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연 사람들

대기하는 시간에 잠시 글을 읽고 있으면 오히려 정신적으로 힐링하는 느낌이 듭니다

이번 한중연사람들에서는 문화재청에 근무하는 황정연 학예연구사를 만나보았습니다.


황정연 사진

독자들을 위한 자기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반갑습니다. 저는 한국학대학원에서 미술사를 전공하고 현재 문화재청에서 근무하고 있는 황정연이라고 합니다. 먼저, 인터뷰 요청을 받고 몇일 고민을 했습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을 거쳐간 유능하신 분들이 많은데 저처럼 소박한 사람을 인터뷰해도 되는지 걱정이 앞섰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의 20대를 불태운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의 경험을 통해 후배들에게는 미래를 위한 계획을, 일반 독자분들께는 이곳을 더욱 잘 이해하시도록 도움을 드리고자 용기를 냈습니다.


지금 근무하시는 곳에 대한 자세한 소개 부탁드립니다.


저는 현재 대전정부청사에 있는 문화재청 유형문화재과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유형문화재과는 그야말로 눈에 보이는 ‘유형(有形)’의 문화재(건축물, 회화, 조각, 공예, 전적류 등)를 다루기 때문에 업무 범위가 굉장히 넓고 다양합니다. 문화재청 입사한 후 첫 발령지는 대전 국립문화재연구소였습니다. 문화재청이 문화재의 지정과 보호 관리를 목적으로 운영되는 정부조직이라면, 국립문화재연구소는 문화재 행정과 직결된 문화재 조사연구를 수행하는 기관입니다. 문화재연구소에서 약 10년 동안 미술유산 기초조사를 담당하며 약간 느슨한 생활을 하다가 행정 위주로 빠르게 돌아가는 본청 업무에 적응하는 것이 녹록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막연하게 생각해오던 조사업무가 국민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구체적 정책으로 실현되는 과정을 경험하면서 더욱 책임감 있게 생활하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하시는 일은 무엇인지요?


국보 합천 해인사 건칠희랑대사좌상(2020.10.21 지정)

사진1. 국보 합천 해인사 건칠희랑대사좌상(2020.10.21 지정)

국가지정문화재인 국보와 보물 지정이 주된 업무입니다. 하나의 문화재가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되기까지 여러 단계를 거치는데요. 먼저 시·도지사로부터 지정 신청이 접수되면, 분야에 맞게 조사단을 꾸리고 조사결과는 문화재위원회 심의를 거쳐 지정여부를 결정하게 됩니다. 그런데 조사결과가 미비하면 다시 재조사를 해야 하고 경우에 따라 과학적 분석도 해야 하기 때문에 종결되기까지 보통 1년 넘게 소요됩니다. 저는 문화재의 지정 여부가 최종 확정될 때까지 전 과정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국보, 보물 모두 관리에 있어 차이는 없으나, 아무래도 국보는 보물에 해당하는 유형의 문화재 중 인류문화사적으로 큰 의미를 지닌 것을 지정하기 때문에 상징적 위상이 더 높고 과정도 더욱 복잡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최근 국보로 지정된 ‘조선왕조실록’이라든지 현존하는 유일한 초상조각인 ‘합천 해인사 건칠희랑대사좌상’ 모두 우리나라 역사와 문화를 자랑하는 대표적인 문화재인데요. 조선왕조실록은 현지 조사만 꼬박 1년이 걸렸고, 건칠희랑대사좌상의 경우 국보로 지정될 때까지 10년이라는 오랜 시간이 소요되었습니다. 그만큼 국보·보물 지정은 원천자료의 충분한 검토를 통해 가치에 대한 이견(異見)이 없을 때 비로소 가능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문화재청은 국가 행정부처이기 때문에 국가가 목표로 하는 정책을 수행할 것이라 여겨집니다. 문화재청이 최근 주안점을 두고 있거나, 국가적 현안이라고 생각되는 부분이 있으면 혹시 알려주실 수 있는지요?

