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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의 문화를 찾아서
 
한국학중앙연구원 온라인소식지 08월호 A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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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KS 이 땅의 문화를 찾아서
 
이 땅의 문화를 찾아서 - 세계해전사의 전무후무한 대승을 거두다. 명량대첩은 13척의 배로 10배 이상의 적을 크게 이긴 싸움으로 정유재란의 대세를 바꾸고, 이후 왜군이 서해로의 진출을 포기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싸움은 세계해전사의 전무후무한 대승이었고, 조선은 명량대첩 이후 해상권을 회복하였다. [사진] 이순신의 명량대첩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진도군 고군면 벽파리에 세운 이충무공 벽파진 전첩비. - 바다와 육지가 힘을 모아. 명량대첩에 대한 이해를 보다 확장하기 위해서는 해전 자체만을 놓고 전승의 요인을 분석해서는 안 될 것이다. 명량해전을 전후한 시기에 있어서 해남, 강진, 영암 일대에서는 왜군이 각지에 주둔하고 있었으며, 동시에 조선의 의병전도 그만큼 활발하였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따라서 가까운 육상에서 전개된 연해 지역민의 항전이 전황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므로 명량대첩을 가능케 한 또 하나의 요인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명량해전이 있었을 무렵 가까운 연해지역에서는 영암의 전몽성·류장춘·박문립 등을 중심으로 한 의병부대의 활동이 수군과의 긴밀한 협력 아래 펼쳐지고 있었으며, 강진과 해남 일대에서도 역시 활발한 의병활동이 전개되었다. [동영상] 진도군에서는 명량대첩을 이끈 이순신을 기념하기 위해 울돌목에 초대형 동상과 기념 공원을 조성했다. 이순신 역사공원 기공식 동영상 바로가기 - 민중의 힘으로 얻은 전투의 승리. 대첩을 가능하게 한 주된 요인이 해역의 특성과 조류를 이용한 관방전술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한 지휘관만의 전술능력에 기인한 것으로 해석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명량에 최후방어선을 구축한 것부터 현지의 실정과 지리에 밝은 지역출신 인사들의 책략에 기인한 것이었고, 이 해전의 전투요원들 대부분이 당해 연해지역 주민들이었다고 볼 때 누구보다도 현지 사정에 밝은 그들이 관방에 익숙해 있었음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특히 회령포에서 진도 벽파진으로 군진을 옮겨 17일간 머물렀으니 전투준비가 모두 여기에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 때 참여한 수군의 대부분은 전라우수영 관내, 특히 진도와 해남, 영암지역 출신들이 대다수를 차지하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향선을 이용하여 피난길에 오른 우수영 관내 피난민들도 일부 포함되었을 것이다. [사진] 이순신과 전라도 민초들의 구국정신을 기리기 위해 명량대첩축제가 열린다. - 지역민이 하나 되어 나라를 구하다. 명량대첩은 자보의식(自保意識)으로 결집된 현지의 지역민들이 수군지휘부와 결합, 지형지물을 십분 활용하여 싸운 자전자수(自戰自守)의 결과였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해전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피난선을 전선으로 활용, 피난민들이 전장에 뛰어들어 전투를 함께 하였다는 점에서 향보성(鄕保性) 의병항전의 성격을 띤 해전이었다고 할 수 있다. [사진] 조선을 침략한 왜군을 물리친 명량대첩은 자랑스러운 우리 역사의 한 장면이다. 사진출처 : 전라남도 명량대첩축제 명량대첩 연결 항목 바로가기 디지털진도문화대전 홈페이지 바로가기 Tip.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이란?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은 전국 230개 시·군·구 지역의 다양한 향토문화 자료를 발굴․수집, 연구․분석하여 체계적으로 집대성하고, 이를 디지털화하여 인터넷을 비롯한 다양한 정보 통신 매체를 통해 서비스하며, 이용자가 또 새로운 지식의 생산자가 되는 순환형 지식정보시스템을 구축하는 대규모 문화 콘텐츠 편찬사업입니다. 