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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의 문화를 찾아서
 
한국학중앙연구원 온라인소식지 2월호 A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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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의 문화를 찾아서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홈페이지 바로가기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은 전국 230개 시·군·구 지역의 다양한 향토문화 자료를 발굴․수집, 연구․분석하여 체계적으로 집대성하고, 이를 디지털화하여 인터넷을 비롯한 다양한 정보 통신 매체를 통해 서비스하며, 이용자가 또 새로운 지식의 생산자가 되는 순환형 지식정보시스템을 구축하는 대규모 문화 콘텐츠 편찬사업입니다. 이는 그간 미진했던 전국의 향토문화 자료의 보존 및 계승의 대책 마련과 체계적이고 종합적인 지역문화 정리사업의 필요성에 의해 추진되는 사업으로서, 지식·문화산업의 기반을 마련하고, 지역 간 균형 발전과 지역 경제 활성화에 기여하며, 인터넷을 통해 전국 향토문화의 세계화를 이루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Tip.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이란? 디지털부산문화대전 홈페이지 바로가기 [사진] 상해문 부산항과 아주 가까운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왜관의 일본 상인보다는 훨씬 싼 가격에 물건을 거래하였기 때문에 인기가 좋았다. 하지만 원래부터 인천, 원산에 비하여 일본의 세력이 막강했던 부산이었기에 청나라가 주도권을 쥐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결국 청일 양국 간 경제 주도권 경쟁 구도가 부산에서 나타났다. 결국 청나라가 청일 전쟁에서 패배하여 영사관을 잃게 되면서 청관은 급격히 쇄락하였다. 청관 일대는 일본인들이 장악하게 되었으나 1901년경부터 다시 중국인들이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청관 일대는 현재 상해 거리 특구라는 이름으로 조성되어 있다. 1993년 부산시와 상하이가 자매결연을 체결하고, 1998년 부산시에서 옛 청관 거리 일대를 상해 거리로 조성하였다. 이 상해 거리는 부산이라는 도시의 국제성을 이야기할 때 자주 언급되는 곳이다. 그런데 사실 이 상해 거리에 상하이 사람은 살고 있지 않다. 실제 청관에 자리 잡았던 중국인들은 대부분 산둥성 사람들이었고, 현재 이곳에 정착해 있는 이들은 대부분 대만 사람들이다. [사진] 상해문 상해 거리를 걷다가 길의 끝자락에 다다르게 되면 거리를 수놓고 있던 붉은 빛깔의 중국어 간판 대신 영어 간판의 빈도가 점점 높아진다. ‘클럽 텍사스’, ‘샌프란시스코’, ‘할리우드 클럽’ 등의 영어 간판들이 즐비한 거리를 보면 순식간에 다른 국가로 국경을 넘나든 기분이 든다. 이곳이 바로 일명 ‘텍사스 거리’로 불리었던 곳이다. 일본이 물러가고 6·25 전쟁을 겪으면서 미군들이 주둔하게 되자 부산에는 기지촌을 비롯하여 일명 텍사스촌이라고 하는 미군 대상 유흥 단지가 속속 들어서게 되었다. 이곳도 미군들과 외양 선원들이 회포를 푸는 유흥 단지이자 상업 지구로서 그 역할이 바뀌기 시작했다. 1960년대 초반까지 이 일대는 미군 대상 유흥가로 절정기를 누렸다. 