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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의 문화를 찾아서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홈페이지 바로가기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은 전국 230개 시·군·구 지역의 다양한 향토문화 자료를 발굴․수집, 연구․분석하여 체계적으로 집대성하고, 이를 디지털화하여 인터넷을 비롯한 다양한 정보 통신 매체를 통해 서비스하며, 이용자가 또 새로운 지식의 생산자가 되는 순환형 지식정보시스템을 구축하는 대규모 문화 콘텐츠 편찬사업입니다. 이는 그간 미진했던 전국의 향토문화 자료의 보존 및 계승의 대책 마련과 체계적이고 종합적인 지역문화 정리사업의 필요성에 의해 추진되는 사업으로서, 지식·문화산업의 기반을 마련하고, 지역 간 균형 발전과 지역 경제 활성화에 기여하며, 인터넷을 통해 전국 향토문화의 세계화를 이루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Tip.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이란? 디지털포천문화대전 홈페이지 바로가기 [사진] 명성산 [사진] 간송이 지켜낸 국보 문화재
신윤복의 "미인도" / 김정희 "수식특격" / 청와 백자 난국초충문병 국보 294호 / 청자 상강여지원앙문정병 국보 66호 / 청자 상강운학운매병 국보 68호 [사진] 서울 방학동 전형필 가옥 정면 [바람과 풀의 시인, 김수영] 시인 김수영(金洙暎)[1921~1968]은 등단 초기에는 다소 난해하고 실험적인 언어를 구사하다가 6·25 전쟁을 지나며, 자신의 기교에 현실 참여적 태도를 지양하여 종합한 빼어난 시들을 잇달아 발표함으로써 1960년대 대표적 시인으로 자리 잡았다. 1950년대 중반부터 서울시 도봉구 도봉동 소재 본가를 왕래하며 시작에 몰두하였으며, 사후에도 도봉동 본가 옆에 안장되었다. 김수영은 1921년 서울시 종로구 관철동 158번지에서 500석 지기 무관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여러 대에 걸쳐 벼슬을 한 것으로 확인되는 김수영의 집안은 부유한 편이었으나 일제 지배에 적응하지 못하고 몰락해 가는 중이어서 생애 내내 여러 곳을 옮겨 다녔다. 어의동 공립 보통학교[현 효제 초등학교]를 졸업하는 해에 장질부사 합병증으로 고생하는 바람에 어렵게 선린 상업 학교로 진학하여 1942년에야 졸업하였다. 그 후 일본 도쿄로 건너가 잠깐 연극을 공부하였고, 해방 전 해에는 조선 학병 징집을 피해 가족이 옮겨간 중국 만주 길림성으로 건너가 역시 연극에 매진하였다. 바람과 풀의 시인 김수영 동영상 바로보기 해방 후에 귀국하여 연극을 버리고 시인으로 등단한 뒤에 1968년 귀가 길에 집 앞에서 좌석버스에 치여 생을 마감하기까지 김수영은 당대 문단을 주도하는 시인이자 번역가, 산문가로서의 삶을 치열하게 살았다. 6·25 전쟁이 발발하자 북한 의용군으로 징집되어 북으로 끌려갔다가 탈출하였지만 경찰에 붙들려 1953년까지 포로수용소 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김수영 시인은 1954년 가족과 재회한 후 서울시 중구 신당동에서 살다가 1955년 6월 마포구 구수동으로 분가하여 번역과 양계 일로 생업을 삼았다. 이 무렵 어머니를 비롯한 나머지 가족들은 도봉구 도봉동 산107-2번지[도봉구 시루봉로 23나길 36-11번지] 선영 근처로 이주하여 살았다. 이 시기 시인은 본가에도 계사를 만들어 관리하는 등 수시로 도봉동 본가를 찾으면서 작품 활동을 하였다. 현재 그가 태어난 관철동 집, 어린 시절 살았던 종로 6가 집, 구수동 집 등은 재개발로 남아있는 곳이 없는 상태이다. 