이는 그간 미진했던 전국의 향토문화 자료의 보존 및 계승의 대책 마련과 체계적이고 종합적인 지역문화 정리사업의 필요성에 의해 추진되는 사업으로서, 지식·문화산업의 기반을 마련하고, 지역 간 균형 발전과 지역 경제 활성화에 기여하며, 인터넷을 통해 전국 향토문화의 세계화를 이루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홈페이지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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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진도문화대전」속으로의 여행 1부 한국학중앙연구원의 대표적인 사업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그중 전라남도 진도 지역 정보를 총망라한 「디지털진도문화대전」을 소개합니다. [그림] 디지털진도문화대전 홈페이지 화면「디지털진도문화대전」(http://jindo.grandculture.net)은 전라남도 진도군의 디지털 백과사전으로, 진도의 역사와 문화를 비롯한 모든 정보를 집대성하여, 인터넷을 통하여 누구든지 이를 쉽게 활용할 수 있게 제작되었습니다. 2004년 9월부터 2005년 2월까지 전남대학교에서 선행조사를 통해 진도군의 향토문화 자원을 조사ㆍ분석하는 작업을 진행하였습니다. 이후 2005년 8월 진도군과의 협약, 텍스트 데이터 제작 및 시청각 자료 수집 사업(2005년 11월~2006년 9월, 전남대학교), 진도 지역 마을항목 현장조사 연구 사업(2005년 12월~2006년 7월, 전남대학교), GIS 제작 사업(2006년 8월~2006년 12월, (주)멀틱스), 서비스시스템 개발 사업(2006년 9월~12월, (주)애듀미디어, (재)광주정보문화산업진흥원, 한국예총진도지부, (주)에듀시티)이 수행되었습니다. 2004년 9월부터 2006년 12월까지 약 2년에 걸친 작업 기간을 통해 월고 집필, 멀티미디어 제작, 서비스 시스템 구축 사업이 진행되었고, 총 1,618개의 항목, 원고지 10,420매, 사진과 동영상 등 총 2,814종의 멀티미디어 자료를 담고 있습니다. 디지털 콘텐츠로 구축된 정보는 지역별 사이트와 대형 민간 포털(네이버, 다음, 구글 등)을 통해 이용자들이 손쉽게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그럼 진도에 대해 알아보는 여행을 떠나실까요? 세계 해전사에 길이 남을 명량대첩 1597년(선조 30) 9월 정유재란 때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명량해협(울돌목)에서 일본 수군을 대파한 명량대첩. 1597년 일본이 다시 조선을 침략하여 정유재란이 일어났다. 그해 1월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은 모함을 받아 하옥되었고, 원균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왜의 수군과 싸웠으나 다대포와 칠천량에서 대패하였다. [사진] 명량대첩은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울돌목에서 왜군을 격파한 해전이다. - 백의종군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로 사태가 긴급해지자 조정은 그해 7월 백의종군 중인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하였다. 이때 남아 있는 전력은 전선 13척과 수군 120명뿐이었다. 일본 수군은 한산섬을 지나 남해안 일대에 침범하면서, 육상 진출과 동시에 서해로 진출하려 하였다. 이에 이순신은 서해 진출의 물목이 되는 명량을 지키기 위해 이진·어란포 등을 거쳐, 8월 29일 벽파진[전라남도 진도군 고군면 벽파리]으로 이동하였다. 일본 수군은 벽파진에 몇 차례 기습공격을 해왔으나 조선 수군의 철저한 경계망에 걸려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사진] 나라의 긴급한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백의종군이던 이순신이 나서게 된다. - 전투의 시작 1597년 9월 14일 적선 55척이 어란포에 정박하자, 적의 정세를 탐지한 이순신은 명량을 등 뒤에 두고 싸우는 것이 매우 불리하다고 판단하였다. 그리고는 9월 15일 조선 수군을 우수영[전라남도 해남군 문내면]으로 옮겨 명량을 앞에 두고 진을 설치했다. 다음 날인 16일 이른 아침 적선 133척이 명량을 거쳐 우수영 앞바다로 돌진해오면서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되었다. [동영상] 울돌목은 진도군 군내면과 해남군 문내면 사이에 있는 좁은 해협이다. 명량해협 동영상 바로가기 - 지형을 이용한 이순신의 전략 명량은 간만 때 바다가 소리를 내며 급류하는 좁은 목이었으므로, 이순신은 좁은 목과 조류를 이용해 적은 수의 전선으로 많은 수의 적선과 대치하고자 했다. 9월 16일 새벽 왜의 수군 133척이 명량으로 진입하자, 이순신은 일자진(一字陣)을 형성해 적을 향해 돌진하면서 현자(玄字)·지자(地字)의 총통을 쏘면서 공격했다. 군사력은 왜군이 압도적으로 우세했지만 이순신은 후퇴의 기미를 보이지 않았으며, 마침 북서류하던 해류가 점차 남동류로 바뀌어 상대적으로 조선군에게 유리해졌다. 이때 안골포해전에서 투항했던 왜군 준사가 왜군 장수 구루시마 미치후사[來島通總]를 가리켜주자, 이순신은 그를 끌어올린 뒤 목을 베어 높이 매달았다. 이에 왜군이 분노해 일제히 덤벼들자 이순신은 총통과 불화살을 쏘아대며 방향이 바뀌는 조류를 이용해 공격함으로써 적선 31척을 격파했고, 나머지 적선은 달아났다. [사진] 유리병의 목처럼 갑자기 좁아진 서해의 길목 울돌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