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보기 맨위로
 
이 땅의 문화를 찾아서
 
한국학중앙연구원 온라인소식지 12월호 AKS
 
커버스토리
한중연소식
옛 사람의 향기
이 땅의 문화를 찾아서
한국학 연구동향
세계와 함께하는 한국
새로 나온 책
뉴스 라운지
되살리는 기록유산
틀린 그림 찾기
한국학중앙연구원 페이스북 페이지 한국학중앙연구원 트위터
AKS 이 땅의 문화를 찾아서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홈페이지 바로가기TIP)『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이란?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은 전국 230개 시·군·구 지역의 다양한 향토문화 자료를 발굴․수집, 연구․분석하여 체계적으로 집대성하고, 이를 디지털화하여 인터넷을 비롯한 다양한 정보 통신 매체를 통해 서비스하며, 이용자가 또 새로운 지식의 생산자가 되는 순환형 지식정보시스템을 구축하는 대규모 문화 콘텐츠 편찬사업입니다. 이는 그간 미진했던 전국의 향토문화 자료의 보존 및 계승의 대책 마련과 체계적이고 종합적인 지역문화 정리사업의 필요성에 의해 추진되는 사업으로서, 지식·문화산업의 기반을 마련하고, 지역 간 균형 발전과 지역 경제 활성화에 기여하며, 인터넷을 통해 전국 향토문화의 세계화를 이루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매괴박물관 동영상 연결 항목 바로보기 충청북도 천주교 발상지,감곡매괴 성모순례지성당 관련 항목 바로가기 디지털음성문화대전 홈페이지 바로가기 선비 정신이 깃든 음성의 전통건축물 관련 항목 바로가기 누정(樓亭)은 자연 경관이 아름다운 곳을 택해 주변 경관을 감상하면서 휴식을 취하거나 즐기기 위해 지어진 공간 건축이다. 사방을 바라볼 수 있도록 마룻바닥을 지면에서 한층 높게 지은 다락집이라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누정은 누각(樓閣)과 정자(亭子)를 포괄하여 부르는 용어로서 정루(亭樓)·정각(亭閣)·정사(亭榭)라고도 부른다. 음성군 지역에는 현재 백련서재, 경호정, 충효정 등의 누정이 남아 있다. 부록: 충청북도 천주교 발상지,감곡매괴 성모순례지성당 [사진] 감곡성당 [사진] 충효정 5. 자연을 즐기는 여유 공간, 누정4. 선현 제향과 풍속 교화의 공간, 사우 사우(祠宇)는 선조 혹은 선현의 신주나 영정을 모셔두고, 주기적으로 제향하는 장소이다. 사우는 조선 중기 이래 서원의 발흥과 더불어 확산되기 시작하였다. 사우는 서원과 달리 처음부터 사현(祀賢)과 풍화(風化)만을 목적으로 하였다. 사우는 보본숭현(報本崇賢)에서 비롯되었고, 특히 그 지방에서 공이 있는 인물에 대한 보답과 사현(祀賢)을 통한 향촌민 교화에 목적을 두고 있었다. 서원·사우라는 명칭은 배향 인물의 위상에 따라 구별되었는데, 서원이 사우보다 격이 높은 것으로 간주되었다. 음성군의 대표적인 사우로는 태교사(泰喬祠)가 있다. [사진] 당산 입구에서 방울진 하는 모습 2. 유교 이념의 교육 공간, 향교 향교는 유교 문화를 바탕으로 설립·운영된 교육 기관으로, 국가가 유교 이념을 보급하기 위해 중앙의 성균관(成均館)과 연계시켜 지방에 세웠다. 향교 건축의 일반적 공간 구조는 대성전(大成殿), 명륜당(明倫堂), 동·서재(東·西齋), 교직사(校直舍)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향교는 선현의 배향과 학생의 강학을 기능으로 하는 만큼 대성전과 명륜당이 핵심 공간이 된다. 동재(東齋)와 서재(西齋)는 교생들이 공부하고 숙식하는 건물로 온돌방과 대청 또는 온돌방만 두는 것이 일반적이며, 익공(翼工) 양식과 민도리집 양식으로 건축된다. 음성향교는 1560년(명종 15) 3월 10일에 음성현 석인동에 창건되었으나 1592년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 1647년(인조 25) 현재의 음성읍 읍내리 향교말 옥녀봉 밑으로 이건되었다. 