따라서 도봉동 본가 자리만이 시인의 체취를 느낄 수 있는 유일한 곳이 되었다. 1968년 1월에 『사상계』에 산문 「지식인의 사회 참여」를 발표하였다. 사후인 1974년에 시선집 『거대한 뿌리』, 1975년에 산문 선집 『시여, 침을 뱉어라』, 1976년에 시집 『달의 행로를 밟을지라도』와 산문집 『퓨리턴의 초상』이 간행되었다. 1981년에는 민음사가 주관하여 그의 전집을 두 권으로 간행하였고, 이를 계기로 ‘김수영 문학상’도 제정되었다. 1945년에 「묘정의 노래」[『예술 부락』]로 등단하였고, 1949년에 신시론 동인지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에 참여하였다. 1957년에 합동 시집 『평화에의 증언』에 참여하였고, 1959년에 생전의 유일한 시집인 『달나라의 장난』을 간행하고 ‘한국 시인 협회상’을 받았다. 김수영의 묘는 처음에 서울시 도봉구 도봉동 산 107-2번지[도봉구 시루봉로 23나길 36-11번지] 선영 근처에 있었는데, 1991년 4월 어머니의 죽음과 함께 유족들이 합의하여 파묘하였다. 시신은 화장한 후에 습골하여, 북한산 국립 공원 지역 내 도봉 서원 앞으로 시비(詩碑)를 이건할 때에 그 아래 묻었다. 따라서 현재는 그의 시비가 곧 묘소인 셈이다. 김수영이 죽은 이후에 그를 기리는 많은 평론가와 출판사들이 나서서 다양한 선집과 전집을 잇달아 간행하였다. 특히 민음사는 전집 출간을 계기로 ‘김수영 문학상’을 제정하고, 김수영이 태어난 날인 11월 27일에 제1회 ‘김수영 문학상’ 시상식을 열었다. 1981년의 제1회 수상자는 『저문 강에 삽을 씻고』의 정희성 시인이었다. 2001년 9월에는 시인 최하림이 『김수영 평전』을 출간하였고, 10월 20일에는 국가가 김수영의 문학 활동을 기려 금관 문화 훈장이 추서되었다. 2013년 11월 27일 서울시 도봉구 방학동에 ‘김수영 문학관’이 개관하였다. 김수영 문학관 연결 항목 [사진]도봉산 입구의 김수영 시비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사진]김수영 문학관 제1 전시실 모습 옹기 민속 박물관(甕器民俗博物館)은 우리 조상들의 지혜와 삶이 담겨 있는 옹기의 뿌리를 찾고, 그 발자취를 더듬어 현대 문명에 의해 퇴색되어 가고 있는 옹기 문화를 재조명하고, 더불어 우리 민족만이 갖고 있는 옹기와 민속의 맥을 보다 깊이 있게 연구하여 현장 교육의 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고(故) 정병락이 사재를 털어 1991년 4월에 고려 민속 박물관을 설립하였으며, 1993년 3월 25일에 옹기 민속 박물관[문화 체육 관광부 등록 제48호]으로 명칭을 변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조선 시대 옹기와 옹기 민속 박물관에 얽힌 이야기] 옹기(甕器)는 약토(藥土)라는 황갈색의 유약을 입혀 구운 토기를 통칭하여 일컫는 말이며, 옹(甕·瓮)은 ‘독’이라는 우리말의 한자어이다. 옹기는 꿀단지에서 똥 단지에 이르기까지 우리 살림살이와 삶을 요모조모 담아내는 데 없어서는 안 되는 그릇이다. 이렇듯 옹기는 갖가지 크고 작은 모양을 한 채, 장독대를 지키며 각종 부식 저장고 역할을 하는가 하면, 우물가의 물동이에서 부엌의 조리 기구를 거쳐 밥상 위의 식기와 묘지 속에서 주검을 갈무리하는 옹관묘의 관에 이르기까지 그 쓰임새가 다양하다. 옹기 민속 박물관 소장 굴뚝 연결항목
