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보기 맨위로
 
이 땅의 문화를 찾아서
 
한국학중앙연구원 온라인소식지 1월호 AKS
 
커버스토리
한중연소식
옛 사람의 향기
이 땅의 문화를 찾아서
한국학 연구동향
세계와 함께하는 한국
새로 나온 책
뉴스 라운지
되살리는 기록유산
틀린 그림 찾기
한국학중앙연구원 페이스북 페이지 한국학중앙연구원 트위터
AKS 옛 사람의 향기
 
연구원 홈페이지 한국문화교류센터 Newsletter 한국학진흥사업단 Newsletter 관리자에게
새해 사직단에서 한 해의 농사를 빌다. 이욱 (왕실문헌연구실 연구원) 한 해의 시작이 우리에게 주는 최대의 선물은 희망이다. 기대에 못 미치는 생활이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적인 모습이지만, 새해가 오면 흐트러진 마음을 추스르고 계획을 세우고 들뜬 마음에 정동진이라도 달려가고 싶다. 이러한 모습은 비단 개인의 삶에서만 보이는 것이 아니라 가정이나 사회전체에서도 쉽게 볼 수 있다. 직장에서의 시무식이나 설날의 세배와 성묘, 정월대보름에 볼 수 있는 다양한 마을축제 등은 이러한 바람의 구체적인 표현들이다. 조선시대에도 신년이 되면 이를 기념하는 다양한 의례들이 있었지만 그 중에서‘기곡제(祈穀祭)’를 기억할 필요가 있다. 기곡제는 한 해의 농사가 잘 되길 비는 의식이다. 조선시대 농경은 삶의 기반이면서 문화이며, 종교이다. 유교의 제천 의례가 우리나라에 수용된 것은 고려 성종대인데 이때의 제천 의례란 음력 정월의 기곡제(祈穀祭)와 음력 4월의 우사(雩祀)였으니 둘 다 농경과 관련된 것이었다. 기곡제는 『예기(禮記)』 「월령(月令)」에 맞추어 맹춘(孟春)에 천자가 좋은 날을 택하여 상제(上帝)에게 한 해의 풍년을 기원하는 제천의례였다. 그런데 조선시대에는 잘 아는 것처럼 제천의례가 폐지되었다. 그것은 농경과 연관된 기곡제와 기우제를 제거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기곡의 의식은 사라졌을까? 풍년의 바람과 불안도 사라졌을까? 이런 기곡제가 다시 설행된 것은 조선후기 1683년(숙종 9) 정월에 이르러서이다. 어디에서 어느 신에게 한 해의 농사를 부탁했을까? 1683년(숙종 9) 정월에 숙종은 사직단에 신하를 보내어 기곡제를 거행하였다. 그리고 1695년(숙종 22) 정월에 국왕이 직접 사직단에 나아가 기곡제를 거행하였다. 왜 이 시기에 기곡제가 관심을 다시 받았을까? 현종대와 숙종대는 무엇보다도 재난과 기근의 시기였다. 17세기 후반에 지속적으로 발생한 이상기후, 가뭄, 전염병 등으로 인해 인구수가 100만 명 이상이나 감소하였다. 1695년 기곡제를 거행하기 전에 숙종이 비망기에서 '바로 내년 농사의 결과에 이 동쪽 땅의 억만 생령(生靈)의 생사가 판가름난다'고 할 정도로 당시 상황은 절실하였다. 이러한 절박한 상황에서 시작된 '사직의 기곡제'는 점차 정례화되었다. 숙종대 부정기적이었던 기곡제는 영조대에 이르러 친행은 대사(大祀), 섭행은 소사(小祀)로 구분되어 『국조속오례의』에 등재되었다. 그리고 1696년(정조 11)에 섭행의 기곡제 역시 대사로 간주되었다. 사직은 토지신인 사신(社神)과 곡식신인 직신(稷神)을 가리킨다. 토지와 곡식은 인간이 삶을 영위하는 데에 가장 기본적인 필요조건이며, 이 필요조건을 충족시켜 주는 신에 대한 보답이 사직제의 기본적인 목적이다. 또한 사직은 일정 영토 내에 토지와 인민에 대한 통치권과 연관된 신이기 때문에 그 자체가 국가를 상징하기도 하였다. 국가의 성립은 새로운 사직신의 탄생이며, 역으로 국가의 소멸은 해당 국가의 주권이 미치는 영토의 소멸이자 해당 지역 사직신의 소멸이었다. 그리고 조선시대 사직은 제천의례인 원구제의 폐지 이후 최고의 제사로 규정되어 한 해의 소망을 담는 그릇이 되었다. 장서각에는 사직에 관한 자료로 『등록(謄錄)』 9종, 『사직서의궤(社稷署儀軌)』 1종,『사직서도제선생안(社稷署都提調先生案)』1종 등 총 11종이 있다. 이 중에서도 유일본인 등록은 1661년(현종 2)부터 1892년(고종 29)까지의 방대한 기록이다. 1760년(영조 36)에서 1786년(정조 10) 사이의 26년만을 제외하고 200여년 동안의 기록이 남아 있는 것이다. 그리고 1783년(정조 7)에 편찬된 『사직서의궤』는 정조의 사직제 정비와 연관된 것이었다. 이들을 통해서 조선후기 연속된 가뭄 속에서도 꿈을 잊지 않고자 거행하였던 사직 기곡제의 시작과 발전 과정을 살펴볼 수 있다. 하늘을 대신하여 백성의 꿈을 받아주었던 사직은 땅과 곡식을 통해 국가의 근본을 보여주고 있다. [사진] 사직서 등록(謄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