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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의 문화를 찾아서
 
한국학중앙연구원 온라인소식지 12월호 A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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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청각(臨淸閣)매매증서” - 400년 대종택을 팔아 독립자금을 대다. [사진] 허원영(국학자료연구실 연구원) 장서각은 민간으로부터 고서와 고문서 등의 문화재들을 기증·기탁 받아 관리, 연구하고 있다. 이는 개인들이 소장한 소중한 우리의 문화유산을 전문 인력과 관리시스템을 갖춘 장서각에서 보다 안전하게 보존·관리하고, 한국학의 기초자료로서 제공하기 위한 것이다. 장서각은 1997년 안동의 무실[水谷]종택을 시작으로, 지난 10월 15일 청주의 여흥민씨 등이 고전적과 유물들을 기증·기탁하기까지 18년 동안 꾸준히 기증·기탁 사업을 추진해 왔다. 그리고 그 결과로 현재 장서각 수장고에는 총 71처로부터 기증·기탁 받은 4만 7천 5백여 점의 고서와 고문서, 그리고 유물들이 안전하게 보관, 관리되고 있다. 기증·기탁 문화재들 중에는 국보 283호로 지정된 󰡔통감속편󰡕을 비롯한 18점의 국보·보물들이 존재한다. 이 외에도 원나라의 최후의 법전으로 전 세계 유일본인 󰡔지정조격󰡕을 비롯하여 수많은 중요 문화재들이 장서각에 맡겨져 있다. 가문의 가보요, 나라의 보물이고, 인류의 소중한 문화유산으로서 기증·기탁 문화재들의 가치는 이루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이 중에서도 필자가 특히 각별하게 생각하는 자료가 있는데, 2004년 안동 고성이씨 임청각에서 기탁한 4,966점 중 하나인 가옥매매문서가 그것이다. 1913년 이상희(李象羲)가 이종하(李鍾夏)에게 기와집을 매도하면서 작성한 이 문서는 그다지 오래되지도 않았고, 얼핏 보기엔 그리 중요해 보이지도 않는다. 그러나 역사적 맥락 속에서 확인할 수 있는 내용은 그렇지 않다. 그림1. 임청각매매증서 여기서 매도하고 있는 가옥은 다름 아닌 ‘임청각(臨淸閣)’의 건물 일부이다. 임청각은 보물 제282호로, 1510년대(중종 10) 경에 건립된 이래 500년 동안 안동 고성이씨가의 대종택으로 자리를 지켜온 건물이다. 당시 사가 주택으로는 가장 큰 규모라는 99칸 집으로 칭해졌으며, 고성이씨 뿐 아니라 일대의 중심적인 문화공간이기도 했던 임청각이다. 이 문서에서 임청각의 매도인으로 등장하는 중화민국 회인현의 이상희는 이상룡(李相龍, 1858~1932)의 초명이다. 고성임씨 임청각파의 17대 종손으로 임청각에서 태어난 임청각의 주인인 그가 1913년 6월, 400년을 지켜온 대종택을 팔아버리니, 이는 조선의 독립을 위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함이었다. 석주 이상룡선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국무령으로, 1962년 대한민국 정부에 의해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된 분이다. 1876년(고종 13) 강화도조약에 대한 충격으로 척사위정(斥邪衛正)을 시작하였고, 1895년(고종 32) 일제가 명성황후를 시해한 을미사변을 계기로 본격적인 의병항쟁에 돌입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과 뒤 이은 우리 민족의 의병투쟁이 일본군에 패배한 후,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민주제도 등 서양의 신학문을 적극 취하며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이즈음 임청각이 소유한 노비 문서를 불태우고 종들을 해방하니, 안동의 유가로서는 처음 있는 일이기도 하였다. 결국 1910년 8월 조선이 일제에 강제 병합되고 몇 달이 지난 1911년 정월, 석주 이상룡은 식솔과 자신을 따르는 50여 가구를 거느리고 서간도 망명길에 오른다. 