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culture 채널

아미동 비석 마을의 비밀

K-Culture Channel은 한국학사전편찬부 문화콘텐츠편찬실에서 편찬하고 있는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세계한민족문화대전에 수록된 유튜브 영상을 소개하는 2020년 신규 코너입니다. 앞으로 다양한 영상에 담긴 대한민국 각 지역의 문화, 전 세계에 흩어져 사는 한인들의 생생한 이야기를 전달해 드리려고 합니다. 많은 분들의 관심 부탁드립니다.


처음으로 소개해 드릴 영상은 올해 1월 19일에 MBC 예능 프로그램 <선을 넘는 녀석들> 방송에 소개되었던 ‘아미동 비석 마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비석 마을은 부산광역시 서구 아미동 산 19번지 일대에 일제 강점기에 있던 일본인 공동묘지 위에 형성된 마을입니다.

개항 이후, 일본인 공동묘지는 용두산 북쪽 자락에 있었습니다. 1905년 북항을 건설하기 위한 토석을 용두산 북쪽 자락인 복병산에서 채굴하면서, 공동묘지를 아미산으로 옮겼다고 합니다. 1909년에는 지금의 서구 대신동 쪽에 있던 화장장도 아미동으로 이전해 오게 됩니다. 이곳은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명당으로 그 규모가 약 8만 2644.63㎡[25,000평]에 달했다고 합니다.

1945년 광복 이후, 일본인 묘지는 그대로 방치되었는데, 6.25 전쟁 피난민들이 이 묘지 위에 천막을 치고 거처로 살았습니다. 이렇게 집이 묘지 위에 들어서면서, 보일러 공사를 하다 유골함이 나오기도 하고, 귀신을 봤다거나,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는 등의 이야기들이 전해지기도 하였습니다.

일제 강점기 당시 죽음의 공간에서 6.25 전쟁 후 삶의 공간으로 변화한 아미동 비석 마을과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 드리고자 합니다.

아미동 사람들과 비석 이야기, 출처(디지털부산역사문화대전)


내 가족


김순녀할머니 사진

올해로 86세가 되시는 김순녀 할머니는 경상남도 창원시 월포동에서 1년 3녀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장사를 하셨는데, 인물이 참 좋으셨고 입담도 있으셔서 많이 배우지는 못하였어도 똑똑하다는 소리를 듣는 분이셨다. 동네에서 ‘얌전이’로 불렸던 어머니는 위로는 언니와 오빠, 아래로는 2살배기 동생까지 남겨 두고 그만 돌아가셨다. 올해로 꼭 81년째. 당시 할머니 나이는 고작 5세였는데, 너무 어렸던 탓에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크게 없다.

어머니의 빈자리는 언니가 대신할 수밖에 없었다. 무척이나 싹싹하고 야무졌던 언니는 천생 여자였는데, 14세 어린 나이로 홀아버지에 동생 3명까지 돌보며 넉넉지 않은 살림을 꾸려야 하였던 언니의 고단함을 그때는 잘 알지 못하였다. 가족을 위해 어머니를 대신하여 자신을 희생한 언니를 생각하면 아직까지도 가슴이 먹먹해진다. 오래 살지도 못하고 암으로 일찍 세상을 뜬 언니가 할머니는 문득문득 사무치도록 그립다.


“은자 우리 엄마가. 그래 우리 언니가, 내 위에 오빠가 있고. 우리 언니가 욕을 봤지. 14살 묵어 가지고 엄마 죽고 동상 3명 다 키우면서 살림을 살았어. 언니 저거를 못 잊어서. 거의 엄마였지. 예, 말 몬 합니다. 동생을 업어 가지고 허리가 아프다 안 카나. 업어 가지고, 밤낮으로 내리면 울어샀코 젖이 없어 나이 밥을 해 먹이고 밥. 울면 시근이 없어 14살 먹은기 밥을 자꾸 먹이 가지고. 밥을 억지로 먹이 가지고 가가 천식이 있습니다. 그러자 천식이 있어서 한 번씩 병이 나면 숨을 헉 모아 쉬서리. 그래저래 하다가 세월이 좋아 가지고 지가 시집을 가서 며느리 봐 놓으니카네 간호사라. 그 그거 천식 약을 차리 줘 가지고 그래 가지고 묵고는 괘안쿠만. 그래 이적지 저래 살아가 있어요.”