디지털도봉구문화대전 홈페이지 바로가기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은 전국 230개 시·군·구 지역의 다양한 향토문화 자료를 발굴․수집, 연구․분석하여 체계적으로 집대성하고, 이를 디지털화하여 인터넷을 비롯한 다양한 정보 통신 매체를 통해 서비스하며, 이용자가 또 새로운 지식의 생산자가 되는 순환형 지식정보시스템을 구축하는 대규모 문화 콘텐츠 편찬사업입니다. 이는 그간 미진했던 전국의 향토문화 자료의 보존 및 계승의 대책 마련과 체계적이고 종합적인 지역문화 정리사업의 필요성에 의해 추진되는 사업으로서, 지식·문화산업의 기반을 마련하고, 지역 간 균형 발전과 지역 경제 활성화에 기여하며, 인터넷을 통해 전국 향토문화의 세계화를 이루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홈페이지 바로가기 TIP)『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이란? 이와 같이 서민의 그릇으로 자부해 온 다양한 옹기가 이제는 현대 문명에 밀려 우리의 생활 속에서 사라져 가고 있으며, 박물관 진열장에서나 전시되어 옛 조상들의 삶의 궤적을 보여 주고 있다. 손때 묻은 옹기의 숨결을 느끼기 위해서는 옹기 민속 박물관에나 가야 볼 수 있는 것으로 전락한 상태였으나, 최근 자연 친화적인 삶을 추구하는 현대인들에게 새롭게 주목받고 있기도 하다. 옹기 민속 박물관은 옹기 200여 점을 비롯하여 토기 100여 점, 민속 생활용품 100여 점, 농기구 100여 점, 석조물 100여 점 등 총 3,000여 점의 민속품을 소장하고 있다. 옹기 민속 박물관은 옹기 전시실[지하 1층], 단청 전시실[지상 1층], 민속 생활용품실[지상 2층] 및 야외 전시실 등 총 4개 전시실과 민속 체험관으로 이루어져 있다. 전시는 우리 조상들이 사용해 왔던 생활 용기인 옹기 200여 점을 직접 진열하고 있으며, 각 사찰과 5대궁 4대문 안에 있는 단청 문양 1,000여 종을 지상 1층 천장에 그려 넣어 조선 시대의 단청을 감상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사진] 옹기 민속 박물관 전시실 모습 9. 청학동(靑鶴洞) 영평 8경 중 제8경으로, 경기도 포천시 영중면 금주리에 있는 계곡이다. 일동면으로부터 흘러내려온 물을 암석 병풍과 같은 형태의 절벽이 둘러싸고 있다. 큰 바위와 절벽이 있이 하천과 함께 어우러진 경치를 보여준다. 청학동의 명칭과 관련해서는 설화가 전한다. 어떤 가난한 효자가 아버지의 시신을 모시고 이장하기 위해 자리를 잡고 한 삽을 뜨는 순간 그 속에서 청학 한마리가 나와 슬프게 울며 창공에 원을 그리면서 날아가서 효자가 그곳에 산소 쓰기를 단념했다고 한다.
암벽 낭떠러지에는 ‘청학동(靑鶴洞)’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사진] 청학동 옹기 민속 박물관 소장 물박 연결항목 옹기 민속 박물관 소장 어미 독 연결항목 옹기 민속 박물관 소장 장군 연결항목 옹기 민속 박물관 소장 물박 연결항목
이 밖에도 장인의 솜씨가 담긴 목공예, 짚풀 공예, 종이 공예, 금속 공예품, 관혼상제·무속·신앙 용품 등의 민속 생활용품과 각종 농기구를 전시하고 있어 우리 선조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야외에는 석조물과 장독대 등이 전시되어 있다. 또한 옹기 민속 박물관은 어린이와 가족을 대상으로 도예 교실, 민화 교실, 다도 교실 등 체험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또 옹기와 전통 문양 관련 특별전을 개최하여 다양한 전통문화를 접할 수 있게 하고 있으며, 옹기 관련 도서를 지속적으로 발간하고, 현대 옹기장이들의 옹기 작품도 전시·판매하고 있다. 옹기를 비롯한 소장 자료는 등록 자료 300여 점과 미등록 자료 3,000여 점이 소장되어 있다. 한민족의 정서를 담고 있는 옹기는 먹거리를 위해 곡식, 장류, 김치, 젓갈류 등을 보관하던 대표적인 그릇으로 지방별로 그 형태를 달리한다. 서울·경기 지역은 햇빛 차단이 남쪽보다 덜해 옹기의 주둥이와 밑바닥의 너비가 비슷하고 중간이 배부르며 약간 뾰족한 형태이다. 충청도는 대류 현상에 맞춰 이 보다 중간이 더 불룩한 타원형이며, 강원도는 이동의 편리성을 띠고, 해산물이 많아 작으면서 잘 깨지지 않게 하기위하여 배 부분이 거의 일직선이거나 주둥이가 아주 좁은 형태이다. 