망명 후 몇 달 지나지 않아 서간도 지역에서 독립운동의 근거지를 건설하니, 경학사라는 항일 자치 결사와 독립군 양성을 위한 신흥강습소의 설립이 그것이다. 경학사는 부민단을 거쳐 한족회로 개편, 발전하였고, 신흥강습소 역시 신흥무관학교를 거쳐 1920년 서로군정서 창립의 모태가 되었다. 그러나 1912~3년에 걸친 흉작은 이와 같은 서간도에서의 초기 활동에 운영난을 초래하였다. 와중인 1913년 6월, 석주의 아들 준형(濬衡, 1875~1942)이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다. 400년 종택인 임청각과 그 대지 및 인근 산판을 방매하기 위한 귀향이었고, 아버지의 초명인 ‘이상희’란 이름으로 가옥과 토지를 팔고 다시 서간도로 돌아갔다. 이 때 작성된 문서가 바로 이 ‘임청각매매증서’이다. 이 돈이 어디에 쓰였는지 정확하게 보여주는 기록은 없지만, 조선의 독립을 위한 소중한 자산이 되었음을 짐작하는 것은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다.그림3 . 석주 이상룡(1925년 상해임시정부 국무령 재직시)석주선생은 이후로도 서로군정서 독판, 상해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 등을 역임하며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매진하였으며, 우리 땅에 돌아오지 못한 채 1932년 만주 땅에서 생을 다하게 된다. 석주선생 뿐이 아니었다. 그 아들 준형과 손자 병화(炳華, 1906~1952)가 역시 독립운동에 헌신하여 애국장과 독립장에 추서되었고, 두 아우 상동(相東, 1865~1951)과 봉희(鳳羲, 1868~1937)가 또한 그러하여 애족장과 독립장에 추서되었다. 여기에 조카 등을 합치면 임청각 일가에서만 9명의 독립유공자를 배출하였으니, 항일독립운동을 볼 때 우리나라 최고의 명문가라 할 수 있을 것이다.임청각의 사람들이 독립운동에 헌신하는 동안 임청각은 이른바 ‘불령선인’이 다수 출생한 집이라 하여 핍박을 당했다. 1930년대 후반, 일제는 중앙선 철도를 연결하면서 굳이 노선을 꺾어 임청각의 경내를 가로질렀고, 결과로 50여 칸의 행랑채와 부속 건물을 철거당하기도 하였다.조국이 해방되고 임청각의 사람들이 임청각에 돌아왔지만, 형편은 여전히 어려워 입에 풀칠하기도, 학교를 다니기도 쉽지 않았다. 심지어 석주선생의 증손자인 이항증선생의 경우 고아원을 전전하기까지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임청각의 사람들은 학비와 생계를 위해서는 단 한 평의 토지, 단 한 칸의 가옥도 팔지 않고 최선을 다해 임청각을 지켜왔다.이제 임청각의 사람들은 500년을 지켜온 임청각과 임야 1만 2천여 평을 국가에 헌납하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다. 임청각이 단지 일개 가문의 종택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소중한 건축 문화재이자 독립운동의 역사 현장으로서 대한민국의 산 교육장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서이다. 그러나 석주선생의 자손이 일제의 호적을 거부함에 따라 4인의 친족에게 명의 신탁되어 70년간 방치됨으로써 불분명해진 소유권이 발목을 잡고 있다. 비슷한 시기, 다른 한 편에서는 송병준과 이완용 등 친일파 후손들이 국가를 상대로 토지환수소송을 제기하였다. 일신의 영달을 위하여 불의에 영합하고, 개인과 가문의 보존을 위하여 권력에 복무함으로써 식민지 조선의 지배층이 되고, 부와 권력을 누린 이들의 토지였다. 이제는 탐욕과 방종이 더 이상 낯설지 않고, 부끄러움을 아는 것이 오히려 어리석게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속에서도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것이 바로 석주선생과 임청각이 가지고 있는 진정한 명가로서의 가치 때문은 아닐까? 그림 . 임청각 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