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보기 맨위로
 
이 땅의 문화를 찾아서
 
한국학중앙연구원 온라인소식지 05월호 AKS
 
커버스토리
한중연소식
옛 사람의 향기
이 땅의 문화를 찾아서
한국학 연구동향
세계와 함께하는 한국
새로 나온 책
뉴스 라운지
되살리는 기록유산
틀린 그림 찾기
한국학중앙연구원 페이스북 페이지 한국학중앙연구원 트위터
AKS 옛 사람의 향기
 
연구원 홈페이지 한국문화교류센터 Newsletter 한국학진흥사업단 Newsletter 관리자에게
조선 태종비 원경왕후의 성공과 좌절, 그리고 『원경왕후육촌계(元敬王后六寸契)』 [사진] 정해은(한국학중앙연구원 책임연구원) 조선 태종의 정비 원경왕후 민씨(元敬王后 閔氏, 1365〜1420)는 개경에서 손꼽히는 명문가 출신이었다. 아버지는 여흥부원군 민제이며 어머니는 송씨다. 나이 18세에 두 살 아래인 이방원(후일의 태종)과 혼인했다. 당시 새로운 세력으로 부상하고 있던 이성계가 정계 기반을 넓히는 과정에서 선택한 집안이니 그 명성과 사회 기반이 어떠했을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태조가 왕자들에게 관할하는 군사들을 혁파하라는 명을 내리자 이방원은 무기를 불태웠다. 하지만 민씨는 달랐다. 민씨는 후일을 도모하기 위해 무기와 군마를 준비해두었다. 이 조치로 이방원은 두 차례 왕자의 난에서 승자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후일 태종이 세종에게 “사직을 세울 때 너의 어머니 도움이 매우 컸는데, 그 동생들과 함께 갑옷과 병기를 정비해 기다린 공이 그 무엇보다도 크다.”(『연려실기술』)고 말할 정도였다. 민씨의 성공과 보람은 여기까지였다. 이방원이 왕위에 오르자 냉혹한 현실을 직면해야 했다. 그 첫 번째가 후궁이었다. 태종은 왕실의 안정을 도모한다는 명분으로 재위기간 동안 후궁을 무려 19명이나 들였다. 원경왕후의 어머니 송씨가 “후궁이 너무 많아 그것이 점점 두렵다.”고 우려할 정도였다. 원경왕후도 태종이 왕위에 오르기까지 어려운 시절을 함께 했기에 이런 처사를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그래서 “임금께서는 어찌하여 예전의 뜻을 잊으셨습니까? 제가 임금과 함께 어려움을 지키고 같이 어려움을 겪으면서 나라를 차지했는데, 이제 나를 잊음이 어찌 여기에 이르셨습니까?”(『태종실록』)하고 호소했지만 허사였다. 오히려 천성이 투기가 많은 여성으로 몰리고 말았다. 원경왕후를 더 깊은 슬픔에 빠트린 일은 가족에게 닥친 참화였다. 양녕대군의 혼사 문제를 태종 모르게 아버지와 의논한 일이 화근이었다. 결국 이 일이 발단이 되어 남동생 두 명이 유배에 처해졌다. 아버지 민제도 이 일로 몸져누었다가 세상을 떴다. 민제는 태종이 왕이 된 뒤에도 ‘선달(先達)’이라 부르고 태종도 민제를 ‘사부’라 존칭할 정도로 신뢰가 두터운 사이였다. 그 신뢰만큼 태종에 대한 분노와 낙담도 컸을 것이다. 아버지가 세상을 뜬지 1년 만에 두 남동생이 유배지에서 목숨을 잃고, 6년 후에 다른 두 남동생마저 유배지에서 죽고 말았다. 18세에 혼인해 36세에 왕비가 된 원경왕후는 18여 년 동안 앞만 보고 달려왔다. 숨 가쁘게 격변하는 환경에서 남편 성공을 본인의 성공으로 여기면서 달려온 세월이었다. 하지만 목적을 달성하자마자 성공은 갈등의 씨앗이 되었다. 원경왕후는 왕비가 된 이후 태종과 의논하지 않고 벌인 일들이 있었다. 아버지와 양녕대군 혼사를 의논한 일, 태종이 거둥한 틈을 타서 동생 부인을 궁궐로 불러들인 일, 태종이 총애한 후궁을 혹독하게 다룬 일 등이었다. 이 일들이 국왕 권위에 도전한 사건으로 비화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심지어 이 일들로 폐비(廢妃)의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원경왕후는 태종이 가진 권력을 함께 할 자격이 있다고 여긴 듯하다. 그러나 태종은 권력을 나눌 생각이 없었다. 원경왕후는 왕비가 되면서 역설적으로 생애에서 가장 찬란한 시절을 종결지었다. 원경왕후에 대해 못내 아쉬운 점은 국왕과 왕비의 간극을 깨닫지 못하고 왕비의 권한과 제약을 빨리 파악하지 못한 점이다. 