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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학중앙연구원 온라인소식지 2월호 A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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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붉은 원숭이해를 맞이하며 정은주 (왕실문헌연구실 연구원) 2016년 병신년은 원숭이 해이다. 원숭이는 인간과 가장 닮은 영장동물로, 우리나라 토착종은 아니지만, 십이지신 중 하나로 전혀 낯설지 않다(그림1). 십이지의 기원은 중국 하 왕조시대로 거슬러가며 이를 통해 연월일시를 기록하였고, 한나라 중기에는 십이지를 방위에도 대응시킨 것으로 알려졌다. 그중 원숭이는 서남서의 방위신이며, 달은 음력 7월, 시간은 오후 3시에서 5시에 해당한다. [그림1] 김유신 묘의 십이지신 병풍석 중 원숭이 부분 [그림2] '문조면복어진' 중 긴꼬리원숭이가 묘사된 유이(蜼彛) 부분 우리나라에서 원숭이의 기록은 『삼국유사』에서 처음 발견된다. 신라 법흥왕 때 이차돈의 순교 시에 “감천이 별안간 말라 물고기와 자라가 뛰고 곧은 나무가 먼저 부러져 원숭이가 몰려가며 울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고려사󰡕에서는 고려시대 태묘에서 새벽에 신이 내려오기는 비는 의식인 신관(晨祼)의식에서 사용하는 제주 그릇 중 명수를 담는 유이(蜼彛), 즉 원숭이를 묘사한 술그릇이 등장한다(그림2). 무릇 옛사람의 기물과 의복 제도는 반드시 물상을 본떠 뜻을 취했는데, 술그릇에 원숭이를 그려 넣은 것은 그 효도를 사랑하면서 지혜가 있음을 취한 것이었다. 이후 원숭이는 조선왕조실록에서 자주 등장한다. 1394년 7월 일본의 구주절도사가 보낸 승려 범명(梵明)이 원숭이를 바친 기록이 전하며, 1408년 4월 명나라 환관 태감 황엄이 태종의 태평관 위연(慰宴)에 사례하고 원숭이 3마리를 바쳤는데, 수컷이 둘이고 암컷이 하나였다. 1410년에는 일본국에서 지속적으로 바친 원숭이를 사복시에서 길러 각진(各鎭)에 나눠주면서 원숭이가 전국적으로 번식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세종연간에는 “원숭이가 있는 곳에는 말이 병들지 않는다.”고 하여 일본에서 원숭이를 기르는 것은 이 때문으로 만일 말 기르는 자에게 원숭이가 없으면 반드시 그림이라도 그려 벽에 붙여서 예방한다고 하여 원숭이가 말을 기르는데 중요한 수단으로 인식되었고, 원숭이 그림은 주술적 효용성까지 갖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조정에서는 일본에서 예물로 바치는 원숭이 외에도 원숭이를 구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연산군 시기에 오면서 일본에서 예물로 바친 원숭이가 나라에 무익하고 기이한 물건으로 취급되면서 원숭이를 받지 않겠다는 뜻을 전달하는 대목에서는 원숭이에 대한 인식이 시기별로 큰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원숭이는 종교적 소재에도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먼저 부처의 전생담에 의하면, 전생에 원숭이 왕으로 태어나 구덩이에 빠진 사냥꾼을 구해주었으나, 결국 배고픔을 이기지 못한 사냥꾼에게 잡아먹히고 만다. 이에 원숭이왕은 미래세에 부처가 되어 사냥꾼과 같은 어리석은 중생을 제도하리라고 서원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또한 불교 경전인 『대일경』 「주심품」에서 설명하는 60종의 심상 중에‘원후심(猿猴心)’으로 비유되는데, 원숭이처럼 날뛰는 마음이라는 의미로 안정을 찾지 못한 채 조급하게 동요하는 마음을 가리킨다. 또한 『돈황변문집』의 「유마힐경강경문」에 마음의 원숭이와 생각의 말이 미쳐 날뛴다는‘심원의마(心猿意馬)’에서 심원은 원후심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이후 원숭이가 불교에서 더욱 친근해진 계기는 7세기 승려 현장이 인도에 가서 불경을 가져온 역사적 사실을 배경으로 한 명나라 소설 『서유기』에서 현장법사를 마술적 힘으로 보필하는 손오공(孫悟空)으로 등장한 것이다. 