또한 외국 제품 거래의 단속 면제 지대가 됨에 따라 코카 콜라, 바이스로이 담배, 캐나디언 위스키 등이 버젓이 거래되기도 하였다. 1980년대 이 거리에는 술에 취한 미군들로 넘쳐났으며 내국인들의 출입은 엄격히 통제되었다. 유흥가로서의 텍사스 거리는 이후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러시아 선원들이 미군을 대신하게 되고 ‘러시아 텍사스촌’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이제는 쇼핑가로서의 이미지가 훨씬 더 강해져 미국 선원들이 한국의 점퍼, 재킷, 캐시밀론 이불을 한 아름 사가는 곳으로 더 유명하다. [사진] 상해거리 상해거리 차이나타운 연결 항목 바로가기▶ 부산의 원조 글로벌 마켓 ‘초량 외국인 상가’와 ‘국제 시장’ ■ 초량 외국인 상가
1990년 한국과 러시아가 수교를 맺게 되었다. 이후 한국이 경제 발전을 이루고 부산도 1980년대 이후 비약적인 성장을 이루자 ‘코리안 드림’을 꿈꾸는 러시아 보따리 상인들이 대거 부산을 찾기 시작했다. 부산과 블라디보스토크 사이의 항로가 개설되자 부산을 찾는 러시아인의 숫자는 몇 년 사이에 나날이 늘어 갔다. 청관 거리 일대와 텍사스촌 지역은 러시아 상인들의 상가로 모습을 바꾸어갔다. 속초나 부산을 주 무대로 한국의 의류, 생활용품, 식료품을 사가지고 러시아로 돌아가는 보따리 상인들은 건장한 체구에 금발을 하고서 동양인들과 뒤섞여 거리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당시 처음 보따리 장사를 시작한 것은 어선 선원들이었다. 이들은 구입한 생필품을 자국민이나 친지에게 되팔아 5~10배의 이득을 보았다. 1992년에는 한 달 평균 4,000여 명이 텍사스 거리를 찾아왔으며, 1993년 『동아 일보』 기사에 따르면 한 달 평균 7,800명이 텍사스 거리를 다녀갔다고 한다. 당시 특히 인기 있던 품목은 초코파이였는데, 1993년에는 급기야 텍사스 거리 초코파이 품귀 현상까지 빚어지게 된다. 러시아 상인들을 대신해서 상품을 구입해 러시아로 배송하는 대행자들까지 상당수 생겨났다. 텍사스 거리의 점포들은 소련 시절의 국가들과 하나둘 이어지며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등과도 왕래가 생겼고, 거리 이름도 현재의 ‘초량 외국인 상가’로 바뀌었다. 부산역에서 30여 분을 걸어서 만나게 되는 한 은행 2층에는 러시아인 전용 외환 창구가 따로 마련되어 있고, 같은 은행 건물 8층에는 러시아 총영사관이 들어와 있다. ■ 국제 시장
초량 외국인 상가가 외국인들이 직접 들어와 부산과 섞이면서 만들어진 곳인 반면, 국제 시장은 이국의 것들을 부산 사람들이 직접 추스르고 사고팔며 만들어진 곳이다. 1945년 일본이 패망하고 급하게 퇴각하며 남기게 된 전시 통제 물자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고 이것들을 지금의 부평동 공설 시장 일대와 주변 빈터에서 팔기 시작하였다. 이곳이 바로 시장이 된 것이다. 당시는 ‘도떼기 시장’이라고 불리웠다.
1948년 도떼기 시장은 단층 목조식 건물을 12동가량 짓고 ‘자유 시장’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태어났다. 당시에는 광복 이후 여기저기 자유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이 유행이었다. 이후 6․25 전쟁이 일어나면서 미군의 군용 물자들이 흘러나와 거래되었다. 일명 깡통 시장이라고 불리는 국제 시장의 군용 물자 시장은 지금도 그 흔적이 군데군데 남아 있다. 미군에서 유출된 캔 식료품을 주로 팔았던 시장이다. 지금도 일본의 과자와 함께 미국의 군용 양주, 통조림을 파는 상가들을 찾아볼 수 있다. [사진] 국제시장 본래는 국제 시장에는 깡통 시장과 함께 케네디 시장이라는 곳이 있었다. 