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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의 문화를 찾아서
 
한국학중앙연구원 온라인소식지 1월호 A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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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KS 이 땅의 문화를 찾아서
 
이 땅의 문화를 찾아서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은 전국 230개 시·군·구 지역의 다양한 향토문화 자료를 발굴․수집, 연구․분석하여 체계적으로 집대성하고, 이를 디지털화하여 인터넷을 비롯한 다양한 정보 통신 매체를 통해 서비스하며, 이용자가 또 새로운 지식의 생산자가 되는 순환형 지식정보시스템을 구축하는 대규모 문화 콘텐츠 편찬사업입니다. 이는 그간 미진했던 전국의 향토문화 자료의 보존 및 계승의 대책 마련과 체계적이고 종합적인 지역문화 정리사업의 필요성에 의해 추진되는 사업으로서, 지식·문화산업의 기반을 마련하고, 지역 간 균형 발전과 지역 경제 활성화에 기여하며, 인터넷을 통해 전국 향토문화의 세계화를 이루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디지털부산문화대전 홈페이지 바로가기 Tip.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이란?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홈페이지 바로가기 [사진] 조선방직주식회사 모습 파업이 발생하자 일제 경찰은 신속하게 공권력을 투입하여 탄압을 자행했다. 그 결과 조선방직 총파업은 큰 희생을 치르고 막을 내리게 되었다. 2차에 걸친 교섭에서 조선방직 측에서 제시한 작업 도구의 무료 지급, 벌금제 폐지, 식사 개선의 3개 조항만 수용하는 타협안이 관철되면서 파업 10여 일 만인 1월 21일 대부분 노동자가 업무에 복귀했다. 그 대가로 파업에 참여한 노동자 중 400명 이상이 해고되고, 주동자들은 검거되거나 격리되어 김소임 등은 강제 귀향 조처되었다. 조선방직 총파업은 열악한 노동 환경 속에서 민족 차별까지 더해진 상황에서 조선인 노동자들이 스스로의 역량을 일제에 행동으로 보여주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조선방직 총파업에서는 여성 노동자의 강한 단결력이 부각되었다. 파업 투쟁 속에서 여성 노동자들의 의식이 고양되면서, 조선방직 총파업은 일제 강점기 여성 노동자들의 투쟁상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으로 자리매김 되었다. 6.25전쟁과 임시수도 부산-포용과 도약의 땅 6.25전쟁은 1950년 6월 25일부터 1953년 7월 휴전 성립까지 부산을 비롯한 한반도 전역에서 지속된 남한과 북한의 전쟁이다. 6·25 전쟁은 부산을 비약적으로 팽창시켰다. 당시 부산은 1차[1950년 8월 18일~10월 27일], 2차[1951년 1월 3일~1953년 8월 15일] 두 번에 걸쳐 임시 수도 역할을 했다. [사진] 부산이 대한민국 임시수도의 역할을 담당할 당시 광복동 시가 모습 [사진] 1952년 부산광역시 서구 동대신동 보수천 주변 피난민 모습 ■ 부산 임시수도정부청사
부산 임시수도정부청사(釜山臨時首都政府廳舍)는 부산광역시 서구 구덕로 225[부민동 2가 1]에 위치한다. 1923년에는 경상남도청 건물이었다. 1950년 6·25 전쟁 시 임시수도 정부청사로 사용되었고, 다시 도청으로 사용되었다. 현재 동아대학교박물관 건물로 사용되고 있다. [사진] 부산 임시수도정부청사 모습(현재 동아대학교 박물관 건물) 부산 임시수도정부청사는 부산을 대표하는 근대 관청 건축물이다. 일제 강점기에는 우리 민족에 대한 수탈의 중심 기구이자 일제 잔재의 상징적 건물로 의미가 깊다. 6·25 전쟁 기간에는 임시수도의 정부청사로 사용되는 등 우리나라 근현대의 정치·사회적 변화와 아픈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건물로 역사적·건축사적 가치가 있는 문화재다. [사진] 1950년 (구)경남도청 상무관에서 개최된 피난국회 모습 ■ 부산 포로수용소