마침 올해는 1961년 10월 문화재청의 전신(前身)인 문화재관리국이 출범하면서 문화재 행정이 시작된 지 60년이 되는 해입니다. 그동안 문화재로 지정·등록된 건수가 1만 4천여 건이 넘고 해외로부터 환수된 문화재가 1만여 건에 달하므로 앞으로 체계적인 문화재 보호관리를 위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생각해야 할 시기라고 봅니다. 더욱이 문화유산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도 상당히 높아져 효율적으로 정보를 제공해주는 방안도 함께 고민해야 합니다.

문화재청은 문화재 행정 60주년을 계기로, 인류의 생명을 위협하는 전 세계적인 감염병 확산과 급속도로 진행되는 기후변화, 인구감소 문제가 문화유산에도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주고 있는 상황을 인식해 문화유산을 활용한 산업화 기반 마련, 혁신적 보존관리를 위한 디지털 인프라 구축, 국민들의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문화향유 계층 확대 등 문화유산의 미래가치 창출을 위한 전략을 수립해 운용하고 있습니다. 당장 그 효과가 체감되지 않겠지만, 마치 흐르는 시냇물처럼 우리 삶 속에 천천히 스며들 날이 머지않았다고 생각합니다.


근무하다보면 여러 가지 재미있거나 특이한 경험을 할 일도 많다고 생각됩니다.


비무장지대(DMZ) 문화재 조사 당시(2008년)

비무장지대(DMZ) 문화재 조사 당시(2008년)

24시간 조상님들이 남기신 문화유산과 함께 하다보니 애정을 쏟은 만큼 보람된 경험도 많이 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조선왕릉 40기의 현황을 파악해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지원하였고, 전국에 산재한 조선왕조 의궤(儀軌)를 전수조사해 보물 지정과 연계하였으며, 병들어 가는 해외 우리문화재가 보존처리 처방을 적절히 받을 수 있도록 협의하는 등 분야를 막론한 조사연구와 정책을 진행하였습니다.

그 중에서도 2008년 비무장지대(DMZ) 자연생태조사의 일환으로 경기도 연천지역 비무장지대를 현지실사한 것이 아직도 기억에 남습니다. 생전 처음 전투복과 방탄복을 겹겹으로 입고 하루에 수십 킬로씩 도보로 움직였으며, 동물·식물·지질 전공자들 속에서 저는 비석이나 분묘, 석조물 등을 육안으로 관찰하고 문화재 분포지도를 그리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북한군인들을 가까이 볼 기회도 있었는데, 어떠한 의사표현도 금지된 상황에서 말로만 듣던 분단의 현실을 온몸으로 느낀 순간이었습니다. 이때의 경험은 제가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북한문화재에 관심을 갖고 관련 사업을 기획하는 데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프랑스 파리 기메박물관 소장 한국병풍 조사(2012년)

프랑스 파리 기메박물관 소장 한국병풍 조사(2012년)

창덕궁 신선원전 조사를 마치고(2007년)

창덕궁 신선원전 조사를 마치고(2007년)

한국학대학원에서 한국미술사를 전공하셨는데, 지금 하시는 업무에 도움이 되는지요?


박세당 종가문서 조사, 현 정수환 고문서연구실장과 함께(2001년)

박세당 종가문서 조사, 현 정수환 고문서연구실장과 함께(2001년)

장서각 소장 조선왕조의궤 조사(2011년), 현 장서각 박용만 연구원과 함께)

장서각 소장 조선왕조의궤 조사(2011년), 현 장서각 박용만 연구원과 함께

물론입니다. 제 경우 대학원 전공을 실무에 적용할 수 있는 직업이기 때문에 질문 내용이 더욱 피부로 와 닿네요. 저는 학생들이 자유롭게 전공분야를 넘나드는 ‘학제간 교유(交遊)’가 한국학대학원의 가장 큰 장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저 역시 1996년부터 약 12년 동안 한국학중앙연구원에 머물면서 역사학, 한문학, 서지학 전공자들과 학제간 교유를 열심히 실천한 결과, 제 전공분야의 외연을 넓힐 수 있었습니다.

