다른 사람들이 평생 보지 못하는 자료를 가까이에서 정리할 수 있다는 것이 행운이라면 행운이죠.


꽤 오랜 기간 재직하셨어요. 입사당시 연구원을 기억하시나요?


2017년 정양완 교수님 댁에서(심경호, 정양완, 강신항, 어강석, 황문환, 안장리, 김건곤, 박용만)

2017년 정양완 교수님 댁에서(심경호, 정양완, 강신항, 어강석, 황문환, 안장리, 김건곤, 박용만)

제가 한국학중앙연구원에 처음 오게 된 것은 1991년 한국학대학원 석사과정에 입학하면서부터입니다. 한국학대학원을 나온 선생님의 소개로 지원했는데, 그 선생님은 “이 대학원은 어디보다 마음껏 공부할 수 있지만 또 어디보다 대충할 수 있다. 모든 것이 본인에게 달렸다.”고 하셨습니다. 입학해 보니 그 말씀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게 됐습니다. 당시에는 적만 두고 기숙사에서 고시 준비하는 대학원생들이 간혹 있었으니까요. 물론 대다수의 대학원생들은 쪽잠을 자며 자신의 공부에 몰두했습니다.

30년 전이지만 연구원에 처음 왔을 때 기억이 또렷합니다. 당시 한국학대학원은 다른 대학원보다 입학시험이 빨랐는데, 연구원 정문에서 대강당까지 올라가는 길 양쪽으로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가 너무 아름다웠습니다. 연구원의 단풍은 지금도 아름답지만 당시는 더 예뻤습니다. 또 적막하다가 점심시간이 되면 여러 건물에서 하나둘 사람들이 나오던 모습도 인상적이었습니다. 당시 대학원생이었던 저에게 한편으론 경외롭기도 하고 한편으론 웃음이 나오는 광경이었습니다. 물론 직원으로 있으면서 그런 경외심은 많이 사라졌지만요.


연구원에 계시면서 여러 업무를 하셨어요.

대학원에서 석사과정과 박사과정을 마치고, 지금은 없어진 대학원 조교도 했습니다. 제가 한국학대학원 마지막 조교였네요. 2000년 8월 박사학위를 받고 이듬해 장서각의 전문원으로 시작하여 전문위원, 연구원으로 지금까지 일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인 사정으로 2005년 퇴직했다가 2007년 연구직으로 다시 입사했습니다.

저는 주로 장서각에서 근무했는데, 3년 정도 백과사전편찬실에서 일하기도 했습니다. 우리의 민족문화를 집대성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세계적으로 대단한 성과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항목을 검토하고, 새로운 항목을 개발하며, 잘못된 내용을 수정하고, 유물과 유적을 촬영하여 이미지 자료를 확보하는 등의 개정 및 증보사업에 참여했습니다. 특히 내용에 대한 민원으로 골머리가 아팠던 일이 유독 기억에 남습니다. 자기 집안에 관한 일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민원인 때문에 감사원에 고발되기도 했었습니다.

장서각은 저에게 고향과 같은 곳입니다. 처음 일을 시작한 곳도 장서각이고, 담당한 업무도 재미있고 의미 있는 작업이었습니다. 장서각의 사업은 말할 것도 없지만 저에게는 특히 수탁사업 참여가 기억에 남습니다. 국학진흥연구사업을 비롯하여 국가왕실과 민간의 고문헌을 정리한 사업, 영조의 어제첩(御製帖)을 해제한 사업, 왕실문헌연구사업 등에 참여했습니다. 이 중에서 국가왕실문헌을 정리하여 자료집을 간행하는 사업의 경우 장서각에 있는 국가왕실문헌을 바탕으로 현장을 답사하여 조사했습니다. 왕릉의 자료를 번역하고, 장서각의 왕실고문서를 하나하나 정리하고, 숙종, 영조, 정조 등 조선후기 국왕의 자료를 모아 자료집을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사업은 장서각에 있는 자료의 소종래를 밝히는 한편 부정적으로 인식되었던 조선시대 국가왕실에 대한 이미지를 바꾸는 과정이었습니다. 자료 하나에 담긴 역사와 이야기를 담아내면서 한국학 연구의 현장에 서있다는 자부심도 갖게 되었습니다.


그 중 기억에 남는 업무는 무엇인가요?