부산 포로수용소는 6·25 전쟁 당시 부산 지역에 전쟁 포로를 수용하기 위해 건설한 시설이다. 1950년 6·25 전쟁이 반발한 이후 가장 먼저 만들어진 포로 수용소는 7월 8일 대전형무소 내에 설치된 ‘대전 포로수용소’였다. 그 후 전세가 국군에 불리해지고 전선이 밀리게 되자 대전 포로수용소는 7월 14일 대구로 이동하여 효성국민학교[현 효성초등학교]에 ‘제100 포로 수용소’라는 이름으로 설치되었다. 그러나 한국군 지휘부에서는 전세의 변동에 따라 계속해서 포로수용소를 이동시키는 일이 매우 불리하다고 판단했다. 따라서 8월 1일 부산 영도에 있는 해동중학교에 포로수용소를 설치하여 ‘포로수용소 본소’로 하고, 대구에 있던 수용소는 포로 집결소로 운영했다. [사진] 6·25 전쟁 당시 부산포로수용소 전경(1951.2.26) 부산 지역에 포로수용소를 설치하고자 한 것은 국군보다 미군이 먼저였다. 부산 미군기지 헌병대에서 7월 18일 부산에 500명 규모의 수용소를 완성했으며 이후 1만 5,000명 규모로 확대했다. 그러나 늘어나는 포로들을 감당할 수 없어, 7월 30일 미군 제8군 사령부[EUSAK: Eighth U.S Army in Korea]는 5만 명 수용 규모의 새로운 수용소를 동래[거제리 임시 포로수용소]에 건설하기로 결정했고, 8월 5일부터 15일까지 이전을 완료했다. 그리고 8월 12일에는 한국군이 관리하던 부산 영도 수용소를 폐쇄하고, 부산 거제리 포로수용소에 통합되었다. 1951년 2월말 거제도 포로수용소 건설이 마무리 되면서 부산 거제리 포로수용소에 있던 포로들을 이송하기 시작하여 5만여 명이 옮겨졌다. 3월 1일에는 주요 본부 및 경비 대대 등 관련 부대가 거제도로 이동되었으며, 나머지 포로의 이동이 계속되어 3월말까지 이송된 포로의 숫자는 약 10만 명에 이르렀다. 6월말 경에는 육지 포로들의 이송이 거의 마무리되면서 거제도 포로수용소의 수용 인원이 14만 명이 넘어서게 되었다. 이에 부산 거제리 포로수용소는 1만 명 이하를 수용하는 작은 수용소가 되었다. 이후 부산의 포로수용소는 1953년 7월 27일 휴전 협정 조인되고 8월 5일부터 포로 송환이 개시되면서 폐쇄되었다. 민주화의 견인차, 부산 ■ 4·19 혁명
4·19 혁명은 1960년 3월부터 1961년 5·16 군사 쿠데타 전까지 부산을 비롯한 전국에서 전개된 민주화 운동이다. 1960년 3월 15일 제4대 대통령 선거를 전후하여 이승만(李承晩) 정권에 대한 반대 투쟁이 전국적으로 전개되었다. 그것은 2월 28일 대구의 학생 시위로 시작하여, 3월 15일 마산 시위를 거치면서 전국적인 민중 항쟁으로 확대되었고, 4월 19일 서울에서 정점에 이르렀다. 이에 4월 26일 이승만이 대통령직을 사퇴하면서 12년에 걸친 제1공화국은 붕괴했다. [사진 ] 1960년 4·19 혁명 가두시위 모습 (제공:부산광역시청) 부산에서도 4·19 혁명은 고등학생의 시위에서 시작되었다. 3월 12일 해동고등학교로 시작된 가두시위는 14일 데레사여자고등학교·부산상업고등학교·항도고등학교·금성고등학교 등 대규모 연합 시위, 16일 영남상업고등학교와 건국상업고등학교 시위, 24일 부산고등학교 시위, 25일 동성고등학교 시위, 혜화여자고등학교와 경남공업고등학교의 야간 데모를 거쳐 4월 18일 동래고등학교 시위로 이어졌다.  4월 19일 드디어 학생 시위는 민중 항쟁으로 확산되었다. 