‘가시나가 배우면 못 쓴다’고 하시던 아버지 때문에 4남매 중 유일하게 학교에 다녔던 오빠도 5학년이 되던 해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그만두었다. 학교를 그만둔 오빠는 서당을 다니며 한문을 조금 배웠는데, 학교를 길게 다니지는 못하였어도 천자문까지 뗀 똑똑한 오빠였다. 시절이 시절인지라 이후 남자인 오빠가 맞닥뜨려야 한 현실은 더욱 험난하였는데, 일제 강점기 말 극으로 치닫던 전쟁의 광풍을 오빠 역시 피하지 못하였고 광복되고 나서는 6·25 전쟁에 참전하였다가 구사일생으로 목숨만 겨우 부지한 채 돌아왔다. 혼기를 놓쳐 27세에 겨우 결혼을 할 수 있었는데, 6·25 전쟁 참전 당시 팔이며 다리며 몸 이곳저곳에 박힌 파편을 무슨 ‘삶의 흔적’이라도 되는 냥 죽을 때까지 끼고 살다가 고이 가진 채 세상을 떠났다.


“우리 오빠도 군인 댕기며 고생 많이 했어요. 6·25 사변에 대동아 전쟁 때. 일제 시대 때 군에 나갔지 6·25 사변에 나갔지 4·19 혁명에 나갔지. 고생 많이 하다가 파편 맞아서 그것도 못 빼고 안 죽었소. 말 몬 하요.”.


정신대를 피해서 한 첫 번째 결혼


김순녀할머니 사진

할머니는 16세 어린 나이에 결혼을 하셨다. 전쟁이 막바지로 치달으면서 일제의 인력 동원은 전 방위로 확대되었고 어린 학생에서부터 여성들까지 전쟁터로 내몰렸다. ‘정신대’가 무엇인지 그때는 잘 몰랐다. 소문에는 “처녀의 기름을 짜 가지고 기계에 사용하면 싸움에 이긴다”고 해서 처녀들을 끌고 간다는 무서운 얘기들이 떠돌았다. 징용을 피하기 위해 자신의 손가락을 자르고 끌려가면 죽는다는 정신대로 보낼 수가 없어서 딸들을 일찍 결혼시키던 시절이었다. 할머니 역시 정신대로 끌려가지 않기 위해 일찍 시집을 갔는데, 남자가 뭔지 여자가 뭔지도 모르는 어린 나이에 시집을 가서 첫날밤 시어머니 품만 그렇게 파고들었다 하신다.


“말 못 하요. 그때는 사는기 사는기 아이요. 참 그때는 행핀없었요. 아 요새 세월이 이래 살아서 그렇지. 그때는 일제 시대 정신대 안 뽑혀 갈라고 일본놈의 정신대에 안 뽑혀 갈라고 숨어서 숨어서 있다가, 또 처녀는 뽑아 가고 각시는 안 뽑아 간다 해서 결혼을 또 16살 먹었을 때 결혼을 시켜 놓으니…….”


결혼을 한 할머니는 부산으로 건너와 영도에서 잠깐 살았다. 그곳에서 광복을 맞았는데, 광복이 된 다음 날 영도 시장 광경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17살에 8월에 해방이 됐다 아이요. 8월 15일 밤인데, 딱 밤 1시 딱 10분인가 요래 되가지고 눕어 자이카네. 그전에는 텔레비도 없고 라디오 쪼매는 거 캐 놓고 머리맡에 놔 놓고 전장 때가 돼서 누워 자이 일본놈 손들었다 이런 소리가 딱 나이. 배겉에 나가이카네 뭐뭐 불이 환하게 켜 가지고 마 굉장하데요. 해방됐다고. 아이고, 그질로 그렇게 탁 튀어 나가니카네 시장에 가이카네 별기 별기 다나와. 그리 귀하던 쌀도 천지고 깨도 천지고 땅콩도 천지고 보리쌀도 천지고. 신발도 그리 숨켜 놓고 신발 한 켤리 없어 짚신 삼아 신고 시집을 갔는데 신발 공장 신발이 천지고. 일본놈들 다 차지하고 있던 거 다 내삐리고 맞아 죽을라고 안 맞아 죽을라고 줄행랑한 거 도망가고 숨어 가지고. 뭐뭐 해방됐다 카이 일본놈 손들었다고 하이 마 피해 가지고 마 형편없이 되어가 있대요. 그래 저거 살던 살림 다 내삐리고 일본 사람들 그때, 어이구 그놈들 지독합니다.”


그러나 광복의 기쁨도 잠시, 미국이다 소련이다 세계를 주름잡던 열강의 간섭으로 좌우가 대립하던 불안한 정국 속에서 6·25 전쟁이 발발하였고, 전쟁에 참전한 남편은 한 장의 편지로만 소식을 알려온 채 돌아오지 않았다. 할머니 나이 21세 때였다. 남편과의 사이에는 딸이 하나 있었는데, 뒤에 재혼을 하면서 연락이 끊어진 후로는 지금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생사조차도 모르겠다.


“결혼해서 바로 갔지, 바로 갔지. 올케 몇 년 못 살았어요. 연에 죽었다카는 전사 편지가 안 옵니까. 아이고 얘기할라면 끝도 없고 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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