장서각은 조선후기 국가왕실자료의 보고(寶庫)입니다만, 특히 규장각과 비교할 때 조선후기 국가왕실문화와 관련된 대부분의 자료가 여기에 있습니다. 정치사, 경제사, 문학사, 미술사 등 기존의 학문분야로 구분하기 어려운 자료가 많습니다.이것을 아우르는 것이 국가왕실문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자료를 정리할수록 앞으로의 과제가 더욱 많아집니다.

더구나 그동안 알려지지 않은 자료를 찾았을 때는 이루 말할 수 없는 희열을 느낍니다. 임금과 공신들이 회맹한 뒤 그것을 기록으로 남긴 <이십공신회맹축(二十功臣會盟軸)>을 처음 보았을 때 그 전율을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최상급의 재료에 최고의 정성으로 만든 2건의 이 축은 유례가 없는 조선시대 최고의 문화적 유물입니다. 또 영조의 생모인 숙빈최씨(淑嬪崔氏)의 소령원(昭寧園)이나 국왕의 생모를 모신 사당인 칠궁(七宮), 국왕 자녀의 태를 봉안한 태실(胎室) 등을 답사하며 조선이 결코 병든 나라가 아니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찾은 자료가 국가문화재로 지정되는 것이 또 하나의 즐거움이었습니다.

장서각에 있는 자료들로 많은 연구를 하셨는데 그중 제일 애착이 가는 자료가 있을까요?


유녀향염광지(幼女香艶壙誌)

유녀향염광지(幼女香艶壙誌)

조선에는 모두 스물일곱 명의 국왕이 있었습니다만 개인적으로 저는 영조대왕을 좋아합니다. 영조는 일반인들에게 ‘아들을 뒤주에 가둬 죽인 임금’이라는 비정한 아버지로서의 이미지가 강하지만 자료를 보다보면 정말 그랬을까하는 의구심이 듭니다. 그 사례로 장서각에는 <유녀향염광지(幼女香艶壙誌)>라는 매우 작은 첩장이 있습니다. 접으면 세로 10㎝, 가로 7㎝인데, 두 면에 걸쳐 영조가 작은 글씨로 쓴 지문이 있습니다. 1718년 어머니인 숙빈최씨의 상중에 겨우 돌이 지난 첫째 딸 향염이 죽습니다. 영조는 일단 임시로 묻었다가 4개월 뒤 어머니의 상이 끝나자 제대로 매장을 합니다. 애달픈 심정을 직접 지문을 짓고 글씨도 써서 새와 꽃문양의 비단으로 정성껏 꾸며 보관하였습니다. 영조에게 이 딸은 무척이나 불쌍한 자식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영조는 말년에 이 딸을 화억옹주(和憶翁主)로 추증하고 무덤의 표석도 어필로 써서 세웁니다. 그동안 비정한 아버지로 각인되었던 영조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작고도 예쁜 첩입니다. 두꺼운 장지로 만들어진 이 첩은 원래 다른 용도로 썼던 것을 재활용한 것이니, 평생 검소함과 절약함이 몸에 배었던 영조의 진면목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쁜 일과가 끝나면 개인적인 여가시간은 무얼 하며 보내시나요?


AKS사회인야구부
AKS사회인야구부

연구직이라는 것이 늘 뭔가를 읽고 되지 못한 글을 써야하는 골치 아픈 직업입니다. 그래서 저는 시간이 되면 몸을 많이 움직이는 활동을 합니다. 연구원 직원들이 만든 사회인 야구팀에서 스트레스를 풀었습니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5년 만에 해체되었지만 지금도 다른 팀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적지 않은 나이에 끼워주는 것만도 감사하게 생각하면서 즐겁게 뛰어 다닙니다. 같이 땀 흘리고 같이 웃어서 그런지 지금도 당시 멤버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다시 뭉쳐서 운동을 하고 싶습니다.


의미 있고 귀감이 되는 일을 많이 하셨어요. 후배들에게 해주시고 싶은 말씀이 있으신가요?


어떤 일이든 긍정적이고 포용적인 생각과 자세가 필요합니다. 지도교수이신 정양완 선생님께서 누군가의 요청에 ‘안 된다’라고 말하는 것을 싫어하셨습니다. 상대방이 그 말을 하기 위해 얼마나 고민하여 어렵게 요청했을까를 생각하면, 쉽게 거절하지 못한다고 하셨죠. 이 말을 저도 해주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