전라도는 농경지가 발달해 크고 둥글며 배 부분보다 어깨 부분이 더 불룩한 형태이다. 오지그릇의 제조가 활발했던 경상도는 내륙 지방과 달리 해안선을 따라 독의 유통이 많아 옹기의 어깨 부위가 발달되어 있고, 입 지름과 밑 지름이 좁다. 옹기 민속 박물관의 옹기들은 식생활 옹기를 비롯하여 거름통, 요강, 화로, 굴뚝, 독우물 등 주거 생활용과 악기용 옹기 그리고 업단지, 신주 단지 등 민간 신앙용 옹기가 전시되어 있어, 서민 생활 깊숙이 자리했던 옹기 문화의 전반적인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옹기 민속 박물관은 한국 최초의 옹기 민속 박물관이자, 서울시 도봉구에 위치한 도봉구 유일의 사립 박물관으로, 쌍문동 497-15에 위치하고 있다. 옹기 민속 박물관은 도봉구 구민의 문화 향유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구민 문화 회관, 도봉 문화원 등에서 옹기 특별 전시와 체험 학습 등을 개최하며, 더 나아가 최근 주말 문화 체험 학습의 열기를 반영하여 주말 옹기 체험 학습을 실시하고 있다. 또 우리 조상들의 지혜와 삶이 담겨 있는 옹기의 뿌리를 찾고 그 맥을 이어가고자 국내는 물론 국외 옹기 특별전에도 출품하여 옹기 문화를 선양하고 있다. 옹기 민속 박물관은 우리 조상들이 사용해 왔던 생활 용기인 옹기와 각 사찰과 궁궐 등에 남아 있는 조선 시대의 단청, 농기구 등을 체험할 수 있는 곳으로 급격하게 변모되어 가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우리 선조들의 생활상을 잘 이해할 수 있게 하는 교육의 장으로 의의가 있다. [사진]옹기 민속 박물관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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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도봉구문화대전」속으로의 여행 한국학중앙연구원의 대표적인 전자 편찬 사업『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그 중 서울특별시 도봉구 지역 정보를 총망라한「디지털도봉구문화대전」을 소개합니다. [사진] 디지털도봉구문화대전 홈페이지 그럼 도봉구에 대해 알아보는 여행을 떠나보실까요? [정치보다 풍류를 사랑했던 연산군] 재위 초반에는 별다른 일 없이 무난히 국정을 운영한 편이었으나, 1498년(연산군 4)의 무오사화(戊午士禍), 1504년(연산군 10)의 갑자사화(甲子士禍) 등으로 큰 화를 불러 일으켰다. 이러한 폭정 뿐 아니라 재위 기간 중 연산군은 경연과 사간원·홍문관 등을 없애고 언관을 혁파 또는 감원하는 등, 기존에 구축된 조선의 정치 제도와 끊임없이 마찰을 빚고 그것을 배척하였다. 이후 연산군은 정치에 신경 쓰기보다는 개인의 향락을 추구하는 등 부적절한 행위를 많이 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렇게 풍류에 빠져 있던 연산군은 정치를 등한시할 수밖에 없었고 이는 백성들의 고통으로 이어졌다. 연산군(燕山君)은 1476년(성종 7)에 성종(成宗)의 장남으로 태어나 모친이 폐서인되어 사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8세가 되던 1483년(성종 14) 2월 6일에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14살이었던 1488년(성종 19) 2월 6일에는 병조판서(兵曹判書) 신승선(愼承善)의 딸을 세자빈(世子嬪)으로 맞아들이며 그 지위를 공고히 했다. 1494년(성종 25) 12월 24일에 성종(成宗)이 38세의 젊은 나이로 승하하자, 12월 29일에 창덕궁(昌德宮)에서 왕위에 올랐다. 