전쟁고아를 위한 구호물자를 빼내서 전문적으로 팔던 곳으로, 창선동 일대에 형성된 곳이다. 구호품이 끊기고 나서는 수입 구제 의류를 취급하는 시장으로 바뀌었고, 지금은 대부분 일반 의류 시장으로 바뀌었다. 지금 국제 시장의 포목상과 의류 상가 일대가 바로 예전의 케네디 시장 자리이다. 물자의 다양성, 넓은 부지, 항구의 인접 등 당시로서는 유통의 정점에 있는 시장이었다. 홍콩, 마카오, 대만, 중국, 러시아, 미국 등에서 들어온 밀수품들이 성행하면서, 국제 시장은 밀수품을 전국으로 보급하는 시장으로 유명해졌다. 1959년 『동아 일보』의 기사를 보면 1958년 한 해 동안만 부산세관은 605건의 밀수를 적발하고, 검거된 밀수범만 1,000여 명, 압수 품목은 5억 9900만 환에 이르렀고, 부산 앞바다에서 해녀를 동원한 해저 밀수품 운반까지 나타나고 있다며 걱정을 금치 못하고 있다. 벨벳 옷감, 화장품, 모피, 보석, 시계 등이 밀수선에서 트럭으로 국제 시장까지 직송되었다. 밀수가 성행하자 히라마오, 마사이치, 로스케 등 불량배 집단들도 활개를 쳤다. 밀수로 한밑천을 잡은 상인들은 동대문, 남대문, 청계천 등지로 옮겨가서 새로 시장을 형성했다. 이들 시장에는 부산 국제 시장 출신들이 절반 이상이었다. [사진] 국제시장 국제 시장이 생겨났을 때. 그 난장 시장의 흔적인 양 국제 시장은 온 골목이 미로처럼 엉켜 있다. 그리고 그 골목 이곳저곳에 다양한 상가들이 들어서 있다. 특히 부평 시장 일대로 들어서면 미군용 위스키와 담배들이 상가 좌판에 자리를 잡고 있고, 노점상들은 일본에서 넘어온 화장품, 과자, 식재료 등을 팔고 있다. 몇몇 상점의 주인들은 고정 환율로 외환을 거래하기도 한다. 옷가게들을 거닐다 보면 이불만 한 크기의 바지도 볼 수 있다. 이 모든 흔적들이 그 옛날의 도떼기 시장에서 이어져 오는 것이다. 살아가기 위한 생존의 수단으로 부산 사람들은 이국의 문화를 걷어다 이곳 국제 시장에서 팔아왔다. 국제 시장에서는 정말 ‘국제적인’ 것들이 거래되었다. [사진] 국제시장 국제 시장 연결 항목 바로가기▶ 이국을 비벼 부산의 맛이 되다. 이러한 장소뿐만 먹을거리에서도 부산의 국제도시로서의 면모를 느낄 수 있다. 상하이 특구 거리나 초량 외국인 상가에서 이국의 음식을 쉽게 접할 수 있다. 시내 곳곳에서도 해당 국가의 현지인이 운영하는 음식점을 만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더욱이 현지 음식에 그치지 않고, 아예 부산에 녹아들어 부산의 음식이 된 것도 많다. 부산의 어묵은 전국 제일의 수준을 자랑한다. 다른 지역에서는 아예 어묵과 부산 어묵을 따로 구별하여 판매할 정도이다. 어묵의 본고장 일본과 가장 가까웠던 부산의 위용이다. 어묵 제조는 개항 이후 일본인들이 부산에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본격적으로 발달하기 시작했다. 1924년 조선총독부가 발행한 『조선의 시장』에서 부평동 시장에 대해 ‘쌀, 어묵, 채소, 청과물 등이 주종을 이루었다’고 어묵을 따로 기록할 정도였다. 부산에서는 1936년 일본인이 처음 어묵 공장을 세우고, 광복 후 동광식품을 시작으로 큰 어묵 공장들이 이어서 들어섰다. 이후 부산의 어묵은 ‘부산 어묵’ 자체의 고유 명사로 불릴 정도로 뛰어난 맛을 자랑하게 되었다. 남포동에서 소문난 메뉴 중 하나로 ‘완당’을 들 수 있다. 완당은 본래 ‘훈탕’이라는 중국 음식이었는데, 이것이 일본으로 넘어가 완당이 되었고 한국으로 들어와 지금의 형태가 되었다고 한다. 근처 부산 시민들이 점심 한 끼, 저녁 한 끼로 먹는 이 음식을 다른 지방 사람들은 일부러 먹기 위해 부산을 찾는다. 중국의 음식도 일본의 음식도 아닌 부산의 음식으로서의 완당을 찾는 것이다. 