변화에 대처해 ‘적응’하는 것은 ‘순응’이 아니다. 이것이 원경왕후를 통해 배우는 역사의 교훈이다.원경왕후와 그 가족의 비극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조선시대 왕과 왕비, 세자빈의 친족을 수록한 『돈녕보첩(敦寧譜牒)』에 원경왕후의 남자형제 및 그 후손들이 제대로 수록되지 못한 것이었다. 태종 당시 참화로 집안이 풍지박살이 났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여흥 민씨 집안의 인현왕후(仁顯王后:숙종 계비, 1667〜1701)가 왕비가 되고나서야 숙종 연간에 원경왕후의 남자 형제들의 세계(世系)가 정리되었다. 오늘날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는 『원경왕후육촌계(元敬王后六寸契)』가 소장되어 있다. 태종은 왕이 되기 전에 종족끼리 어려움을 함께 나누고자 본인을 비롯해 원경왕후의 아버지이자 장인 민제의 내외손 6촌 이내로 계를 만들었다. 이 자료는 당시 육촌계에 든 명단을 베끼고, 뒷부분에 외손 중 현달한 인물들을 소개하는 <외예달인록(外裔達人錄)>과 청주 곽씨 세보를 실었다. 현재 『원경왕후육촌계』의 편찬 시기는 정확하지 않다. 다만 수록 인물 및 간지(干支) 등으로 추정해보면 숙종 연간으로 여겨진다. 『돈녕보첩』에 원경왕후 친족들의 세계가 정리될 즈음에 만들어진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원경왕후육촌계』는 원경왕후와 그 친족들이 모진 세월을 거쳐 후대에 어떻게 되살아나는지를 알려주는 흥미로운 자료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도면에 대한 설명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놀라운 사실이 그 이면에 숨겨져 있다. 1929년 조선총독부는 전국에 산재한 왕실 자녀들의 태실을 지금의 파주 서삼릉(西三陵)으로 옮기는 일을 추진했다. 태실 안에 있던 태를 담은 항아리와 지석(誌石)을 빼내어 옮겨 묻는 일이었다. 겉으로는 전국의 태실을 안전하게 통합 관리해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왕조의 정기를 끊기 위한 속셈이 깔려 있었다. 그리고 궁궐에 있던 태봉까지도 예외 없이 찾아내어 서삼릉으로 옮겼다. 이 도면은 1929년, 궁궐 안에 있던 세 곳의 태봉을 봉출해 간 자리를 그린 것이 된다. 이러한 사실은 장서각의 필사본 도서인 『태봉 胎封』에 상세한 기록이 있어 그 실상을 알게 된다.  창덕궁에 위치가 확인된 것은 영왕과 덕혜옹주, 고종 제8남의 태실 등 세 곳뿐이다. 현재 세 분의 태실은 서삼릉으로 가있지만, 태항아리는 국립고궁박물관 수장고에 있다. 있어야 할 자리를 지키지 못했지만, 태실은 왕조의 번창과 생명 존중의 뜻이 담긴 조선왕실의 주요 유적이 아닐 수 없다. 창덕궁의 태봉이 있던 자리에 작은 표석 하나 세우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 아닐까. 도 3. 동궐도, 견본채색, 584×273㎝, 고려대 박물관 도 1 에 그려진 공간을 동궐도에 표시하면 붉은색 원이 있는 지점임.  창덕궁의 후원( 後園) 이자 일제강점기 때 비원( 秘苑) 으로 불린 장소다. 민씨는 혼인 후 10여 년 동안 시아버지 이성계가 새 왕조를 창건하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이 경험을 자양분으로 삼아 남편과 한 뜻으로 태조 이후의 대권을 향해 내달렸다. 민씨의 강인한 정신력은 이방원에게 지속적인 에너지를 제공했다. 민씨는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방원이 정도전을 숙청하는 과정에서 화를 당했다고 오인한 민씨는 함께 죽을 각오로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전장으로 향했다. 나중에 정도전이 피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서야 발길을 되돌릴 만큼 의지가 강한 여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