그 결과, 1506년(연산군 12) 9월 성희안(成希顔)·박원종(朴元宗)·유순정(柳順汀) 등이 주도하여 반정을 일으켜 연산군을 폐위시키고 성종의 둘째 아들 진성 대군(晉城大君)을 옹립하였다. 중종반정 후 폐위된 연산군은 강화도 교동현으로 옮겨졌고 반정 두 달 후인 1506년 11월 6일에 31세의 나이로 병사하였다. 본래 강화도 교동에 장사지냈으나, 1512년(중종 7) 거창 군부인 신씨가 임금에게 양주군 해등촌(海等村: 서울시 도봉구 방학동)으로 이장하기를 청하자 중종이 허락하고 왕자의 예로 정중히 개장하도록 하였다. 서울 연산군 묘는 도봉구 방학동 산77번지에 위치하며, 사적 제362호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 슬하에 자녀는 부인인 폐비 신씨 소생으로 6남 1녀가 있었으나 아들 중 네 명은 일찍 죽었다. 또 후궁 소생으로 2남 6녀가 있었다. 중종반정 시 아들 네 명은 모두 사사되었다. [사진] 연산군 묘 연산군 묘 동영상 바로보기 일반적으로 연산군에 대한 평가는 부정적이다. 두 차례에 걸친 사화와 갖가지 패행들의 원인으로 연산군 개인의 나쁜 성품이 지목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평가는 『연산군일기』의 논찬(論贊)이 큰 영향을 미쳤다. 연산군의 친모 폐사 사건에 의한 정신적 충격, 혹은 편집증과 같은 정신 질환 등을 원인으로 지목하기도 하지만, 이 역시 연산군의 성품이 포학하고 사치와 향락을 즐긴 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반면 분명 연산군 대의 폭정은 도를 넘어선 감이 있는 것을 부정하기는 힘들지만, 이를 온전히 연산군의 포악한 성격으로 돌리기 힘들다는 의견들도 있다. 즉 두 차례에 걸친 사화는 당시 정계가 가지고 있었던 대립 구도가 중요한 원인이었고, 연산군은 왕권 강화 차원에서 이를 활용한 것이었다고 보는 것이다. 당시 정국은 사림들이 중앙 정계에 본격적으로 등장하면서 강력한 왕권보다는 사대부들이 중심이 되는 정치를 추구하였는데, 이는 필연적으로 왕권과의 대립을 가질 수밖에 없었고 그것이 사화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연산군이 자신을 비판하는 세력을 탄압하기 위해 언관직을 폐지한 것이 아니라, 해당 관청과 관직은 사림들이 추구하는 정치 구조에서 핵심적인 역할이어서 이를 견제한 것이었다고 보는 것이다. 연산군 묘 테마뷰 바로보기 연산군 청명제향 연결 항목 바로가기 아울러 연산군의 향락 추구와 여러 가지 음행들은 반정 이후에 연산군을 폭군으로 몰기 위한 음해였다고 보기도 한다. 흥청과 운평 등을 육성한 것도 개인의 향락이 주목적이라기보다는 왕권의 위엄을 보여 주기 위한 의전용이라고 이해하기도 한다. 즉 연산군은 군주 중심의 전제 정치를 추구하였고, 이에 대한 반발로 반정이 일어났으며, 이후 반정을 정당화하기 위해 연산군의 치세를 과도하게 부정적으로 몰아갔다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에 따르면 연산군은 풍류를 즐기면서 패도 주의를 지향한 군주라 할 수 있겠다. [초안산 분묘군으로 본 조선 왕실 내시와 궁녀들의 삶과 죽음] 하지만 이러한 견해들도 당시 연산군의 행위들이 지나쳤다는 것에는 동의하고 있다. 군주로서의 책무를 다하면서 풍류를 즐기는 것이 아니라, 정치를 등한시하면서 개인의 향락을 추구하여 결국 왕위에서 쫓겨나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고 이해하는 것이 일반적이라 하겠다. 매년 봄 한식 전후에 연산군 묘소 앞 재실에서 연산군을 추모하기 위해 제향을 올린다. 연산군 청명제향은 1997년 연산 숭모회(燕山崇慕會) 주관으로 시작되었으며 현재 도봉구 문화 축제의 한 장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사진] 연산군 청명제향 서울시 도봉구 창동과 노원구 월계동에 걸쳐 있는 나지막한 야산인 초안산에는 319,503㎡의 적지 않은 면적에 조선 시대 환관 묘역을 비롯하여 양반, 중인(中人), 궁녀(宮女), 서민 등 다양한 계층의 묘 1,000여 기가 남아 있으며, 무덤을 지키는 여러 석물이 흩어져 있다. 