완당 연결 항목 바로가기 이 외에도 부산의 명물 음식으로 알려진 돼지국밥과 70여 년 전 남포동 일대에 널리 퍼지고, 현재도 부평동 깡통 시장 내에서 판매되고 있는 노점의 단팥죽 역시 가까운 일본식의 문화가 접목되어 탄생된 것이다. 돼지국밥은 6·25 전쟁 때 서울의 피란민들이 소뼈를 우려내어 먹던 설렁탕에 돼지 뼈를 우려 육수를 내는 일본 문화가 녹여져 탄생한 것이다. 실제로 부산과 뱃길을 맞대고 있던 규슈[九州]의 명물은 돈코츠[豚骨], 즉 돼지 육수이다. 단팥죽 역시 우리 전통 팥죽과 달리 갈분과 설탕을 넣는 일본식 젠자이 문화가 결합된 것이다. 팥빙수 팥죽 골목 연결 항목 바로가기 [사진] 부산 어묵 [사진] 돼지국밥 부산 어묵 연결 항목 바로가기 돼지국밥 연결 항목 바로가기
연구원 홈페이지 한국문화교류센터 Newsletter 한국학진흥사업단 Newsletter 관리자에게
「디지털부산문화대전」으로 떠나는 여행(2부) 한국학중앙연구원의 대표적인 전자 편찬 사업『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이 달에는 부산광역시의 정보와 자료를 총망라한「부산역사문화대전」을 소개합니다. [사진] 디지털부산문화대전 홈페이지 「부산역사문화대전」(http://busan.grandculture.net/)은 부산광역시의 전자 백과사전입니다. 부산의 자연지리, 역사와 문화를 비롯해 정치·경제·사회의 발전상 등에 관한 다양한 자료와 정보를 집대성해 인터넷을 통해 누구나 쉽게 활용할 수 있게 제작되었습니다. 2010년 4월 부산시와 협약을 통해 추진한 이 사업은 크게 네 단계로 진행되었습니다. ①선행(기초)조사 연구(2010년 5월∼2012년 9월, 부산대학교 한국민족문화연구소) ②원고 집필(2011년 4월∼2013년 11월, 부산대학교 한국민족문화연구소) ③멀티미디어 콘텐츠 제작 사업(2011년 5월∼2014년 8월, ㈜지엑스) 및 생활사 영상 제작(2013년 11월∼2014년 10월, ㈜박앤박미디어) ④서비스 시스템 개발 사업(2013년 11월∼2014년 10월, ㈜올인텍아이엔씨)이 수행되었습니다. 2010년 4월부터 2014년 12월까지 4년 9개월에 걸쳐 선행(기초)조사연구에서부터 서비스 시스템 개발이 진행되었고, 6개월의 시범 서비스 기간을 거쳐 2015년 7월 1일에 「부산역사문화대전」으로 개통되었습니다. 여기에는 총 16,000개의 항목(원고지 100,000매), 사진과 동영상·가상현실·도면 등 총 23,219개의 멀티미디어 자료가 담겨 있습니다. 「부산역사문화대전」에 담긴 정보와 자료들은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사이트 및 지역별 사이트(부산역사문화대전), 대형 민간 포털(네이버, 다음, 구글 등)을 통해 언제 어디서나 이용할 수 있습니다. 그럼 부산에 대해 알아보는 여행을 떠나보실까요? 테마 2 : 부산을 거닐어 만국 한 바퀴-부산 속 이국 유람기 부산은 한반도를 통해 대륙으로 들어가는 첫 대문이자 바다를 통해 세계로 나가는 첫 현관이다. 글로벌 인터체인지 부산이다.  언제나 길목에는 다양한 손님이 붐비기 마련. 1894년 조선을 방문했던 오스트리아인 헤세 바르텍은 『조선 1894년 여름』에서, ‘부산은 이곳 사람들이 낯선 이방인에게도 정직하며, 바다와 강이 선박으로 가득 덮여 있다’고 표현했다. 부산은 이국인들에게 닫혀 있지 않은 도시이며 숨기는 것이 없는 도시였다. 그런 부산에 많은 이국들이 발을 디뎠다. 그 역사는 평화와 갈등의 복잡한 관계 속에서 지속되어 왔다. 일본, 중국, 미국, 러시아 등 다양한 국가들이 역사 속에서 순차적으로 부산을 거쳐 가며 발자취를 남겨놓았다. 부산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나라는 일본이다. 전통적으로 한반도는 중국의 영향력이 컸지만 해항 도시였던 부산은 바닷길을 마주하고 있는 일본의 영향을 더 많이 받았으며, 이것은 부산의 이색 문화에 가장 진한 색깔을 남기는 결과가 되었다. 이후 6·25 전쟁 시기에는 미군들의 주둔지, 보급지가 되면서 미군 부대의 문화가 유입되었고, 이어서 경제 발전 시기 러시아 보따리 상인들이 드나들면서 부산에 러시아의 향취가 풍기게 되었다. 부산 속에 남아 있는 이국의 발자취들을 살펴보면 국제도시로서의 부산을 실감할 수 있다. 부산 속 세계 풍경을 찬찬히 되돌아보자. 미묘한 애증의 이국 일본 ■ 왜관
