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학 포럼

도(道)와 기(器), “한국사상가” 발견 연구 시리즈의 의의를 돌아보며

정재윤 사진
이창일
연구처 연구정책실 책임연구원

한국의 사상(思想)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흔히 드는 비유가 있는데, 이는 한국의 사상 전체를 하나의 산맥으로 보는 것이다. 산맥은 산봉우리들이 쭉 줄지어 이어져서 사방으로 뻗어나가 이루어진 크고 작은 산줄기가 합해진 것이다. 연구자들은 한국의 사상이라는 전체 산맥을 모두 다루기보다는 산줄기 중간 중간에 우뚝 솟은 봉우리를 골라내어, 그것을 통해 산맥의 특성을 살핀다. 이 봉우리들이 이른바 명산이다. 명산은 산맥의 기운이 한 곳에 응축되어 드러난 빼어난 정기이다.


이런 ‘산맥’의 연구 방법론은 한국의 사상 연구에 정형적인 틀이 되었다. 통사론적 배열 속에서 저 위로부터 원효와 의상이라는 이름 높은 산봉우리를 거쳐, 지눌, 이황과 이이, 이어 다산을 거치면 산맥 전체가 드러난다. 여기에 또 다른 봉우리들을 사이사이 끼워 넣으면 산맥의 전체가 더욱 위용을 갖추게 된다.


사상은 무형(無形)이라서 그 자체로는 다루기 어렵다. 다만 그것을 구현한 인물을 통해서 드러난 유형(有形)의 형태를 다룰 수 있을 뿐이다. 옛 어법으로 말하자면, 사상은 도(道)이고 인물은 기(器)이다. 사상의 연구는 기(器)를 통해서 도에 들어가는 것이다. 기(器)는 인물이 남긴 저작과 그가 영향을 끼친 후대인들의 또 다른 저작들이다. 그런데 이 저작들은 맥락이 망각되거나 단절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정적인 평면성을 띠고 있기 쉽다. 사상을 연구하는 사람은 이 저작들의 정적인 평면성을 극복하고 살아 움직이는 동적인 입체성을 회복하기 위해서, 납작하게 눌려져 있는 저작에 생기를 불어 넣어 통통한 것으로 만든다. 이를 해석이라고 부르며, 해석을 통해서만 비로소 도에 다가갈 수 있다.


해석을 위해서는 때로는 글자 밖에서 머물러야 하고, 시간의 밖에서 그 인물의 흔적을 살피거나, 그 인물이 살다간 역사의 중중무진(重重無盡)한 관계를 모두 펼쳐내야 한다. 여기서 실력의 차이가 생겨난다. 도(道)를 아무나 만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우리 연구원은 오래 전부터 한국의 사상 가운데 수려한 봉우리임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조명되지 않은 인물을 발굴하는 연구를 하고 그 결과물을 출판하였다.


이 봉우리들에 대한 조망은 “한국사상가의 새로운 발견”이라는 다소 소박한 제목으로 4회 정도 진행되었다(1993년~1998년. 출판기준). 첫 번째는 병와 이형상(李衡祥)과 호산 박문호(朴文鎬)였고, 두 번째는 포저 조익(趙翼), 세 번째는 면우 곽종석(郭鍾錫), 다섯 번째는 외암 이간(李柬)이다. 이 인물들은 조선의 이름난 선비이며 한국 사상계의 수려한 봉우리임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 찾는 이가 거의 없다. ‘사단칠정논쟁’과 더불어 거국적인 학술논쟁이었던 ‘인물성동이론’의 주인공인 외암 이간의 경우는 그 이름도 생소하여 어떤 이는 한자를 ‘이속’으로 잘못 읽는 불경한 일도 잦았다.


이 시리즈는 새롭게 조명되는 사상가들을 입체적으로 해석하기 위해서 학제적 연구 방법을 따랐고, DB가 갖추어져 있지 않았을 때의 저술의 원문을 부록으로 붙이기도 했다. 출간된 연구서들은 당시 학계에서 흔치 않은 연구결과였기 때문에, 여러 대학과 연구 기관들은 이러한 방식을 모방해서 새로운 봉우리들을 발굴하여 출간하기 시작했다. 그런 연유에서인지는 몰라도, 우리 연구원에서는 더 이상 사상가 발굴 시리즈를 이어가지 않았다. 현재는 이런 과정을 거쳐서 새롭게 조명된 한국 사상의 이름난 인물들에 대한 연구서들이 매우 많이 출간되어 있는 실정이다. 아마도 우리 연구원의 노력이 촉매가 되었을 것이라고 짐작된다.


한국 사상이라는 산맥에 위치한 다양한 봉우리들이 차츰 그 모습을 갖추어 가고 있지만, 여전히 오르지 못한 봉우리들이 많다. 또 한 번 올라갔다고 해서 그 산을 다 아는 것도 아니다. 금강산을 가리키는 여러 이름이 있듯이 산은 철마다, 바라보는 위치마다, 산을 오르는 자들의 심경에 따라, 그 모습을 천변만화로 바꾼다. 한국 사상이란 한국의 정신과 뜻을 찾는 일이다. 도는 기가 아니고는 알 수 없기 때문에 한 번의 연구로는 도를 짐작조차하기 어렵다. 새로운 관점으로 이전의 봉우리를 다시 찾는 일은 사상사 연구에서 흔한 일이다. 이러한 연구가 대학과 연구기관에 또다시 어떠한 영향력을 미칠 것인지 우리 연구원의 저력이 기대된다.

gulgun@aks.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