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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학중앙연구원 온라인소식지 08월호 A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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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엄친아 [사진] 백영빈(한국학중앙연구원 연구원) 장서각에서는 지난 6월 29일 연구원 개원기념 행사에 맞추어 특별 전시전을 개막하였다. 이 전시전의 타이틀은 <시권, 국가경영의 지혜를 듣다>로 올해 11월말까지 시권 및 관련 자료들을 전시할 예정이다. 주지하다시피 시권(試券)은 전통시대의 과거 시험장에서 써서 낸 답안지이다. 시험 답안지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성적이 매겨지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성적(成績)이라 함은 과목별 답안지의 점수와 그 응시생의 석차[등수]를 말한다고 볼 수 있다. 지금도 국어 85점, 수학 80점, 역사 90점이라 하고, 한 반 45명 中 2등 또는 전교 500명 中 15등이라 하듯이 전통시대에도 똑같았다. 《경국대전(經國大典)》  제과조(諸科條)를 들추지 않고 현재 전시되어 있는 실물 시권만 보더라도, 대개 답안지의 오른쪽에 큼지막한 글씨로 그 점수가 적혀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三上[李滉 鄕試]’ ‘次上[丁若鏞 抄啓親試]’ 등은 시험 점수이고, ‘一之一[宋時烈 生員試]’ ‘三之二’[權橃 文科] 등은 응시생 등수이다. [사진] 송시열의 생원시 장원 시권. 시권 오른쪽에 ‘一之一’이 보인다. 과거시험 제도에 대해 약간 부연하자면, 한 회의 시험은 문과의 경우 초시(240人)-복시(33人)-전시(33位)의 3단계를 거치는데, 초시와 복시는 다시 초장(初場)·중장(中場)·종장(終場)의 과정이 있었다. 즉 전시 시험까지 마친 자(과거급제자)는 총7장(이상)의 시권을 제출하게 된다.【소과의 경우는 초시(700人)-복시(100人) 2단계에 각각 한차례 시험만 치른다. 그러므로 제출된 시권은 총2장뿐이다.】 각각 제출된 시권에는 그 위에 점수가 매겨져 있지만, 등수가 적혀 있는 것은 당연히 마지막 시권뿐이다. 최종합격자에게는 문과나 무과를 막론하고 합격증명서인 홍패(紅牌)를 주었다. 【소과 합격자의 경우는 백패(白牌)를 주었는데, 법전에서 생원시와 진사시의 시험 일자를 ‘隔一日’로 치르라고 명문해 놓아 수험생은 양쪽에 다 응시할 수 있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잘 정비된 DB 중의 하나인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을 한번 클릭만 해보면, 조선시대 과거의 꽃인 문과(文科)에 대해 일목요연하게 볼 수 있다. 1393년(태조 2)부터 실시되어 1894년(고종 31)까지 502년 동안 총 804회의 시험이 있었고, 15,151명의 합격자 정보를 담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문과의 예비단계라고 할 생원시(生員試)에 대해서는 232회 20,497명, 진사시(進士試)에 대해서는 213회 21,763명 합격자 정보를 담고 있다. 이를 통해 보자면, 과거시험과 관련한 조선시대 명문가로서 여흥민씨(驪興閔氏) 가문은 1597년(선조 30) 민기(閔機)에서부터 1880년(고종 17) 민영일(閔泳一)까지 연속하여 10대에 걸쳐 문과 급제자를 배출하였고, 나주정씨(羅州丁氏) 가문에서는 정자급(丁子伋)에서부터 정약용(丁若鏞)에 이르기까지 10세(世)가 문과 급제는 물론 조선시대 대표적 청현직(淸顯職)인 옥당(玉堂)의 직임을 맡았다. 그리고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의 경우 본인과 두 아들 및 여덟 손자 총11명 중 손자 1명을 제외한 10명이 모두 문과에 급제하였다.(당시 집안은 엄청난 명성을 누렸을 것이지만 未급제한 1명의 손자가 받았을 중압감은 상상하기도 어려울 듯하다.) 또 장원은 아니더라도 3형제가 동시에 문과에 급제한 사례로 중종 때의 안당(安瑭), 광해군 때의 이덕홍(李德弘), 정조 때의 조운기(趙雲紀) 아들 3형제가 있다. 그렇다면 개인으로는 누가 조선시대의 엄친아이었는가? 다른 회차의 시험을 동일하게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장원급제한 횟수나 등수로 비교해 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수 있을 것이다. 조선시대의 천재로서 당시에 ‘구도장원공(九度狀元公)’이라고 불린 율곡(栗谷) 이이(李珥)는 현재 방목 기준으로 보면, 29세(1564) 때 생원시에서 장원, 진사시에서 3등12위, 문과에서 장원을 하였다. 그리고 세종조(世宗朝) 때 저헌(樗軒) 이석형(李石亨, 현손이 월사 이정구이다)은 27세(1441) 때 생원과 진사시 및 문과에서 모두 장원을 하였고, 또 33세(1447) 때 중시(重試)에서도 을과2등을 하였다. 이석형의 초시·복시 성적을 지금 확인할 길이 없지만, 최종 성적만 놓고 본다만 최고 우등생이 아닌가 싶다. 하지만 이런 이석형도 중시에서 성삼문(成三問)에게 장원을 놓쳤으니, 예나 지금이나 ‘엄마 친구의 아들’은 내 속에 잠재되어 있는 숙명의 라이벌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