또 하나는 학위과정 동안 근무한 장서각 고문서연구실에서의 경험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전국의 대표 문중에서 수집한 고문서와 서책, 서화류를 접하면서 조선시대를 생생하게 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때 방문했던 문중을 전적류 조사 덕분에 지금도 방문하는 경우가 종종 있으니, 저처럼 대학원에서의 경험이 현재까지도 업무로 이어지는 경우는 흔치 않을 것입니다. 이 또한 큰 행운이라고 생각합니다.



대학원 재학 중이나 한국학중앙연구원에 있을 때 특별히 기억나는 것이 있으면 말씀해 주시죠.


무엇보다도 미술사학과 이성미, 박정혜, 이완우 교수님을 비롯해 선후배, 동료들에게 많은 가르침과 도움을 받은 것이 가장 큰 은혜라고 할 수 있지요. 그밖에 기숙사 생활이 기억에 가장 많이 남는다고 하겠는데요, 97년 석사과정 당시 종교학과 목사님과 철학과 스님이 같은 방을 쓰고 계셨는데, 아침마다 목사님은 화엄경을 읊었고, 스님은 찬송가를 부르셨습니다. 저희는 겉으로 진정한 종교의 화합이라고 칭찬했지만, 속으로 참으로 다행이라고 안도했던 것 같습니다.

또 하나 기억나는 일화는 약 15년 전에도 지금처럼 외국인 유학생이 여럿 있었는데, 비오는 날에는 누가 김치부침개를 잘 부치는지 한국학생들과 유학생들이 종종 내기(?)를 하곤 했습니다. 당시 프라이팬에 완벽하게 부침개를 던져놓던 이는 한국학생이 아닌 프랑스 유학생 야닉(Yanick Breton, 현 파리7대학 한국어과 교수)이었습니다. 한국학생들은 당황해서, 유학생들은 놀라워서 환호하던 그 모습을 지면에 싣지 못해 아쉬울 뿐입니다. 이밖에 점심시간을 반납하시고 학생들에게 소학(小學)과 효경(孝經)을 강독해 주시던 노홍두 전문위원님도 기억나네요. 지금은 대학원도 분위기가 많이 바뀌었겠지요? 그때는 소중함을 몰랐는데 지금은 그리운 시절이 되었습니다.


일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시간은 언제입니까? 취미가 있으시면 알려주세요.


이렇게 답변드리면 놀리냐고 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문화재청에 온 이후 생긴 취미가 KTX 안에서 논문 읽기입니다. 그리고 관심 있는 전시회는 챙겨 보려고 노력합니다. 지방으로 출장을 많이 다니기 때문에 족히 2시간 내외는 기차 안에 머무는데요, 이때 필요한 논문이나 책을 주로 읽습니다. 평소에는 업무량이 많고 밤늦게까지 이어지는 경우가 많아 개인적인 시간을 거의 내지 못합니다. 하지만 대중교통을 이용하거나 대기하는 시간에 잠시 글을 읽고 있으면 오히려 정신적으로 힐링하는 느낌이 듭니다. “하기 싫은 것을 해야지, 하고 싶은 것을 한다.”라는 말은 이러한 경우를 두고 한 말이 아닐까 싶습니다. 특정한 성과를 채우는 것보다 연구자로서 제 정체성을 잃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p>

독자분들에게 하시고 싶은 말이 있다면 부탁드립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은 제가 미술사를 공부할 수 있게 해준 고마운 곳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모두 열거할 수 없지만 음으로 양으로 저를 응원해 주신 분들을 만난 뜻깊은 장소입니다. 제 좌우명과도 같은 『중용(中庸)』의 ‘지성무식(至誠無息, 지극한 정성은 쉼이 없다)’이라는 글귀를 알게 해준 것도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의 배움 덕분이었습니다. 이 글은 읽는 여러분들도 인생의 의미 있는 장소를 한두 곳 정도는 간직하고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제가 한국학중앙연구원에 대해 느끼는 것처럼 여러분들도 그 장소를 잊지 마시고 좋은 추억으로 오래 남겨두시기를 희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