명륜당은 1651년(효종 2), 1870년(고종 7), 1887년(고종 24)에 각각 증수하였다. 1976년 내삼문과 대성전이 보수되었고, 1978년 명륜당과 동·서재를 증수하고 교직사(校直舍)도 신축하였다. 충청북도 음성군 읍성읍 읍내리 향교말 156-1번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1981년 12월 26일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04호로 지정되었다. 3. 소박함과 간결함의 연구 공간, 서원 [사진] 음성향교 [사진] 음성향교 추계 석전대제에서 제향하는 제관의 모습 서원은 성리학의 연구와 교육을 목적으로 지방에 세워진 사학 기관이다. 서원 건축의 공간 구성은 선현의 제사를 지내는 사당(祠堂), 선현의 뜻을 받들어 교육을 실시하는 강당(講堂), 원생(院生)·진사(進士) 등이 숙식하는 동·서재 등 3가지로 나누어진다. 이 외에 문집이나 서적을 펴내는 장판고(藏版庫), 책을 보관하는 서고, 제사에 필요한 제기고(祭器庫), 서원 관리와 식사 준비 등을 담당하는 고사(庫舍), 시문을 짓고 답하는 누각 등이 있다. 충청북도 음성군 삼성면 용성리에 있는 운곡서원(雲谷書院)은 충청북도 문화재자료 제11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음성군 유림회에서 관리하고 있다. 본래는 1602년(선조 35) 충주목사 정구(鄭逑)가 이미 있던 백운서당에 주자를 배향하여 백운동서원으로 창설하였다. 1661년(현종 2)에 정구가 추가로 배향되었고 1676년(숙종 2)에 운곡(雲谷)이라는 사액을 받았다. [사진] 지천서원 공자당 음성군 생극면 팔성리에 위치한 지천서원(知川書院)은 이조판서를 지낸 십청헌(十淸軒) 김세필(金世弼)이 벼슬에서 물러난 뒤 팔성산 아래에 초옥을 짓고 후학을 교육하였는데 이것이 지천서원의 시초가 되었다. 1868년(고종 5) 훼철되었다. 유림과 후손들이 1893년에 축단하고 향사하다가 1906년 재건하였다. [사진] 운곡서원 [사진] 백련서재 [사진] 경호정 감곡성당은 1896년 프랑스 임가밀로 신부에 의해 충청북도에서는 첫번째, 국내에서는 18번째로 세워진 성당이다. 일제강점기에는 문맹 퇴치를 위해 매괴학교를 설립하여 우리 청년들에게 민족의식을 심어준 성당이기도 하다. 또한 감곡성당은 100여 년간의 한국 천주교와 감곡성당의 발자취가 담겨있는 각종 유물들이 전시하고 있어 한국 천주교사 뿐만 아니라 우리 근대사에 많은 영향을 준 역사적인 장소이다. 충청북도에서는 서양식 건물로는 처음으로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88호로 지정되었다. 감곡성당은 설립 당시부터 기적이라고 생각될 만한 일들이 많았다. 전해지는 일화로는 6·25전쟁 때 감곡성당이 인민군의 임시 요새로 사용된 적이 있었는데 이때 인민군은 성당 위에 모셔진 성모상을 총을 쏴서 깨어버리려 하였으나 총알이 무려 7발이나 성모상을 관통하였는데도 성모상이 깨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이에 망치로 성모상을 깨어 버리려 하자 성모상이 눈물을 흘려 그 인민군이 성모상을 훼손할 수 없었다고 한다. 또한 감곡에서 장호원으로 이르는 다리를 끊기 위해 비행기 폭격이 엄청나게 많았지만 이 역시 끊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주변 사람들은 이를 성모님의 기적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감곡성당은 2006년 10월 7일 수원교구의 남양 성모 순례지 성지에 이어 한국천주교 사상 2번째로 성모 순례지 성지로 정식 선포되었다.‘ [사진] 매괴박물관 동영상 화면
연구원 홈페이지 한국문화교류센터 Newsletter 한국학진흥사업단 Newsletter 관리자에게
