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연 사람들

감옥생활 과정에서 살아남게 된다면 남조선으로 탈출하겠다는 결심을 품게 되었죠

이번 인터뷰를 위해 멀리 나주 혁신도시로 왔습니다. 소개할 분은 한국농어촌공사 산하 농어촌연구원에서 근무하고 있는 김혁 박사입니다.


김혁 사진

독자들을 위한 자기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십니까. 한국농어촌공사 농어촌연구원에서 근무하고 있는 김혁 주임연구원입니다. 농어촌연구원이 위치한 나주 혁신도시는 2014년경부터 주요 공공기관들이 자리 잡기 시작한 소규모 도시입니다. 혁신도시의 주민들 중 상당수는 공공기관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많고 건물들이 새롭게 들어서 신도시의 분위기입니다. 최근 코로나19로 인해 서비스 업체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 부분도 다른 지역과 크게 다르지는 않습니다.

저는 지금 농어촌연구원에서는 북한의 농업과 관련된 연구를 맡고 있습니다. 남ㆍ북한 교류협력을 대비한 북한의 농업 실태와 현황, 농업교류협력을 위한 다양한 정책적, 현실적 대안들을 만들거나 검토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북한에서의 경험과 한국학대학원에서의 학문적 트레이닝을 농어촌연구원에서 실무에 적용하고 있습니다.


북한에서 나고 자랐다고 들었습니다. 사실인지요?


네, 저의 고향은 함경북도 청진시입니다. 검푸른 동해바다를 끼고 있는 해안도시로 북한의 3대 도시 중 하나입니다. 청진시 인구는 70만 여명 규모로 평양(300만), 함흥(80만) 다음으로 북한에서 가장 큰 도시입니다. 여기에 북한 철강 생산의 32%를 담당하는 철강산업 도시이며, 남포 다음으로 큰 배를 만들 수 있는 조선업 도시이기도 합니다.

제가 생활했던 시기는 경제위기가 한창이던 시절로 수많은 청진시민들이 아사로 사망하거나, 식량을 구하기 위해 전국을 유랑하던 시절이었습니다. 국가에서 제공해야 할 식량 배급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수많은 노동자들이 공장을 이탈하거나 아사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현재도 도시 주변 산들에는 그 당시 아사한 주민들의 묘가 촘촘하게 들어서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한국으로 오게 된 동기나 과정 등에 대하여 간단히 말해 주시겠습니까?


저의 어머님은 1986년에 일찍이 병으로 돌아가시고 경제위기가 확산되던 1996년에는 식량을 배급받지 못해 어려운 시간을 보내던 아버님도 아사로 명을 달리하셨습니다. 모든 것이 계획에 따라 수요와 공급이 결정되는 계획경제 속에서 배급이 지급되지 않으면 먹을 것을 구할 수 없고 또 공장과 일터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불법이었기 때문에 아사하는 사람들이 더 많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와 형은 아버님의 손에 이끌려 1995년 말에 고아원에 들어가서 생활했습니다. 먹을 것이 부족해 더 이상 우리형제를 키워낼 자신이 없으셨던 아버님의 마지막 선택이셨죠. 그 다음해에 결국 아버님은 목숨을 잃으셨고요.

저와 형은 서로를 의지하며 2년간 고아원생활을 했습니다. 물론 고아원이라고 해서 먹을 것이 풍족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영양실조와 그로 인한 온갖 질병들이 고아원을 휩쓸었고 수많은 원아들이 목숨을 잃어야 했죠. 그런 고아원에서 교직원들의 일손을 도와주고 먹을 것을 얻어먹거나, 다른 고아들과 함께 장마당이나, 밭에 나가 몰래 훔쳐 먹으면서 목숨을 연명하기도 했습니다.

나이가 차면 당연히 고아원을 나와야 했고 그렇게 형과 저는 헤어졌습니다. 저는 98년에 고아원을 나와 17세(북한은 만17세부터 성인) 미성년인 상태에서 임업사업소에서 미성년 채벌노동자로 일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먹을 것이 변변치 않아 생활하기는 어려웠습니다.

먹을 것을 구하러 중국 국경을 넘나들다가 안전부(경찰)에 체포되어 3년형을 선고받고 1998년 늦겨울부터 2000년 7월까지 약 1년 8개월간 수감생활을 해야만 했습니다. 그때 제 나이가 17세였고 감옥생활 과정에서 살아남게 된다면 남조선(남한)으로 탈출하겠다는 결심을 품게 되었죠. 정확히 어떤 세상인지도 몰랐지만, 저에게야 부모도 없고 하나뿐인 형은 행방불명 상태였으니. 그래서 더더욱 탈북 할 마음을 쉽게 굳힐 수 있었습니다.

2001년 중국지역 내몽골 사막을 건너 몽골을 통해 한국으로 입국했습니다. 물론 사막을 건너는 과정도 순탄치는 않았지만 운이 좋아 목숨을 부지해 한국까지 무사히 들어 올 수 있었습니다. 그때가 2001년 911테러가 발생한지 2일이 지난 13일이었습니다.