이날 서면 일대에서는 4·19 혁명 기간 최대 규모의 연합 시위가 벌어졌는데, 경찰이 쏜 총기에 사상자가 발생하면서 격분한 시민들이 시위 대열에 합세했고, 경찰이 수류탄과 기관총을 난사하자 성난 군중은 경찰차와 소방차에 불을 지르며 격렬하게 저항했다. [사진] 4.19 민주혁명회 부산지부인 부산 보훈·복지회관 모습 4월 19일 부산을 비롯하여 전국 5개 도시에 공포된 비상 계엄령[부산계엄사무소장 박정희 소장]으로 잠시 잦아들던 시위는 26일 다시 점화되었다. 이날의 시위는 노인을 선두로 한 이색 데모로 시작되었는데, ‘선거 무효’, ‘이승만 퇴진’, ‘살인 경관 처단’을 내세운 노인들의 시위에 학생과 시민이 합세하면서 시위 행렬은 순식간에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여기에 부산대학교 의과대학 교수와 학생 및 간호사, 동아대학교 교수와 학생으로 구성된 대학 교수단 시위가 더해지면서 10만 명을 넘긴 군중 시위로 확대되었다. 이승만 정권이 퇴진한 뒤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부산에서도 정치, 학생, 청년, 노인, 노동, 피학살자 등 다양한 부문에서 민주화 운동과 통일 운동이 전개되었다. 가장 먼저 움직임을 보인 것은 혁신 정계였다. 부산의 혁신 정당은 1960년 5월 25일 사회대중당 경남도당 결성주비위원회[사회대중당 경남도당]가 출범한 뒤 7·29 총선거 이후 이합집산을 거쳐 사회당, 사회대중당, 혁신당, 통일사회당으로 정비되었다. 진보적 청년층을 조직하는 움직임도 전개되어 6월 12일 자주적 통일을 위한 청년층의 결집을 내세우고 민주민족청년동맹이 창립되었으며, 통일민주청년동맹준비위원회[약칭 통일민주청년동맹]가 발족했다. [사진] 1970년 4월 19일 4.19 의거를 기념하는 10주년 행사 모습(제공:부산광역시청) 4·19 혁명을 선도한 학생층은 학도호국단의 해체, 어용 교사와 교수의 축출을 주장하며 학원 민주화 운동을 전개했다. 특히 대학생은 후진성극복학생연구회를 중심으로 통일 운동에 참여하여, 11월 부산대학교와 부산수산대학[현 부경대학교]에서 민족통일연맹이 결성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1961년 3월 27일 부산·경남의 고등학교와 대학교의 대표로 경남학생총연합이 결성되었다. 4·19 혁명은 노동 운동에도 희망을 불러일으켰다. 이 시기 노동계의 관심은 교원 노동조합의 설립과 어용화된 부산부두노동조합의 민주화였다. 교원 노동조합은 교육 현장의 비(非)자주적이고 반(反)민주적인 현실을 개혁하기 위한 노력으로, 대구·경북과 더불어 부산·경남이 그 진원지였다. 부산에서는 1960년 5월 15일 중등학교, 21일 초등학교 교사들이 교원 노동조합을 설립함으로써 7월 29일 한국교원노동조합연합회[약칭 한교조]를 결성하는 데 견인차 역할을 한 뒤 8월 2일 경남교원노조연합회를 결성했다. ■ 부마항쟁
부마항쟁은 1979년 부산과 마산 지역에서 전개된 시민과 학생들의 유신 반대 투쟁이었다. 부마 항쟁은 1979년 10월 부산대학교 교내 시위에서 발화되었다. 10월 15일의 부산대학교에서는 신재식과 이진걸을 중심으로 시위가 시도되었으나 불발로 끝났다. 하지만 시위는 이튿날 다시 시도되었고, 이는 부마 항쟁의 발단이 되었다. 10월 16일 오전 10시경 경제학과 정광민이 앞장 선 시위는 학생들의 열렬한 호응으로 삽시간에 수천 명으로 불어났다. 학생들은 교내 시위가 저지되자, 부산대학교사범대학부속고등학교[현 부산대학교사범대학부설고등학교]의 담장을 허물고 시내로 진출했다. 도심 시위에는 소식을 듣고 달려온 고신대학교와 동아대학교 학생들도 참여했다. 학생들의 시위에 시민들은 열렬한 지지와 응원으로 화답했다. 저녁 6시가 넘어 서자 퇴근길의 직장인과 노동자들이 합세하여 시위대는 삽시간에 수만 명으로 불어났고, 항쟁은 더욱 격렬해졌다. 경찰은 무차별적인 최루탄 발사와 강경 진압에 나섰으나 역부족이었다. 밤 10시부터 통행금지가 발표되었지만 항쟁의 불길은 더욱 거세어졌다. 이날 밤 1시까지 시위대는 11개의 파출소를 파괴하고 부상자는 110명으로 집계되었다. [사진] 1988년에 건립한 부마 민중 항쟁탑 10월 17일에는 동아대학교에서 학내 시위가 발생하여, 동아대학교 학생이 대규모로 가두시위에 합류했다. 