조선 시대에 서울 도성 안 시신은 반드시 광희문, 수구문, 시구문을 통해서만 나갈 수 있었다. 그런데 광희문 밖 약 3.93㎞[10리]에 위치한 산은 도봉산과 북한산뿐이었다. 두 산의 경우 풍수지리상으로 서울을 지키는 진산이므로, 승극철 부부묘 연결 항목 서울 초안산 분묘군 가상현실 바로가기 묏자리로는 적합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 두 산을 제외하면 초안산만이 묘를 쓸 수 있는 가장 적합한 장소가 된다. 이런 기준에 의해 초안산은 서울 동북쪽에 가장 적합한 묘지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 결과 사대부와 내시를 비롯한 궁궐 사람들이 초안산을 묘지로 사용함으로써 현재 1,000여 기가 넘는 묘가 산재하여 있다. 문화재청에서는 2002년 3월 9일 서울 초안산 분묘군을 사적 제440호로 지정하였다. 초안산에 현전하는 내시 묘로는 내시부 상세 승극철(承克哲) 부부 묘 등이 있고, 상궁 개성 박씨(開城朴氏) 묘 등이 전한다. 이들을 통해 조선 시대 내시와 궁녀의 삶에 대해 일부나마 엿볼 수 있다. 승극철 부부 묘는 초안산 동남쪽 정상 부근 녹천정(鹿川亭) 아래에 위치하고 있다. 1990년 대 초반 승극철 부부 묘 일대가 개발되기 전까지 약 50기의 내시 묘가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모두 화장되거나 어디론가 이장되어 흔적을 찾을 길이 없다. 초안산은 고려 시대 개경을 보좌하는 부도인 남경(南京)의 후보지로 거론될 만큼 명당의 자리이었으며, 『경국대전(經國大典)』에 “내시들의 묘는 도성에서 10리[약 3.93㎞] 밖에 두게 하라”는 것에도 잘 부합한다. 다시 말해 초안산은 도성에서 가까운 명당으로, 왕이 있는 서쪽의 도성을 바라보며 묻힐 수 있던 장소이었던 것이다. 승극철의 묘에서 주목되는 것은 ‘양위 지묘(兩位之墓)’라는 문구이다. 내관들은 양자(養子)로 대를 이어왔으며 승극철 가계는 역대를 거쳐 가장 번성하였던 내시 가계이다. 이들은 그들의 선산인 각심사(角心寺)가 있던 초안산에 모셔졌고, 대를 이어 이곳에 묻혔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 내시족의 한 계파가 수백 명에 달하는 것을 보면 조선 시대 가장 번창하였던 내시들은 이곳을 그들의 공동 묘역으로 삼았을 가능성이 크다. 현재 확인되는 비문의 주인 외에도 마모되어 지워졌거나 흩어져 분식되었을 묘비나 묘만으로도 수없이 많은 그들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사진] 초안산 조선시대 분묘군 은퇴 후에는 한양 사대문 밖 한적한 곳에 모여 살았다고 한다. 그들의 생활 수준은 『한성부 북부장 호적』[1663]에 의하면 양자뿐 아니라, 솔거 노비·외거 노비까지 거느리는 경우도 있었다. 궁녀들의 묘역은 주로 궁궐과 멀지 않은 명당자리로 알려진 곳에 분포해 있다. 그러나 궁녀 묘 유적 현황을 보면 내시 묘와 달리 현재까지 파악된 묘비는 9기에 불과하다. 이유는 아마도 궁녀들은 나이가 들거나 병이 들면 자연 비구니로 사찰에서 일생을 보내다 죽은 후 주로 화장이 행해졌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이는 부부가 함께 묻힌 것을 의미한다. 이로써 내시도 결혼을 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내시들은 권력의 정도에 따라 실제 부인을 비롯해 첩까지 두고 살았던 것으로 전하는데, 이럴 경우 합장하여 단독 또는 쌍분 묘로 만들어졌다. 승극철 부부 묘의 좌향은 일반적인 남향(南向)이나 동향(東向)과 달리 서향(西向)이다. 