한편 서한의 마왕퇴 고분에서 발견된 도가의 양생법을 그린 '도인도(導引圖)'에는 호랑이, 사슴, 곰, 원숭이, 새 등의 움직임을 본떠 만든 금희(禽戱)가 소개되었는데, 그중 원숭이가 목욕하는 자세인 목원관(沐猿灌)이 포함되어 주목받은 바 있다. 그밖에 옛사람들의 원숭이에 대한 인식은 다음 여러 문헌에서 찾을 수 있다. 첫째, 어리석은 원숭이를 교사하는 인간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시경』에서 “원숭이에게 나무에 올라가도록 가르치지 말라. 진흙에 진흙을 붙이는 것과 같다.” 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원숭이가 원래 나무를 잘 타는데도 나무 타는 법을 가르쳐 준다는 것은 원래 악한 사람에게 악행을 행하도록 부추긴다는 뜻으로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겨 놓은 꼴이라는 우리 속담과 유사한 의미이다. 『장자』 「제물론(齊物論)」의 ‘조삼모사(朝三暮四)’는 중국 송나라 저공(狙公)이 원숭이에게 주는 열매를 아침에 세 개, 저녁에 네 개씩 주겠노라 하니 원숭이들이 노하자, 곧 말을 바꾸어 아침에 넷, 저녁에 셋씩 주겠다고 하자 원숭이들이 좋아하였다는 고사에서 유래하였다. 이는 어리석은 이를 간사한 꾀로 농락하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둘째, 인간과 닮은 원숭이를 어리석은 인간에 비유하거나 그러한 이야기의 주요 소재로 삼은 것이다. 『사기』 항우본기의 ‘목후이관(沐猴而冠)’은 항우가 함양의 백성을 죽이고 진나라 궁궐을 불사르자, 한생(韓生)이 관중은 사방이 막혀 요새가 되고 땅이 비옥하여 도읍할 만하다고 간언하였는데, 항우는 “부귀해지고 나서 고향[숙천]으로 돌아가지 않는 것은 비단옷 입고 밤길을 가는 것과 같다.”라며 간언을 듣지 않았다. 한생이 물러나 “초나라 사람은 원숭이가 갓을 쓴 격이라 하더니 과연 그렇구나.”라고 하자, 항우가 그 말을 듣고 한생을 삶아 죽였다는 고사에서 유래하였다. 이는 옷은 훌륭하나 마음은 사람답지 못하다는 의미로, 원숭이가 의관을 갖춘 것과 같이 그 격에 맞지 않음을 비유한 것이다. 『한비자』에는 ‘극후(棘猴)의 솜씨’라는 말이 있다. 전국시대 송나라 사람 중에 어떤 자가 연왕(燕王)에게 가시의 끝에다 원숭이를 조각할 수 있다고 하면서, 반드시 3개월 동안 재계(齋戒)한 다음에야 그 모습을 볼 수 있다고 하자, 연왕이 대우를 잘해 주었다. 그러나 조각장은 연왕을 속인 사실이 발각되어 결국 죽음을 당하였다. 이는 부질없이 마음을 허비하거나 거짓 술수를 부려서 작록(爵祿)을 취하는 것을 의미한다. 『회남자』에는 “초왕이 도망간 원숭이를 찾기 위해 수목을 다 베어 숲이 이 때문에 잔멸되었다.”고 하였는데, 사소한 것을 추구하다가 오히려 더 큰 화를 당할 수 있음을 의미한 말이다. 셋째, 원숭이의 모성을 극적으로 다룬 이야기이다(그림3). 『세설신어』의‘파원(巴猿)’은 파촉의 원숭이라는 의미로, 동진(東晉) 때 환온(桓溫)이 촉 땅을 정벌하기 위해 여러 척의 배에 군사를 나누어 싣고 양자강 중류의 협곡인 삼협(三峽)을 통과할 때 부하 한 사람이 원숭이 새끼 한 마리를 붙잡아서 배에 실었다. 이에 어미 원숭이가 뒤따라왔으나 물 때문에 배에는 오르지 못하고 강가에서 슬피 울부짖었다. 이윽고 배가 출발하자 어미 원숭이는 험한 벼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필사적으로 배를 쫓아왔다. 배가 100여 리쯤 간 뒤 강기슭에 닿자 어미 원숭이는 서슴없이 배에 뛰어올랐으나 그대로 죽고 말았다. 그 어미 원숭이의 배를 갈라 보니 너무나 애통한 나머지 창자가 토막토막 끊어져 있었다. 이 고사는 새끼를 위기에서 구하려는 어미 원숭이의 애끊는 모성을 잘 보여준다. [그림3] 고려청자 원숭이 모자 상형 연적 2016년 벽두부터 어둡고 무거운 소식이 우리의 마음을 산란하게 하고 있지만, 날뛰는 ‘원후심’을 냉철하게 붙들어 모두 지혜롭게 평화로운 한해를 보낼 수 있길 간절히 소망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