하오 6시경부터 시작된 도심 시위는 수십 갈래로 나누어진 시위대에 의해 새벽 1시 30분까지 이어졌다. 시위 과정에서 21개소의 파출소가 시위대의 습격을 받아 파괴되고, 경찰 차량 6대가 전소되고 12대가 파손되었다. 또한 경상남도청, 중부세무서, 부산일보와 KBS 및 MBC 부산방송국 등 언론사, 일부 동사무소 등이 시위대로부터 투석을 받았다. 항쟁이 격렬해지자 박정희(朴正熙) 정권은 10월 18일 자정을 기해 부산 지역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2개 여단의 공수부대를 투입했다. 그러나 18일 저녁도 시위는 계속되었다. 저녁 8시경 동명 극장 앞에 집결해 있던 학생, 시민들은 삽시간에 2,000명의 대열을 형성하여 ‘계엄 철폐’, ‘독재 타도’를 외치며 시청으로 전진했다. 하지만 시청 앞에서 시위대는 공수부대의 무자비한 폭력으로 진압되고 말았다. 10월 18일에 항쟁은 마산으로 번졌으며, 10월 20일 정오를 기해 박정희 정권은 마산과 창원 일원에 위수령을 발동함으로써 항쟁은 군대의 힘으로 진압되었다. 부마 항쟁으로 연행된 시민은 총 1,563명으로, 이 가운데 부산이 1,058명이고 마산이 505명이었다. 부마 항쟁으로 계엄군법회의에 회부된 사람은 87명[학생 37명·일반인 50명]이었고 그 중 단순 가담자 67명은 소가 취하되었고, 20명[학생 7명·일반인 13명]은 실형을 선고받았다. 일반 검찰에 송치된 31명[학생 26명·일반인 5명]은 전원 소가 취하되었고, 651명은 즉결 심판에 회부되었다. 부마 항쟁의 가장 큰 의의는 열흘 후에 일어날 10·26 정변의 결정적 계기로 작용함으로써 유신 체제를 몰락시켰다는 점이다. 부마 항쟁은 4·19 혁명 이후 처음으로 본격적인 민중 항쟁의 지평을 열었으며, 1970년대 민주화 운동의 마지막 결산인 동시에 그간 일부 학생이나 지식인, 명망가에 국한되었던 민주화 운동의 주체를 일반 시민에까지 넓히는 계기가 되었다. 이는 1980년대의 대규모 반독재 민주 항쟁의 도래를 예고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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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부산문화대전」으로 떠나는 여행(1부) 한국학중앙연구원의 대표적인 전자 편찬 사업『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이 달에는 부산광역시의 정보와 자료를 총망라한「부산역사문화대전」을 소개합니다. [사진] 디지털부산문화대전 홈페이지 「부산역사문화대전」(http://busan.grandculture.net/)은 부산광역시의 전자 백과사전입니다. 부산의 자연지리, 역사와 문화를 비롯해 정치·경제·사회의 발전상 등에 관한 다양한 자료와 정보를 집대성해 인터넷을 통해 누구나 쉽게 활용할 수 있게 제작되었습니다. 2010년 4월 부산시와 협약을 통해 추진한 이 사업은 크게 네 단계로 진행되었습니다. ①선행(기초)조사 연구(2010년 5월∼2012년 9월, 부산대학교 한국민족문화연구소) ②원고 집필(2011년 4월∼2013년 11월, 부산대학교 한국민족문화연구소) ③멀티미디어 콘텐츠 제작 사업(2011년 5월∼2014년 8월, ㈜지엑스) 및 생활사 영상 제작(2013년 11월∼2014년 10월, ㈜박앤박미디어) ④서비스 시스템 개발 사업(2013년 11월∼2014년 10월, ㈜올인텍아이엔씨)이 수행되었습니다. 2010년 4월부터 2014년 12월까지 4년 9개월에 걸쳐 선행(기초)조사연구에서부터 서비스 시스템 개발이 진행되었고, 6개월의 시범 서비스 기간을 거쳐 2015년 7월 1일에 「부산역사문화대전」으로 개통되었습니다. 여기에는 총 16,000개의 항목(원고지 100,000매), 사진과 동영상·가상현실·도면 등 총 23,219개의 멀티미디어 자료가 담겨 있습니다. 「부산역사문화대전」에 담긴 정보와 자료들은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사이트 및 지역별 사이트(부산역사문화대전), 대형 민간 포털(네이버, 다음, 구글 등)을 통해 언제 어디서나 이용할 수 있습니다. 그럼 부산에 대해 알아보는 여행을 떠나보실까요? [테마 1 : 구국과 정의의 실천, 부산]
