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사람의 향기

존재와 생명의 근원을 사색하다

김백희 사진
김백희
장서각 왕실문헌연구실 책임연구원
송시열 선생의 글씨

송시열 선생의 글씨「이조양조」(『우암 송시열』, 국립청주박물관, 2007)

우리의 선조들이 즐겨 읽었던 책 『장자』「지락(至樂)」편에 “以鳥養鳥(이조양조)”의 이야기가 있다. “새의 본성에 맞게 새를 기른다.”는 뜻이다. 우주의 삼라만상은 무위자연(無爲自然)의 법칙에 따라서 잘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인간의 의도와 목적을 가지고 억지로 훼손하지 말아야 한다는 깊은 깨우침이 담긴 말이다. 새를 잘 기르는 방법은 새의 삶에 간섭하지 않고 내버려 두는 것이다.

새를 기른다는 명목으로 새를 잡아다 새장에 가두어 놓고, 성인으로 추앙받는 요(堯)임금과 순(舜)임금의 음악을 들려주면 새는 놀라서 겁을 먹는다. 그리고 황제의 진수성찬을 차려놓고 새를 먹이려하거나, 고급 비단으로 지은 인간의 옷을 입혀서 따뜻하게 가두어 놓는다면 새는 스트레스를 받아서 그냥 죽고 말 것이다. 사람의 향락을 위한 욕심을 충족시키고자 마구잡이로 새를 잡아 기르거나 죽이는 것은 새의 존엄한 생명을 간섭하고 파괴하는 인간의 오만과 폭력이며, 인간중심주의적 적폐다. 일찍이 당(唐)의 시인 백거이(白居易: 772년-846)는 「鳥(조)」라는 시에서 다음과 같이 읊었다.

誰道群生性命微 누가 생물의 본성을 미천하다 말하나,
一般骨肉一般皮 똑같이 뼈와 가죽이 있다네.
勸君莫打枝頭鳥 님께 권하노니 가지 끝의 새를 건드리지 마시게,
子在巢中望母歸 새끼가 둥지에서 어미를 기다린다네.

새는 새의 본성대로 자연의 숲을 자유롭게 날아다니며 먹이를 잡고 노래하고, 나뭇가지나 마른 풀로 얼기설기 엮은 둥지 속에서 비바람을 맞으며 살아야 잘 살 수 있다. 사람이 살아가는 방식으로 새를 기르면 죽는다. 그러나 새의 본성에 맞게 살도록 내버려 두면 생기 넘치게 주어진 생명을 누리다가 간다. 장자의 충고는 나라와 백성을 다스리는 것도 이와 같다는 것이다. 장자가 보기에 사람들이 이루고자 하는 본성을 조화롭게 실현하며 살도록 그냥 내버려 두면 문제가 없다. 제 길대로 잘 어울려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에 권력과 이념의 칼을 앞세운 폭력적 개입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장자의 혜안(慧眼)으로 볼 때, 자기의 이익과 권력을 독점하고 지속시키기 위해서 인위적으로 자연적 본성을 왜곡시키는 모든 폭력과 부조리의 세계구조를 혁파하는 것이 자연의 본성을 실현하는 길로 가는 첫걸음이다. 이기적 욕망의 폐쇄적 왜곡을 무너뜨리고, 나아가 무위자연의 법칙을 거스르는 모든 적폐를 청산하는 것이 바른 길이요 도(道)이다. 무위자연의 길을 따르는 것이 인간과 만물 생명의 자유로운 운행과 평화로운 공존의 관계를 회복하는 유일한 길이다. 우주자연의 삼라만상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이 흐르는 지속적 운행의 한 과정에 있는 흔적일 뿐이다. 조선시대의 일류 지성인으로 칭송받는 서경덕(徐敬德, 1489~1546)은 『화담집(花潭集)』을 남겼는데, 「유물(有物)」이라는 시에서 삼라만상의 존재 근원에 대한 철학적 통찰을 읊고 있다.

有物來來不盡來 존재가 나고 또 나도 다함이 없으니,
來纔盡處又從來 다하였나 싶더니 어디선가 또 나오네.
來來本自來無始 시작도 없이 나고 또 나거니,
爲問君從何所來 그대는 아시나, 어디에서 오는지?

有物歸歸不盡歸 존재가 가고 또 가도 다함이 없으니,
歸纔盡處未曾歸 다하였나 싶다가도 다 간 적이 없도다.
歸歸到底歸無了 끝도 없이 가고 또 가나니,
爲問君從何所歸 그대는 아시나, 어디로 가는지?

동아시아의 전통을 지배하는 다양한 지식과 사상의 계보가 있다. 주류는 유교와 불교와 도교이다. 그리고 수천 년 동안 각각의 독특한 민족문화에 면면히 계승되어 내려오는 고유의 사상과 정신이 있다. 이러한 정신문화의 체계들은 저마다 고유한 문화적 사유체계의 특성을 지니면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성장해 왔다. 역사의 전면에서 문명과 사유를 구상하고 견인하는 주체로서, 유불도의 사유방식은 인간의 삶을 위로하고 힘을 기르는 존재론적 안식처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와 같은 전통시대의 사유 속에는 인간과 자연을 동일한 실체로 이해하는 생태학적 사유가 심연에 자리 잡고 있다. 존재와 생명의 근원을 사색하는 동아시아의 전통에서 볼 때, 새와 인간의 양생(養生) 방법은 동일한 것이다. 옛사람들의 지혜는 나지막하지만 명시적으로 우리에게 생명의 평등을 속삭인다. 우리는 우주변화의 풍랑 속에서 잠시 흔들리며 살다가 우주로 무화되어 돌아가는 삼라만상의 일부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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