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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학중앙연구원 온라인소식지 10월호 A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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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상업문서와 민생 [사진] 안승준 (국학자료연구실 책임연구원) ● 20세기 초 가와이(河合弘民)와 한국고문서 수집 일본 제국대학 출신 가와이(河合弘民)가 한국에 온 것은 한일합방 전인 1907년입니다. 그의 방한은 우리나라 사회 경제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우리의 고문서를 본격적으로 조사 연구했고 수집과 매입을 통해 유일무이한 고문서 다량을 일본으로 반출하였기 때문입니다. 가와이는 1898년에 동경제국대학 문과를 졸업하고 조선총독부 취조국(取調局)에서 1910년부터 1912년 3월까지 촉탁 직원으로 근무하였습니다. <조선의 제도>, <결부(結負) 제도의 개황> 등의 연구 논문을 쓴 적도 있습니다. 이러한 학력과 지적인 경험을 통해 수많은 한국 고문서를 모았습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그의 수집품 가운데는 수많은 위조문서가 섞여있다는 것입니다. 일제시기 어느 사람들이 태종 세종 당시에 제작된 것인 양 문서내용을 위조하여 그에게 팔았기 때문입니다. 그가 위조를 모르고 구입한 것인 지 알고 산 것인 지 확인할 도리가 없지만 수집품 가운데는 가짜문서가 수백여 점에 달합니다. 이들 문서를 포함한 수천 점의 고문서 현물이 보관된 곳은 우리나라가 아닌 일본 교토대학 부속도서관입니다. 그가 1919년 타계한 뒤에 대표적 일인 학자 이마니시(今西龍)의 주선으로 모든 문서를 교토대학에 매도하였기 때문입니다. 현재 고서 등 책자가 2,160책에 달하고 고문서류 또한 2,000 여점이 넘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고문서 숫자가 정확치 않은 것은 고문서의 내역을 제대로 조사하거나 연구한 학자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현재 우리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지원하고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에서 추진하는 해외한국학자료센터 과제(연구책임자:정우봉)에서 가와이 고문서를 조사하고 디지털화하는 사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가와이가 수집한 고문서 가운데 보물적 가치를 지니는 것이 많습니다. 그 중에 가장 돋보이는 자료가 이른반 조선의 상업문서라고 할 수 있는 육의전(六矣廛)의 공인(貢人) 문서입니다. 육의전은 국가에서 필요한 물품을 조달하는 기능을 하는 반관반민적 성격의 조직이며, 구체적으로는 선전(縇廛,비단가게) 면포전(綿布廛,무명가게) 면주전(綿紬廛,명주가게) 지전(紙廛,종이가게) 저포전(苧布廛,모시.베가게) 내외 어물전(內外魚物廛)을 말합니다. 육의전 고문서 대부분 난해한 초서와 해독하기 어려운 치부(置簿)형태로 되어있습니다. 그 안에는 시전 관할부서인 경시서(京市署) 등 관부문서와 상업활동 민원 등 그들의 삶의 전략과 고민 등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습니다. 하지만 이들 자료를 이용한 연구 성과물은 매우 드문 형편입니다.  [사진] 육의전 방세문서 [사진] 육의전 회계문서 ● 상인들의 생존전략 – ‘사발 소지’ 조선은 양반사회였습니다. 상인들은 신분 면에서 볼 때 농민보다도 더 열악했습니다. 이들은 육의전이라는 조직을 운영하면서 특정 상품에 대한 전매권(專賣權)과 금난전(禁難廛)이라는 특권을 통해 관부로부터 보호를 받았습니다. 어용상인(御用商人)이라는 별명을 얻게 된 것도 이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들은 여러 가지 시대적 도전에 직면합니다. 앞서 말한 난전(亂廛)상인의 도전이 가장 큰 것이었습니다. 이들은 대행수(大行首, 大房)를 우두머리로 조직을 만들어 그들의 이익을 확대해 나가거나 생존을 위한 여러 가지 전략을 마련합니다. 임진년(1892년) 그들의 대표인 대방(大房)에게 여러 점주들이 올린 민원의 내용을 요약해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최근 여러 번에 걸친 큰 소송으로 이윤을 남기지 못하는 점주들이 많고 쪼그라들어 모양을 갖추지 못하는 형편이 최고조에 달하였습니다. 현재 시장에 나와 장사를 하는 상인들도 예전의 40개 점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그 꼴을 유지하지 하지 못하여 끼니를 잇지 못해 동가숙서가식할 정도입니다. 겨울에는 춥다고 울부짖고 풍년이 들어도 기아에 내몰려 가족을 봉양하지 못합니다.(중략) 이에 저희들의 공의(公議)에 따라 올리오니 대방께서는 공물(貢物)을 10년에 국한하여 권매(權賣)할 수 있도록 해주셔서 빈사지경에 처한 사람들이 생활을 보존할 수 있도록 은택을 내려 주십시오.” 요컨대 공가(돈)를 정부로부터 미리 받고 관청에 필요한 물품을 납부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요청이었습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들 점주 70명의 민원인이 사발 형태의 동그라미로 이름을 쓰고 서명을 했다는 사실입니다. 일반적으로 민원서류를 고문서 상으로는 소지(所志)라고 하는데 사발 형태로 서명 날인한 것은 이들 공인(貢人)들의 문서가 처음이 아닐까 합니다. [사진] 육의전 사발소지 이렇게 한데는 남다른 사정이 있지요. 민원의 주동자를 대방(大房) 혹은 관부에 드러내놓고 싶지 않은 것이 그 이유였습니다. 관부 혹은 상인연합회장의 처벌 혹은 불이익을 공동으로 받되 그 주동자를 보호하기 위한 수단이었습니다. 그 옛날 동학농민운동 시절 일본인에게 그 대표자(접주)를 숨기기기 위한 방편으로 사발통문이란 것이 존재하였지만 상인들 사이의 ‘사발 소지’는 처음 소개되는 것입니다. 어려운 시절 상인들의 생존전략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게 여겨집니다. 요즘 역사교과서 국정화 논란이 뜨겁습니다. 역사책에 이데올르기가 지나치게 개입되어 비롯된 것이 아닌가 합니다. 우리 역사책에는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는 노비층과 농민 그리고 오늘 소개한 상인들의 문제와 그들의 삶의 문제는 너무도 소략하게 취급합니다. 이들 다양한 계층의 삶이 곧 민생이고 민생을 주로 기술하는 교과서가 되어야 전체 한국사라고 할 수 있는 것이지요. 한푼 이윤을 남기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사발 민원을 올리며 생존 전략을 세우는 이들 상인들이야말로 역사의 주인공으로서 비중있게 다루어야 하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