임진왜란, 일제강점기, 6.25전쟁, 민주화 운동에 이르는 부산광역시의 구국과 정의의 실천 현장을 소개합니다. 부산, 임진왜란의 시작과 끝 임진왜란은 1592년(선조 25)부터 1598년까지 우리나라에 침입한 일본과 벌인 전쟁이다. 1597년(정유년)에 일본군이 다시 침입한 전쟁을 임진왜란과 구분해 ‘정유재란’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일본군은 1592년 4월 13일 부산진 앞바다에 침입해 다음날 부산진성을 침략했다. 이후 동래부성과 다대포성 전투가 벌어졌다. ■ 동래 읍성 전투
동래 읍성 전투는 임진왜란 때 동래 부사 송상현(宋象賢)의 군사와 일본군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군사가 동래 읍성에서 싸운 전투이다. 1592년 4월 14일 오전 부산진성을 함락시킨 일본군은 동래로 진출했다. 동래 부사 송상현과 군·관·민은 격렬하게 항쟁했지만, 일본군의 대군을 이겨내지 못하고 동래 읍성이 함락되었다. 일본군은 동래부의 중심을 점령함으로써 조선에 확실한 교두보를 마련했다. 동래부민은 대부분 전사해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사진] 동래성 동래 읍성에 일본군이 침입한 것은 부산진성을 함락시킨 14일로 일본군은 여세를 몰아 내침하여 포위하고, 15일에 주력 부대가 공격을 개시하여 전투를 펼쳤다. 먼저 일부의 일본군은 본격적인 공격에 앞서 취병장(聚兵場)에 집결하고는 100여 명의 군사로 하여금 ‘싸우려면 싸우고 싸우지 않으려면 길을 내놓아라[戰則戰矣 不戰則假道]’라고 쓴 목패를 남문 밖에 세워 동래 읍성 군민들의 항복을 촉구하는 최후통첩을 보내고 갔다. 그 표본을 본 송상현은 ‘싸워서 죽기는 쉬워도 길을 내주기는 어렵다[死易假道難]’는 글을 쓴 목패를 적중에 던져 단호한 항전 의지를 표시했다. 그러나 많은 적의 대군에 당해낼 수가 없었다. 결국 동래성이 일본군에게 포위되는 상황에 이르렀다. 이윽고 적병은 송상현이 굴하지 않을 것을 알고 칼을 들어 살해했다. 이때 부사 주위에는 군관(軍官) 송봉수(宋鳳壽), 향리 대송백(大宋伯), 관노비 매동(邁同) 등이 좌우에 서 있었는데, 적병들이 앞으로 다가오자 격투 끝에 송상현 부사 등은 전사했으며, 부사를 도우려 왔던 양산 군수 조영규 등 군민 다수도 차례로 전사했다. 이 전투에서 동래 읍성의 군·관·민은 하나가 되어 결사 항전하여 일본군에 대한 항전의 굳은 의지를 드러냈다. 동래 읍성이 함락될 때 각지로 흩어진 동래부민들은 일본군의 잔학상을 알려서 전국적으로 의병이 일어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 좌수영성 전투
좌수영성 전투는 임진왜란 중 부산의 좌수영성 일원에서 전개된 이 지역 의병들의 유격전이다. 경상 좌수영의 본영인 수영성을 중심으로 7년간에 걸쳐 지역민들이 앞장서서 지속적으로 싸운 전투로, 의용제인비(義勇諸人碑)에 남은 민초의 삶이 생생하게 담긴 전투다. [사진] 경상 좌수영 성지 임진왜란의 개전 초기, 부산 지역의 대표적 전투인 동래성과 부산진성 전투가 관민의 합심으로 이뤄진 항쟁으로 역사 기록 속에 남은 데 비하여, 당시의 수군 주요 지휘관이었던 경상 좌수사 박홍(朴泓)이 일찍 응전을 포기하고 달아남으로써 수영성 일대는 일본군의 일방적인 승전 터가 되고 말았다. 이에 이 지역민들이 분연히 일어나 싸우게 된 것이다. 