한국학대학원에 입학하기 전의 한국 생활은 어땠나요?

처음 한국에서 했던 일은 전국을 여행하는 것이었습니다. 정착금의 절반인 1,000만원을 3개월이라는 짧은 기간 여행경비로 모두 소진할 만큼 남한사회가 궁금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돈의 가치나, 모르는 사람에게 질문하는 것부터 교통편을 이용하는 것까지 모든 것이 저에게는 새로웠고 남한정착의 기반이 되었습니다.

2002년에 충남직업전문학교에서 1년간 자동차 정비기능사를 공부했고 이후 2년간 자동차 정비 일을 했습니다. 2006년부터 공부를 하고 싶어 가톨릭대학교 국사학과에 입학해 현대사를 전공했고 2010년부터 2012년까지 서강대 정책대학원에서 북한통일정책을 전공했습니다. 이후 통일교육원 산하 통일교육센터 전문강사로 2년간 근무하다가 2014년에 한국학대학원에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처음 한국생활을 할 때는 즐거움도 많았지만, 그만큼 어려움도 많았습니다. 모든 것을 국가가 결정하는 북한과 달리 남한에서는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해야 하니 혼란스럽기도 하고 또 혼자다보니 외로움으로 우울증에 시달리기도 했습니다. 점차 하나씩 이루어 내면서 사라지기는 했지만, 그 과정은 상당히 어려웠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정치학을 전공했다고 들었습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은 어떻게 알게 되었나요?


한국학대학원 졸업식, 스승님과 함께

한국학대학원 졸업식, 스승님과 함께


저의 지도 교수님이신 이완범 선생님과 우연치 않게 학술발표장에서 토론자로 만나면서 한국학대학원과 연을 맺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한국학중앙연구원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이 없었는데 이완범 선생님을 만나면서 알게 되었고 발표 토론장에서 느꼈던 이완범 선생님의 인품이나 지식을 존경하게 되었고, 그것이 정치학을 전공하게 된 배경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완범 선생님은 학생들을 편하게 해주시고 학생들의 지적 호기심이나 연구를 적극적으로 지지해주시는 분입니다. 따라 오기를 바라시기 보다는 스스로 공부하는 과정에서 깨우치기를 바라셨고 제자가 원하는 분야에 대해 함께 고민하시고 자료를 찾아주시는 등 누구보다도 열정적인 분입니다. 지금도 이완범 선생님께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대학원 생활을 함께한 동생 린위레악과 스키장에서

대학원 생활을 함께한 동생 린위레악과 스키장에서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의 생활에 대해 이야기해 주시겠습니까?


가장 기억에 남는 추억이라고 한다면 자칭 ‘두더지클럽’을 만들어 늦은 시간에 공부를 마치고 편의점에서 맥주 한 캔, 라면 1그릇을 놓고 수다를 떨던 기억입니다. 수년간 따뜻한 여름 모기의 성화도, 추운 겨울 칼바람도 아름다운 추억으로 간직될 만큼 두더지클럽의 열정은 대단했으니까요. 두더지 같이 방에서 나오지 말고 공부하자는 취지에서 시작된 모임이 지금도 계속되는지 저도 궁금해지네요. 하하하

또 기숙사생활도 기억에 남습니다. 함께 생활하던 외국인 학생들과 음식을 만들어 나누어 먹었던 경험과 교직원들과 함께 운동장에서 축구를 즐겼던 기억입니다. 각자 자기 나라의 음식을 만들어 나누어 먹었던 기억이나 축구 중에 의욕이 앞서 발목을 삐셔서 시작 5분 만에 축구를 포기하신 교수님 모습도 특별한 추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한국학대학원에서의 학문적 훈련이 지금 하는 업무에 도움이 되었다면 어떤 점이 있는지 알려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대학원에서의 학문적 훈련이라고 한다면 수업시간 많은 자료들을 읽고 공부했던 것이 지금의 남북관계나 북한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기초자산이 되고 있습니다. 현대 정치나 북한 정치, 남북관계 등에 관한 내용을 많이 읽은 것이 현재 업무를 수행하는 데 기본적인 지식자산이 되고 있고 수업을 통해 배운 분석방법은 업무 수행에서 정확하고 합리적인 해답을 찾아내는데 중요한 자산이 되고 있습니다. 특히 여러 과제의 연구보조로 활동했던 경험은 현재 연구를 수행하는 데에 따른 행정적인 어려움에 대처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습니다.


혹시 독자분들에게 하시고 싶은 말이 있다면 부탁드립니다.


늘 읽고 나누는 시간을 가지기를 바랍니다. 공부하는 과정에서 읽은 내용들을 온전히 자기 것으로 체득하려면 주변 사람들과 끊임없이 대화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상대방의 의견을 듣는 것이 자신도 모르게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사고를 가질 수 있는 자연스러운 방법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두더지클럽에서 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두더지클럽! 화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