[사진] 김주태 가옥 동영상 화면[사진] 음성 팔성리 고가 동영상 화면 「디지털음성문화대전」속으로의 여행 2부 한국학중앙연구원의 대표적인 사업『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그 중 충청북도 음성 지역 정보를 총망라한 「디지털음성문화대전」을 소개합니다. [그림]「디지털음성문화대전」홈페이지 화면 「디지털음성문화대전」(http://eumseong.grandculture.net/)은 충청북도 음성군의 디지털 백과사전으로, 음성의 역사와 문화를 비롯한 모든 정보를 집대성하여, 인터넷을 통하여 누구든지 이를 쉽게 활용할 수 있게 제작되었습니다. 2006년 11월 음성군과의 협약을 통해 추진된 이 사업은 본사업에 앞서 2006년 6월부터 같은 해 12월까지 선행조사연구를 통해 용인시의 향토문화 자원을 조사ㆍ분석하는 작업이 진행되었습니다.  이후 음성 지역 마을 항목 콘텐츠 제작 사업(2006년 12월~2007년 6월, 음성문화원), 텍스트데이터 제작 및 멀티미디어 자료 수집 사업(2006년 12월~2007년 11월, 음성문화원), 콘텐츠 제작 사업(2007년 12월 2008년 8월, ㈜충청미디어 컨소시엄, ㈜에듀씨티), 서비스 시스템 개발 사업(2008년 6월~10월, ㈜애듀미디어)이 수행되었습니다.  2006년 6월부터 2008년 10월까지 약 2년에 걸친 작업 기간을 통해 선행조사연구, 마을 항목 콘텐츠 제작, 텍스트데이터 제작, 멀티미디어 자료 수집, 콘텐츠 제작, 서비스 시스템 개발 사업이 진행되었고, 총 1,970개의 항목, 원고지 14,194매, 사진과 동영상 등 총 2,150종의 멀티미디어 자료를 담고 있습니다. 디지털 콘텐츠로 구축된 정보는 지역별 사이트와 대형 민간 포털(네이버, 다음, 구글 등)을 통해 이용자들이 손쉽게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그럼 음성에 대해 알아보는 여행을 떠나보실까요?지장보살의 염원을 담은 미타사 가섭산에서 동쪽으로 뻗어 내린 산줄기의 동남향 골짜기에는 음성군에서 가장 큰 사찰이자 가장 많이 알려진 사찰, 미타사가 자리 잡고 있다. 충주와 청주를 잇는 국도 36호선으로 가다 보면 동양 최대 크기의 지장보살입상이 금방 눈에 띈다. 관광객들의 발걸음은 자연스럽게 미타사로 옮겨지는데, 마치 지장보살의 중생 구제에 의 강렬한 염원이 사람들을 미타사로 이끄는 것 같다. [사진] 음성군 소이면 비산리에 위치하고 있는 미타사의 모습 전하는 바에 의하면 신라 진덕여왕 때 원효대사가 창건하였다고 하지만, 이를 확인할 수 있는 문헌 자료나 유물 자료는 전혀 없다. 절 입구 암벽에 조각된 마애불이 고려 후기의 작품으로 추정되고 있어 고려시대에 사찰이 있었던 것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당시 절의 이름은 알 수 없고, 조선시대에는 이미 폐사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 미타사 측에 의하면 옛 절 이름이 ‘유룡사’였다고 하나 명확한 근거는 없다. 미타사 측에서 제공한 미타사의 기원은 다음과 같다.“1300년 전인 630년(진덕여왕 8)에 원효대사에 의해 창건되었다. 창건 이후 고려시대 도선국사와 조선시대 무학대사·사명대사 등 여러 대덕 스님들에 의해 몇 차례 중건되었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당시 각성대사가 의병 3천 명을 모집, 항마군으로 출정하여 호병(胡兵)을 물리친 공을 세워 나라에서 크게 중수하였으나 1742년(영조 18) 화재로 폐허가 되었다.” 현재의 미타사는 1964년 봄 수덕사의 비구니 명안이 찾아와 절을 다시 짓기를 염원하면서 수도에 정진하자, 마을 사람들이 미타사 창건 기성회를 조직한 데서 유래되었다. 1965년 4월에 흙벽돌을 쌓아 8칸 규모의 목조 와가의 불당을 세웠다. 1979년에는 사역(寺域)을 크게 확장하고 주전으로 극락전을 건립하고 그 서쪽에는 삼성각을 세웠다. 