수영성이 함락되고 왜군의 수중에 들어간 뒤임에도 자발적으로 수영 출신 수군과 성민 25명이 죽음으로써 나라에 보답할 것을 맹세하고, 장수가 퇴진한 것을 분개하면서도 몸을 돌보지 않고 비분강개하여 종군하고 싸웠다. 7년간 수륙 양면에서 유격전을 펼치면서 싸우다가 순절했으나, 한동안 그들의 행적이 가려진 채 드러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1609년 동래 부사 이안눌이 부임해 지방민의 청원을 받아 그들의 행적을 되살려 『정방록(旌榜錄)』에 싣고 그 집 대문마다 ‘의용(義勇)’이란 팻말을 걸게 했다. 1806년 부임한 부사 오한원은 그 후손들에게 부역을 면제하고, 글을 지어 포상하고 그들의 순절을 기렸다. 1853년 4월 당시의 경상 좌수사 장인식이 사적비를 세우고, 25의용단을 쌓고 재실인 의용당을 지어 봄 가을 두 차례 제향을 올리게 했다. 임진왜란 당시의 관군과 의병의 전공(戰功)은 대개 역사 기록 속에 전해지고 있으나, 좌수영성 전투는 군민의 분전에도 불구하고 전선(戰線)에서 이탈한 좌수사의 과실이 두드러져서 드러나지 못했다. 그러므로 끝내 국가 차원의 포상은 이뤄지지 못한 채 지방관의 시혜 조치에 그치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향토 수호를 위한 지역민의 의기와 항전은 역사 속에 오롯이 살아남아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 일제의 대륙 침략 교두보-일제 강점과 항일 투쟁 부산은 1876년 조일 수호 조규[병자 수호 조약]의 체결로 우리나라 최초로 개항이 된 도시다. 일본 전관 거류지의 설치와 항구라는 지리적 조건은 부산으로 하여금 일본의 조선 침략과 대륙 침략의 교두보 역할 및 일본 경제 수탈의 관문 역할을 강제했다. 부산은 개항 이전부터 왜관 무역이 이루어진데다 이를 기반으로 조선에서 첫 번째 개항지가 되어 본격적인 식민 도시로 육성되었기 때문에 일본인 이주가 많았을 뿐 아니라, 각종 사업체·사회단체 등이 집중되어 있었다. 이로 인해 조선인들과 일본인들의 긴장 관계 또한 타 지역에 비해 각별했고, 일본인에 의한 사회 경제적인 수탈과 횡포 역시 어느 곳보다 극심했다. 이에 부산에서는 주권 상실 이전부터 일본에 대한 저항이 나타났으며, 부산 민중의 저항은 일제 강점기에도 지속되었다. ■ 대동청년단
대동청년단은 1909년 10월경에 결성되어 부산 지역을 중심으로 항일 운동을 전개한 비밀 결사 조직이다. 국권 회복을 위하여 군자금을 조달하고 인재를 육성하며, 국내외 독립운동가들과 연락을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1909년 10월 경 안희제(安熙濟), 서상일(徐相日), 이원식(李元植), 남형우(南亨祐) 등 경남 지역의 계몽 지식인을 중심으로, 17세에서 30세 미만의 청년 80명이 모여 대동청년단을 결성했다. 대동청년단은 1910년대 중 후반 이후 무역업에 적극 진출해 백산무역주식회사와 관계 속에서 세력을 확장했다. 1914년 이후로는 백산상회를 거점으로 국내외를 연결하는 데 힘을 기울이는 한편 인재 육성을 위해 학교 설립에 노력했다. 3·1 운동 이후 교육 구국 운동의 일환으로 기미육영회를 조직하기도 했으며, 무역업을 통해 독립 자금 조달에 힘썼다. 즉 민족 기업 육성과 교육을 통한 국권 회복을 위해 노력했다. [사진] 벡산기념관 대동청년단은 완벽한 비밀을 유지하여 1920년대 중반까지 활동하면서 경찰에 노출되지 않고 조직을 보전했으며, 해방 후 관련자의 증언을 통해 비로소 세상에 알려졌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바로 이 때문에 대동청년단의 활동을 비롯하여 설립지, 활동 지역 등이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다. 대동청년단의 명맥은 해방 이후까지 연결되었다. 대동청년단은 경상도 지역 청년 지식인과 민족 자본가를 중심으로 결성된 항일 운동 단체로, 극도로 억압적이던 1910년대 무단 통치 시기에 항일 운동을 전개한 비밀 결사였다. 또한 직접적 항일 투쟁뿐 아니라 교육 사업과 민족 기업 육성을 병행하고 있어 부산 지역의 사회 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오늘날 부산에는 대동청년단의 활동 거점인 백산상회 자리에 1995년 백산기념관을 건립되어 있다. ■ 동래 만세 거리