가깝고도 먼 나라 일본. 하지만 일본이 바로 옆 동네로 불렸던 시절이 있었다. 바로 왜관 때문이었다. 일본인들의 전관 거류지이자 상가 단지인 왜관은 조선 시대 대일 외교의 중심이었다. 차이나타운도 생기기 이전에 ‘재팬 타운’이 생긴 셈이다. 부산진역 2번 출구를 나서면 사람들이 고관 입구라고 부르는 곳이 있다. 윤흥신공 동상이 있는 자그마한 쌈지 공원 한쪽 일대가 두모포 왜관이었음을 나타내는 표지석이 있다. 1607년(선조 40) 설치되어 72년간 존속한 왜관이었다. 이곳이 고관 또는 구관이라는 불리는 것도 본디 이곳에 있던 왜관이 초량 왜관으로 이전하면서 예전의 왜관이 있었던 곳이라는 의미에서이다. 초량 왜관은 1678년(숙종 4)에 현재의 용두산 공원 일대에 신축한 왜관으로, 규모가 36만 3636㎡[11만 평]에 달하는 규모였다고 한다. 부산의 왜관은 1407년(태종 7)에 설치된 부산포 왜관을 처음으로 하여 198년을 존속하였다. 후에 일본은 조선과 강화도 조약을 맺고 이곳을 전관 거류지로 전환하였다. 왜관 연결 항목 바로가기▶ ■ 부산항과 관부 연락선
일본이 부산을 조선 침략의 교두보로 삼으면서 일본의 문화는 더욱 부산의 일상 속에 스며들게 되었다. 부산을 통하여 왕래하는 일본인의 숫자는 날이 갈수록 늘어났고, 1905년 9월 일본의 산요기선주식회사에 의해서, 1,680톤급 이키마루[壹岐丸]를 시작으로 부산-시모노세키 간 정기 연락선인 관부 연락선이 출항하였다. 이후 곤고마루[金剛丸], 고안마루[興安丸], 도쿠주마루[德壽丸] 등이 취항하여 제2차 세계 대전 직전까지 운항하였다. 이것이 현재 중앙동 국제 여객항에서 출항하는 부관 페리의 전신이다. [사진] 부산항과 관부 연락선 부산항은 관부 연락선으로 인하여 늘 붐비었다. 조선인과 일본인뿐만 아니라 중국인, 미국인도 연락선을 통하여 부산과 일본을 드나들었다. 1920년대 당시 신문을 보면 늘 연말이 되면 승선자들이 엄청나서 증선한다는 기사들이 꼭 등장한다. 1922년 4월에는 박람회 일정에 맞춰 증선을 하는 등 일본으로 이동하는 가장 큰 창구이자 거의 유일한 창구였다. 또한 관부 연락선은 한국과 일본 간 물류와 여객을 수송하고 부산은 그것을 다시 전국으로 실어 나르는 출발점이 되었다. 하지만 러일 전쟁과 함께 시작된 관부 연락선은 제2차 세계 대전 패망과 함께 마지막 배가 일본으로 떠난 이후 부산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사진] 부산항과 관부 연락선 이후 1968년부터 시모노세키와 부산은 다시 이 항로의 개설을 공동으로 논의하기 시작했고, 1970년 6월 19일 재일 교포 정건영이 출자한 부관훼리주식회사에 의하여 3,600톤급 여객선 2척이 다시 부산과 시모노세키를 오가기 시작했다. 현해탄을 가로지르는 국제적인 뱃길은 아시아에서는 부산과 일본이 최초였다. 관부 연락선 연결 항목▶ ■ 용두산 공원