최근에 요사 1동과 식당, 납골당 등을 건립하였다. 미타사에 있는 전각과 모셔진 부처님들 극락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이 겹처마 다포집 팔작지붕의 목조 기와집으로 1979년에 건립되었다. 극락전에는 1965년에 제작한 석가여래좌상과 1980년에 제작한 아미타여래좌상·관세음보살상·대세지보살상이 봉안되어 있으며, 아미타극락후불탱화와 신중탱화가 걸려 있다.1. 극락전 [사진] 미타사 동영상 화면미타사 동영상 바로보기 4. 마애여래입상 삼성각은 극락전 서쪽에 동향으로 세워져 있는데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목조 기와집으로 1979년에 건립되었다. 삼성각 안에는 석조여래좌상이 봉안되어 있고 삼성각 중앙의 벽에는 칠성탱화를 걸고 그 좌우에 산신탱화와 독성탱화를 봉안하고 있다. 2. 삼성각 [사진] 미타사 석조여래좌상 동영상 화면 쌍봉사 철감선사 탑미타사 마애여래입상 동영상 바로보기 화순 쌍봉사 철감선사 탑은 868년 쌍봉사의 주지를 맡고 있던 철감 선사가 입적하자 이를 기리기 위해 건립된 것이다. 탑은 전체가 8각으로 이루어진 전형적인 신라 시대 부도로, 팔각 원당형의 격식을 제대로 갖추었다. 탑신에는 문비(門扉)와 사천왕 입상, 비천상 등이 조각되었고 옥개석은 기왓골을 조각하되 막새 기와까지 표현하여 목조 건축의 의장까지 보이는 등 석조 건축물로서는 물론 조각으로서도 극치를 보이고 있다. 5. 지장보살입상 지장보살의 원력으로 국태민안(國泰民安)을 꾀하고 모든 중생이 백팔참회(百八懺悔)를 통해 다생겁래(多生劫來)의 업장을 없애고 성불하기 바라는 뜻에서 높이 108척(41m)으로 동양 최대 크기로 조성되어 2000년 10월 4일 점안되었다. 3. 석조여래좌상 삼성각에 봉안되어 있는 석조여래좌상은 고려 후기 작품으로 추정된다. 이 석조여래좌상은 머리 부분과 양손이 파손되어 없어진 채 옛 절터에 방치되어 있던 것을 머리와 양손을 복원하여 삼성각에 봉안한 것이다. 양 팔의 형태로 보아 아미타정인을 취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미타사 석조여래좌상 동영상 미타사 입구의 서쪽 암벽에 동향으로 조각된 마애불이다. 수직의 편편한 자연 암면에 불신(佛身)을 도드라지게 새겼는데, 마애불 주변을 정으로 쪼아 깎아냄으로써 입상을 정조(整調)하였다. 불상의 머리 부분과 어깨 부분만 양각으로 처리하고 그 이하의 양손과 허리, 하반신 부분은 음각선으로 불상의 윤곽만을 나타냈다. [사진] 미타사 마애여래입상 동영상 화면 [사진] 미타사 지장보살입상 선비 정신이 깃든 음성의 전통건축물 음성의 전통가옥은 대부분이 조선시대의 건축물들이고, 유교적 특징이 강조되어 있다. 옛사람들의 생활 가옥이었던 고택들, 유교 이념을 교육하였던 향교, 유교 이념을 연구·전승하였던 서원들, 선현 제향과 풍속 교화의 장소인 사우들, 자연을 즐기는 여유가 담긴 누정들은 모두 조선의 시대정신이었던 선비 정신과 그에 입각한 건축미가 담겨진 전통가옥들이다. 이처럼 음성 지역에 유독 조선의 선비 정신이 깃든 전통가옥이 많다는 것은, 다른 어떤 지역보다 그 정신이 면면히 전승되면서 현대를 사는 음성군민에게 여전히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1. 옛사람들의 생활 공간, 고택 고택(古宅)은 궁궐·사찰·항교·서원 등과 같은 공공 건축물이 아닌 일반 사람이 사는 주택을 말한다. 고택은 고가(古家)라고 표현하기도 하며, 소유자의 이름을 따거나 혹은 소재지를 중시하여 명칭하기도 하고 거주하거나 거주했던 인물의 이름을 따서 명칭하기도 한다. 음성군 지역에는 현재 음성 김주태(金周泰) 가옥, 음성 공산정 고가, 팔성리 고가, 반기석 고가 등 중요한 고택이 남아 있어 전통 주택의 일면을 보여주고 있다. 이들은 그 문화적 가치와 보존의 중요성이 인정되고 있으며, 일부는 문화재로 지정·관리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