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학 포럼

신간 소개: 『근대 한국의 법, 재판 그리고 정의』

이하경 사진
이하경
한국학대학원 사회과학부 조교수

필자는 2020년 가을에 한국학중앙연구원 정치학과로 부임하였다. 평소 전근대 시기 사법공간에서 펼쳐지는 국가권력에 관심을 두고 있다. 정치학과에서 흔히 관심을 갖는 정치과정이나 비교정치와는 거리가 멀기 때문에, 사법공간 그것도 조선시대 사법공간에서 정치학적 논의를 이끌어 간다는 것이 정치학도의 입장에서는 다소 생경하게 여겨질 수도 있다. 그러나 최근 조선시대 사법공간에 대해 역사학계 및 법사학계에서 다양한 연구 성과물이 나오고 있는데, 그 연구의 핵심은 정치적인 문제다. 올해 초 출간된 원주대학교 이승일 교수의 『근대 한국의 법, 재판 그리고 정의』 (경인문화사)는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근대 전환기를 중심으로 조선시대 사법공간의 정치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어서 주목할 만하다.


이승일, 『근대 한국의 법, 재판 그리고 정의』 (경인문화사, 2021)

이승일, 『근대 한국의 법, 재판 그리고 정의』
(경인문화사, 2021)

이 책이 흥미로운 것은 한국의 19세기를 이해하는 새로운 시각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대한제국기의 역사는 고종과 지배층을 중심으로 한 광무개혁이나, ‘형식적 근대성’에 초점을 두어 왔다. 반면, 이 책은 동학농민군과 민간의 개혁가들과 같은 아래로부터의 개혁과, 이들이 요구하였던 인권과 공정의 가치 즉 ‘실질적 근대성’을 중심에 두고 당시의 사법제도를 평가하려 한다. 이를 통해서 조선말기의 근대적인 사법제도로의 전환이 실패하게 되었던 과정을 새롭게 접근하고 있다.


나아가 이 책에서는 사법공간을 단순히 주체들이 법익을 다투는 공간이 아니라 주요한 정치행위자들이 정치투쟁을 벌이는 공간으로 본다. 저자는 19세기가 오백여 년을 유지해왔던 조선왕조 정의의 원칙, 즉 사회적 재화와 공적 의무의 배분에 관한 사회적인 합의가 해체된 시기라고 한다. 그러나 아직 새로운 배분의 원칙이 수립되지 않았기에 이 정의의 원칙을 둘러싸고 국가와 인민의 격렬한 정치투쟁이 사법공간에서 펼쳐졌다고 생각한다. 이 책의 제 1부 “국가, 어떻게 개혁할 것인가”, 제 2부 “인민, 대한제국의 정의를 묻다”라는 소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저자는 한국의 근대 전환기에 국가와 인민의 정치투쟁 공간으로 사법공간을 제시하고 있다.


다만, 이 책에서 개혁의 요구에 있어서는 주로 민사소송의 제도적, 절차적 측면을 대상으로 삼고 있으면서도 실제 개혁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하는 사례 혹은 황제 권력이 보수화되는 사례로 형사소송의 부정적인 면에 주목하고 있다는 점이 아쉽다. 또한, 실질적인 ‘근대성’의 요구를 부각하기 위해 근대 이전의 조선시대 사법공간에 대한 부정적인 묘사가 강조되는 점도 한계로 지적하고 싶다. 마지막으로 ‘국가와 인민’의 정치적인 투쟁을 설명하면서 사실상 국가는 곧 고종과 보수적인 지배계층으로 등치되고, 인민은 일반 백성이라기보다는 개화파 사상가를 중심으로 한 지식인으로 일반화되고 있는 지점도 더 고찰해 볼 여지가 있다.


이러한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19세기 이후의 개혁사상가들이 내세웠던 ‘정의’의 요구들을 이승일 교수가 치밀하게 논증함으로써 학계에 그 중요성을 환기했다는 점에 대해서는 재론의 여지가 없다. 당대의 지식인들이 법과 권리에 대해 새롭게 이해하고, 정치공동체에 대한 인식을 달리하게 되었으며, 나아가 공정한 재판을 위해 투쟁하였던 생생한 현장의 목소리들을 들으니 전근대 지식인들은 과연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을지가 더욱 궁금해지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