부산은 일본의 식민지 정책이 본격화됨에 따라 일본의 손에 의한 급격한 근대화가 시작되었다. 당시 일본인들이 지은 건물과 위락 시설, 산업 시설의 흔적이 아직도 많은 곳에 남아 있다. 부산에 남아 있는 근대 문화유산 200여 건 중 61건이 일제 강점기의 것이라고 한다. 특히 용두산 공원은 부산 사람들에게는 매우 친숙한 공간이지만 그 공원의 기틀은 일본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이순신 장군이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동상이 서 있는 그 자리는 일본인들이 거주하였던 장소였다. [사진] 용두산 공원 [사진] 용두산 공원 용두산에서 일본인들이 생활을 시작하면서 그들의 종교적 상징인 신사가 용두산 공원 정상에 만들어지게 되었다. 신사의 규모도 꽤 컸다. 일본의 관료가 진해의 중요 항구를 검열하기 위해 입국하였을 때 용두산 신사를 참배하였고, 다양한 행사들이 용두산 신사 광장에서 시작되었다. 1936년 용두산 신사는 조선총독부가 관리 비용 일체를 부담하는 국폐사로 격상되기에 이른다. 부산 속 일본의 성역이었던 셈이다. 이후 광복과 함께 용두산 신사는 방화로 전소되어 버리고 용두산은 다시 공원으로 가꾸어져 지금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용두산 공원 연결 항목 바로가기▶ ■ 아미동 묘지 마을
부산광역시 서구 아미동에는 ‘묘지 마을’이라고 불리는 곳이 있다. 무심코 지나가면 알 수 없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이곳은 집의 벽면, 받침대, 계단 등이 비석이나 제단, 상석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본래 이곳은 일본인들의 묘지터였다. 광복 이후 일본인들이 급히 떠나며 묘를 남겨두고 갔고, 6·25 전쟁 당시 피난민들이 묘위에 터전을 잡았다. 아미동 일대에 아직 남아 있는 몇몇 판잣집은 일본인들의 납골당 위에 집을 지어 크기가 10~23㎡인 집이 많다. 부산은 일본인들의 죽음에 공간을 내어주었고 이후 사람들은 그 공간을 딛고 다시 삶을 이어나갔다.
[사진] 아미동 비석 마을 아미동 비석 마을 동영상 바로보기▶ 아미동 사람들과 비석 이야기 연결 항목 바로가기 부산의 땅 위에 숨 쉬었던 대륙, 중국 부산역 5번 출구를 나오면 ‘상해문’이라는 관문을 만나게 된다. 붉은 색깔과 용무늬와 『삼국지』의 관우 동상이 어색하지 않은 곳이다. 부산광역시 동구 초량동 부산역의 맞은편, 부산의 이색적 향기를 가득 머금고 있는 흔적은 바로 상해 거리 특구이다. 이 지역은 화교 거리로 조선 시대 청나라인들의 전관 거류지였다. 오래전 왜관에 대비되는 곳이라고 하여 청관이라고 불리었다. 지금 화교 학교가 있는 곳이 본래 1884년 설립된 청나라 영사관이 있던 자리였다. 1882년 임오군란 후부터 1895년 청일 전쟁 발발 전까지 청관 거리에는 중국인들이 북적였다. 그리고 영사관이 들어선 이후에는 정주하는 중국인들이 많아지고 청나라 객주들이 부산으로 모여들었다. 그에 따라 부산의 청관은 중국에서 유명한 포목, 비단, 양복지, 꽃신 등이 거래되면서 한때는 시집가는 부산과 영남 처자들의 최대 혼수 시장으로 명성을 떨쳤다. 조선방직은 근대 시설을 도입한 국내 최초의 방직 공장이자 최대 규모를 자랑했지만 열악한 노동 조건 때문에 노동 쟁의가 자주 발생했다. 조선방직 총파업은 1930년 1월 10일 오전에 시작되었다. 파업을 주도한 것은 조선방직 노동자들로 구성된 중락회(衆樂會)였고, 2,000여 조선방직 노동자들이 일시에 파업에 동참했다. 요구 사항은 임금을 80전으로 인상할 것, 하루 8시간 노동제 실시, 해고제 폐지, 취업 중 부상자에 대한 위자료 지불, 직공에 대한 벌금제 폐지, 식사 개선, 조선인과 일본인의 차별 대우 폐지 등이었다. 이 파업에는 화요계 조선공산당 재건 운동가들과 부산 지역의 사회단체가 지원하고 참여했다. 이 무렵 사회주의자들은 노동자 계급의 조직화를 통한 조선공산당의 재건에 주력하고 있었는데, 조선방직은 이 가운데 화요계의 움직임과 연계되어 있었다. [사진] 왜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