이는 좌향이 왕이 계신 궁궐 쪽을 향함으로써 죽어서도 내시로서의 본분을 다하겠다는 의미로, 시자(侍子)로서 충정(忠情)의 의미를 따른 것이다. 초안산에는 내시 묘 말고도 궁녀의 무덤도 찾아볼 수 있다. 상궁 개성 박씨(開城朴氏) 묘가 그것이다. 상궁 개성 박씨 묘는 초안산 본산 내 초안산 아파트 뒤쪽 오른편에 위치하고 있다. 상궁 묘역에는 봉분과 상석·향로석이 잘 보존되어 있는 반면, 주위에는 부러진 비신과 머릿돌이 방치되어 있다. 조선 시대 궁녀들은 일반인과 달리 집단을 이루며 살았는데, 궁궐과 가까운 곳에 기거해야만 하는 까닭에 주로 오늘날 서울시 종로구 효자동·창덕궁·봉익동·운니동·계동 지역 주변에 살았고 [우리 문화의 지킴이 간송 전형필] [사진] 서울 초안산 분묘군 전경 간송(澗松) 전형필(全鎣弼)[1906~1962]은 일제 강점기에 우리의 전통문화를 지키기 위해 문화재를 수준 높은 안목으로 체계적으로 수집해 문화유산을 수호하고 현재까지 계승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던 인물이다. 도봉구 방학동에 전형필이 생활하였던 근대기 전통 가옥과 함께 묘소가 인근에 소재해 있다. 간송의 활동은 우리의 문화재가 도굴, 밀반출되었던 상황 속에서 해외 유출을 막고, 후대에 전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또한 일제의 교육 정책에도 항거하여 보성 학교의 인수를 위해 1940년에 재단 법인 동성 학원(東成學園)을 설립하여 이사장으로 취임하였다. 이후 1947년에 고적 보존 위원회 위원, 1954년에 문화재 보존 위원회 위원으로 피촉되었고, 1960년에 고고 미술 동인회 발기인 등으로도 활약하였다. 「디지털도봉구문화대전」에 담긴 정보와 자료들은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사이트 및 지역별 사이트(도봉구문화대전), 대형 민간 포털(네이버, 다음, 구글 등)을 통해 언제 어디서나 이용할 수 있습니다. 2011년 3월부터 2013년 11월까지 약 2년에 걸친 작업 기간을 통해 원고 집필, 윤문․교열, 멀티미디어 콘텐츠 제작, 영문화 번역 연구, XML 데이터 제작, 서비스 시스템 구축 사업이 진행되었고, 총 1,542개의 항목, 원고지 11,050매, 사진과 동영상 등 총 2,852종의 멀티미디어 자료를 담고 있습니다. 2011년 3월 도봉구와의 협약을 통해 추진된 이 사업은 2011년 6월부터 같은 해 11월까지 기초조사 연구를 통해 도봉구의 향토문화 자원을 조사ㆍ분석하는 작업이 진행되었습니다. 이후 원고 집필 사업(2011년 11월~2012년 8월, 덕성여자대학교), 멀티미디어 콘텐츠 제작 사업(2012년 9월~2013년 8월, ㈜르네틴트), 원고 윤문․교열 사업(2013년 3월~5월, ㈜지식공학), 영문화 번역 연구(2012년 12월~2013년 6월, 소망번역), XML 데이터 제작 사업(2013년 6월~8월, ㈜나라지식정보), 서비스 시스템 개발 사업(2013년 7월~9월, ㈜포스트미디어)이 수행되었습니다. 「디지털도봉구문화대전」(http://dobong.grandculture.net/)은 서울특별시 도봉구 지역의 디지털 백과사전으로, 도봉구의 역사와 문화를 비롯해 정치·경제·사회의 발전상 등에 관한 다양한 자료와 정보를 집대성해 인터넷을 통해 누구나 쉽게 활용할 수 있게 제작되었습니다. 간송 전형필이 국보급 문화재를 수장해 우리의 문화유산을 지키고 이를 실천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가지고 태어난 남다른 애국심과 심미안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던 것이나 당대 예술가, 지식인들과의 활발한 교유 활동 역시 큰 역할을 하였다. 