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보기 맨위로
 
한국학중앙연구원 온라인소식지
 
한국학중앙연구원 온라인소식지 6월호 AKS
 
커버스토리
한중연소식
옛 사람의 향기
이 땅의 문화를 찾아서
한국학 연구동향
세계와 함께하는 한국
새로 나온 책
뉴스 라운지
되살리는 기록유산
틀린 그림 찾기
한국학중앙연구원 페이스북 페이지 한국학중앙연구원 트위터
AKS 옛 사람의 향기
 
연구원 홈페이지 한국문화교류센터 Newsletter 한국학진흥사업단 Newsletter 관리자에게
고문서, 20년 만의 고향 방문 박성호(장서각 고문서연구실 선임연구원) 1392년 7월 16일 이성계의 역성혁명으로 건국된 조선(이 국호는 1393년에 명의 승인에 의하여 채택)은 말할 것도 없이 이전 왕조인 고려의 제도를 계승할 수밖에 없었다. 조선의 본격적인 제도 개혁은 이후 태종, 세종, 성종 대를 거치면서 완성되어 간다. 따라서 조선초의 역사를 연구하는 데는 세심한 주의를 필요로 한다. 여기서는 고문서 1점을 들어 이 문제를 살펴보기로 한다. 현존하는 조선 최고(最古)의 임명문서는 1393년(태조2) 10월 일에 도응(都膺)을 전의소감(典醫少監)에 임명하는 문서이다.(도판 참조)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은 조선왕실 문헌의 보고(寶庫)라는 평가와 더불어 민간 고문헌 자료의 대표적인 소장처라는 평가도 함께 받고 있다. 민간에 전해져온 고문헌 자료들이 장서각에 모일 수 있었던 것은 오랜 세월동안 자료를 지켜온 소장자들의 헌신적인 노력과 기탁 의사가 더해졌기 때문이다. 1997년 경북 안동의 전주류씨 수곡종택(종손 류승우)에서는 선대로부터 지켜온 고문서와 고서 3천여 점을 한국학중앙연구원에 기탁하였다. 조선시대와 근현대기를 지나왔고, 임하댐 건설로 조상 대대로 살아온 터전이 물에 잠기는 곡절을 겪으면서도 그 자리를 지켜왔던 고문헌들을 멀리 경기도 성남으로 떠나보낸 것이다. 이 일은 장서각의 기탁 연혁을 말할 때면 늘 첫 번째로 언급되는 기념비적인 역사가 되었고, 이때를 시작으로 지금까지 전국의 여러 소장자들이 약 6만여 점에 달하는 고문헌을 기탁하였다. 전주류씨 수곡종택의 자료가 기탁된 지 20여년이 지난 올해 10월 8일, 안동시 임동면 수곡리에는 정부의 예산 지원으로 건립된 충의역사체험장이 개원하였다. 충의역사체험장은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으로서 전투의 선봉에 선 기봉 류복기, 그 아우 묵계 류복립, 그리고 기봉의 다섯 아들 류우잠, 류득잠, 류지잠, 류수잠, 류의잠 선생의 숭고한 뜻을 기리고 그들의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최신식 보존 환경을 갖춘 장서각 수장고에서 안정적으로 보존되어 온 자료들이 상대적으로 보존 여건이 좋지 못한 이 자그마한 공간에서 환한 빛을 띠는 듯한 인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마치 사람들이 자신이 나서 자란 고향의 공기와 흙내음을 반기듯 이 고문서들도 수백 년 세월동안 익숙했던 고향땅의 기운을 알아차리는 듯하였다. 지금 충의역사체험장의 작은 전시실에는 기봉 선생 사후에 왕이 내려준 《추증 교지》를 비롯하여 기봉 선생이 임진왜란 무렵 손수 그린 《동국지도》, 당시 의병을 일으킨 경과를 기록해 놓은 《임란창의록》, 영남의 의병장 32인이 팔공산에 모여 결의를 다지며 지은 시문 등이 전시되어 있다. 원본은 곧 장서각으로 다시 돌아올 예정이지만, 갑작스런 외출이자 마지막 외출이었을지 모를 고문서들을 찾으러 가는 발걸음이 가볍지는 않을 듯하다. <사진1> 팔공산에 모여 창의한 서른 두 의병장의 자(字)를 넣어 지은 시문 문헌 자료는 그것을 생성시킨 사람과 시공간이 한데 어우러져 있을 때 비로소 그 속에 담겨 있는 깊은 얘기를 들려준다고 하던 선배 연구자들의 경험담을 새삼 되새겨본다. <사진2> 『기양세고』 : 류의손, 류복기, 류우잠의 문집 합본 [사진]<자탄(自歎)> <자탄 갑인 년 봄에 쓴 시>
하늘이 내 재주를 내심에 반드시 쓸 데 있건마는
예로부터 현철한 이는 다 마음을 수고로이 하였다.
여자로 태어난 것도 한인데, 또 이룬 것이 없으니
희끗희끗한 머리털 누가 막으리오?! 손으로 가슴을 만지며 앉아 길게 탄식하니