1919년 동래 장터에서 일어난 3·1 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지정한 거리 명칭으로 부산광역시 동래구 복천동에 자리하고 있다. 1919년 3월 13일과 18일·19일 동래 장터 일대에서 동래고등보통학교[현 동래고등학교] 학생, 명정학교와 범어사 지방학림 학생들을 중심으로 3·1 운동이 전개되었다. 동래 장날이었던 3월 13일 오후 3시 동래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동래군청 앞의 망미루에서 독립 만세를 제창하면서 만세 시위는 시작되었다. 18일 장날에도 동래 장터에서 명정학교와 범어사 지방학림 학생들의 시위가 계획되었는데 밀고로 주도자들이 연행되었다. 그럼에도 검거를 피한 학생들은 18일 저녁 서문에서 남문까지 시위를 하고 흩어졌다. 다음 날인 19일 아침에 다시 학생들은 독립 사상을 고취하는 내용의 격문을 배포하고, 오후 5시경에는 동래 시장 남문 근처에서 시위를 개시했다. 이 시위로 많은 학생들이 검거되었고 6개월~2년 6개월까지의 실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이러한 동래 3·1 운동의 중심이 된 곳이 바로 동래 장터였으며, 동래 일성관은 3·1 운동의 거점이 되는 곳이었다. 1995년 광복 50주년 기념사업으로, 1919년 동래 장터 3·1 운동의 역사와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부산광역시 동래구지명위원회에서 동래 장터 3·1 운동의 중심지였던 옛 남문 터와 동래 시장 주변을 동래 만세 거리로 지정했다. ■ 조선 방직 총파업
조선 방직 총파업은 1930년 1월 부산 지역 조선방직 노동자들이 노동력 수탈과 민족 차별에 항거해 벌인 총파업이다. 1929년 이후 세계 대공황의 속에서 일어난 국내 최대의 파업으로 전국적인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민족 차별과 계급 착취, 인권 유린이라는 식민지 조선의 노동자들이 처한 현실과 일제의 악랄한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1917년 11월에 설립된 조선방직주식회사[약칭 조선방직]는 조선의 값싼 공업 원료와 저임금을 기반으로 하는 대표적인 노동 집약형 기업이었다. 조선방직은 일본 미쯔이[三井] 계열의 중외산업(주)과 우마꼬시[馬越恭平], 야마모토[山本條太郞] 등이 자본금 500만 원을 출자해 지금의 자유 시장 일대 13만 2000㎡[4만여 평]에 세웠다. 지금도 부산광역시 동구 범일동 일대를 ‘조방 앞’이라 부르는 것은 이 때문이다. [사진] 1960년대 부산광역시 동구 범일동 조선방직과 자성대 모습 조선방직은 근대 시설을 도입한 국내 최초의 방직 공장이자 최대 규모를 자랑했지만 열악한 노동 조건 때문에 노동 쟁의가 자주 발생했다. 조선방직 총파업은 1930년 1월 10일 오전에 시작되었다. 파업을 주도한 것은 조선방직 노동자들로 구성된 중락회(衆樂會)였고, 2,000여 조선방직 노동자들이 일시에 파업에 동참했다. 요구 사항은 임금을 80전으로 인상할 것, 하루 8시간 노동제 실시, 해고제 폐지, 취업 중 부상자에 대한 위자료 지불, 직공에 대한 벌금제 폐지, 식사 개선, 조선인과 일본인의 차별 대우 폐지 등이었다. 이 파업에는 화요계 조선공산당 재건 운동가들과 부산 지역의 사회단체가 지원하고 참여했다. 이 무렵 사회주의자들은 노동자 계급의 조직화를 통한 조선공산당의 재건에 주력하고 있었는데, 조선방직은 이 가운데 화요계의 움직임과 연계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