독립운동가였던 위창 오세창(吳世昌)을 비롯하여 여러 인사들과의 친분은 미술 작품에 대한 해박한 안목과 최고의 식견을 기르게 했고, 우리 문화재를 수집하고 전승하는 뜻을 세워 실천하는 데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실제 간송은 서예, 전각, 그림, 도자기, 수필, 각종 기고문 등 많은 글과 작품을 남겼으며 음악, 연극에도 조예가 깊어 문화 비평가의 자질까지 갖췄던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우리 문화의 지킴이 간송 전형필 동영상 바로보기 간송이 활동하였던 1930년대는 일제 강점기로 우리의 소중한 문화재를 제대로 돌볼 수 없었던 시절이었다. 한일합병 이후 수준 높은 문화재들이 일본으로 밀반출되었는데, 극심한 도굴로 문화재뿐 아니라 유적이 파손되거나 소멸되면서 문화적으로 참담한 상황에 직면했던 때였다. 일본은 아예 경성 미술 구락부라는 미술품 경매장까지 차려놓고 조직적으로 전국의 문화재를 흡수했는데 이를 통해 일본 수집가들이 재력과 권력을 앞세워 국내에 있는 수준 높은 문화재를 쓸어 모으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시대 속에서 간송은 일본에 유출되는 문화재를 수집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증조 때부터 서울 종로 일대의 상권을 장악해 10만석 부호가의 상속권자였던 간송은 자신의 재력을 기반으로 경성 미술 구락부 경매에 좋은 물건이 나오면 적극적으로 나설 수 있었다. 현재 국보 제68호인 청자 상감 운학문 매병도 이 경매에서 6천원에 구입한 것으로 당시 쌀 한가마니가 15원~16원이었던 것을 생각해 보면 그 규모를 어느 정도 짐작해볼 수 있다. 이외에도 한남서림(漢南書林)[현 통문관]이라는 고서점도 운영하였는데, 이곳으로 골동품 매입 신청이 들어오면 정확한 감정을 통해 문화재를 사들이는 창고로 활용하였다. 현재 전해지는 훈민정음 원본도 이곳을 통해 입수된 것이다. 조선 총독부에 알리지 않고 몰래 숨겨두었다가 해방이 되면서 그 존재를 알렸다고 한다. 이와 같은 헌신적인 노력으로 간송의 소장품에는 회화, 도자, 금속 공예, 불교 조각, 전적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국보급 문화재들이 포함되어 있다. 최근 2011년 3월에는 12점이 국보로, 12점이 보물로, 4점이 서울시 지정 문화재가 되었고, 아직까지 공개되지 않은 문화재가 많이 남아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간송의 소장품은 우리 문화의 정수를 지키기 위해 애썼던 간송의 뜻과 업적, 열정을 대변해 주는 것이며, 우리 문화의 독자성을 대변해 주는 최고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 간송 미술관의 소장품은 연중 봄·가을 두 차례 특별전을 통해 일반인에게 공개되고 있다. 간송은 우리 민족의 문화유산을 지키기 위해 일찍부터 가치 있는 문화재를 수장하고자 자신의 힘과 막대한 재산을 쏟았으며, 일제 강점기 암울했던 시대 상황 속에서 우리의 문화재가 밀반출되어 해외로 유출되는 것을 막고, 우리의 문화유산을 수호해 현재까지 계승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1952년 교육 공로자로 표창을 받은 이후 1962년 사망한 해 광복절에 대한민국 문화 포장이, 1964년에는 대한민국 문화 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1996년에는 문화 체육부에서 11월의 문화 인물로 선정하였다. 1962년 1월에 향년 57세의 나이로 작고한 간송은 방학동에 소재한 아버지 묘역에 함께 묻혔다. 묘소 주변에는 살아생전 간송이 거처했던 근대기 전통 한옥[등록 문화재 제521호]이 있어 묘소와 함께 간송의 자취를 살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