쇠잔한 등잔불 깜빡거려 밤은 이미 깊었다.
홀연 들으니, 자규가 텅 빈 산 속에서 울며
목청을 굴리고 혀를 놀려 슬픈 소리 뱉어낸다. 밤마다 쉬지 않고 울어
시름겨운 이에게 눈물로 옷깃 적시게 하네.
바다 위로 떠오른 밝은 달이
새벽에 구름 사이에 잠길 줄을 그 누가  알았으리요?! 하루아침에 병들어 누우매 서로 알 리 없으니
도도한 세상 정이 예나 지금이나 같구나.
마음은 뜬구름 같아 정한 곳 없으니
이로부터 고향 찾기가 더디고 더디구나! 1854년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위 시에서 시적자아는 타고난 재능과 여성으로서의 한계를 한탄하고 있다. 어질고 능력 있는 사람은 예전부터 항상 마음이 괴로웠다는 표현으로 자기 자신에게 ‘어쩔 수 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자기 합리화 혹은 자기최면을 걸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하게 형성된 주체적 내면의식을 자신도 제어할 수가 없었다. 가슴을 치며 탄식하기도 하고, 밤에 울어대는 소쩍새 소리를 들으면서 슬픈 노래도 불러보고, 밤마다 울어도 보지만 이미 늙어버린 몸을 어쩔 수 없었다. 주체적 내면을 가진 개성은 결국 기존 질서로의 편입이 아닌 자기 확장의 길로 들어섰을 때 생긴다. 의식에서든지 혹은 행위에서든지 자신의 지향점을 사회적 질서나 기존의 관념으로 향하지 않고 내면으로 향했을 때, 자신의 내면성에 개인의 주체성으로 확립되고 진정한 내면세계의 개인화가 이루어진다. 기각은 주체적 내면을 가진 개성이 형성되었으나, 이를 외부로 확장시키는 강하면서도 도발적인 실천을 하지 못한 채 시를 통해 자신의 주체적 내면을 표출하고 있다. 시적자아는 고정된 사회질서와 관념에서 완전한 주체적 내면의 개인화를 이루어지는 못했지만, 19세기 중반을 살다간 한 여성을 통하여 여성들에게는 억압된 유교적 이데올로기 속에서 서서히 형성되어 가는 여성의 주체적 내면을 잠시나마 느낄 수 있었다. 효장세자의 그림은 지금 이 시대의 아이들 그림과 비교해도 예사롭지 않다. 지우거나 고칠 수 없는 필묵으로 거침없이 그려낸 감각적인 필치가 돋보인다. 부왕인 영조도 어린 시절 누구보다 그림과 글씨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영조대왕행장』의 한 구절을 보자. “무릇 글씨와 그림은 다 배우지 않고도 잘 하시어 필묵을 가지고 노실 때마다 빼어난 풍채가 사람들의 눈을 감동시켰다.” 효장세자도 영조의 이러한 재능을 그대로 이어받은 듯하다. 효장의 이복동생인 사도세자도 잘 알려진 바와 같이 그림에 남다른 재능을 지녔다. 두 점의 낙서에는 닮고 싶고, 뛰어 놀고 싶은 어린 세자의 무의식 세계가 담겼다. 또한 책을 가까이 하려는 세자의 또 다른 모습도 투영된 듯하다. 10살짜리 아들을 떠나보낸 영조는 세상의 모든 것을 잃은 듯 상심이 컸다. 훗날 세자의 유품으로 돌아온 이 책을 쓰다듬던 영조는 이 낙서를 마주하며 못 다한 부정(父情)을 달래야 했을 것이다. 영조는 『일한재소재책치부』에 남긴 효장세자의 낙서 두 점을 원형 그대로 보존하면서, 소중한 애장품으로 삼았던 것은 아닐까. 영조가 이 목록집에 기록한 실물들은 대부분 흩어져 그 행방을 알 수 없지만, 지금까지 온전히 남은 것은 효장세자의 이 낙서 그림 두 점뿐이다. 이 충의역사체험장의 한켠에는 자그마한 전시실도 함께 마련되었다. 개원을 앞둔 전주류씨 문중에서는 자료 전시를 위해 장서각에 도움을 청해왔고, 장서각에서는 기탁 문중의 요청에 따라 전시에 적합한 자료 선별과 해설문 등의 준비에 착수하였다. 마침내 개원을 며칠 앞두고 장서각에서는 전시 자료들을 챙겨 안동으로 향하였다. 장서각으로 옮겨온 수곡종택의 고문서들이 20년 만에 떠나온 고향땅을 밟게 되는 순간이었다. 임하호 수변에 조성된 충의역사체험장은 수려한 경관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자리하고 있었고, 일곱 분의 신위를 모신 사당과 강학 공간을 갖추고 있었다. 그런데 꼼꼼히 포장해간 전시 자료들을 현장에서 풀어 진열장 안에 들여놓고 최종적으로 전시실을 돌아보는 순간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