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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학중앙연구원 온라인소식지 10월호 A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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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호 이익의 저술에 대한 성호학파 1세대의 사유 [사진] 강병수(연구정책실 수석연구원)) 성호학파 1세대 학인(學人)으로 성호학파의 종장인 이익(1681~1763)을 비롯하여 그의 문인들인 소남 윤동규(尹東奎, 1695~1773) • 하빈 신후담(愼後聃, 1702~1761) • 정산 이병휴(李秉休, 1710~1776) • 순암 안정복(安鼎福, 1712~1791) 등을 꼽는 것이 통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는듯하다. 일부 학설로는 녹암 권철신(權哲身, 1736〜1801) 등을 넣지만, 그의 부친 권암(權巖)이 이익•안정복 등과 교유가 깊었던 사실로 보아 2세대 반열이 옳다는 생각이다. 이익이 『도동록』을 저술한 뒤 초고 형태로 남겨두었는데, 순암 안정복이 이익을 찾았을 때 우연히 초고형태의 원고를 발견하고 그 내용을 살펴보았다. 퇴계의 언행을 발췌해서 편집한 것임을 알고 스승 이익의 허여로 안정복이 표지를 다시 제본하면서 ‘이선생수어(李先生粹語)’로 살짝 가제(假題)를 붙이게 된다. 안정복은 재편집 과정에서 특히 소남 윤동규와 책 제명에 대해서 여러 차례 논의하였고, 두 학인의 논의에서 윤동규는 퇴계의 언행을 발췌한 것이므로 ‘어(語)’만을 다룬 듯한 ‘수어’라는 용어는 적당하지 않다는 이견도 제시하게 된다.(『順巖文集』 卷2, 上星湖先生書 癸酉年條) 그러나 안정복의 설득으로 ‘수어’로 결정되었는데, 또 하나의 문제가 퇴계에 대한 책제의 호칭이었다. 안정복 자신은 가칭 ‘이선생수어’로 책제를 붙였던 지난번과는 달리 적절한 존칭을 생각하게 된 것이다. 주희가 ‘주자’로 존칭되듯이 동국의 주자처럼 ‘이자(李子)’로 불러도 무방하다는 윤동규와 안정복의 일치된 견해와 성호 이익의 동의로 ‘이자수어’라는 책명이 결정된 것이다. 그러나 이익이 처음 어떤 목적을 가지고 집필한 초고 때의 『도동록』이 『이자수어』로 책명이 바뀌어 결정될 때는 직접 참여하지 못하였다. 그 뒤 그 연유를 알게 된 이병휴는 ‘이자수어’라는 책 제목 보다는 ‘도동록’이란 원래의 명칭을 그대로 살렸어야 한다는 아쉬움을 토로한다(『貞山雜稿』 권9, 「謹書道東錄後」). 당시 그는 퇴계의 경학을 넘어 서는 성호학파의 독립된 학설을 갈망하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퇴계 경학’ 또는 ‘이자 경학’이라는 명칭도 그는 큰  문제는 없지만 퇴계의 언행록을 분문류편(分門類編)한 성호학파의 학문적 성취까지 포함한 동국경학(東國 經學)을 주창하고 싶었던 것이리라.(『貞山雜稿』 권9, 「謹書道東錄後」). 그것은 ‘이자수어’로까지 책의 제목을 개정하게 된 원인이 성호 이익의 생각이 아니라 안정복과 유동규의 학문과 사상적 성격이 반영된 것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비록 성호 이익이 ‘이자수어’라는 책제 개명에 동의는 하였지만, 이익이 처음 생각한 ‘도동록’의 편집목적은 보다 원대한 사유가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이익의 조카인 정산 이병휴의 판단이었다. 왜냐하면 ‘이자수어’라는 책제 속에는 퇴계의 학문과 사상으로 한정되어 담겨진다는 의미가 농후하지만, ‘도동록’의 ‘도동’은 정주학의 ‘중화의 도’와 대응되는 주체적 입장이 반영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조선의 경학을 대표하고 통합한다는 의지도 함께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흐름은 이익의 부친 이하진과 이익 부자와 교유가 깊었던 식산(息山) 이만부(李萬敷)의 『도동편 道東篇』이 서인 이율곡의 학설까지 실어 조선의 학설을 통합하려는 의지를 드러낸 사실과 부합되는 측면이라 우연이면서도 우연히 아니라는 해석이다. 특히, 공자 이후 자득(自得)의 공부 방법을 보편적으로만 이해하여왔던 조선 학인들의 학문 전개에 직면하여 성호 이익과 정산 이병휴는 18세기적 자득의 공부 방법을 추구하고자 하는 것을 우선시하였다. 그들의 자득의 공부 방법은 정주학을 송습(誦習)하는 당대 보편적 학인들과는 달리 자신들의 시각에서 정주학을 바라보고자 하고, 선진 경학을 이해의 차원이나 외우는 수준에서 만족하지 않고 ‘자기해석’을 먼저 해 보고자 하는 지향, 즉 ‘커다란 의심’으로부터 시작하고자 하였다. 성호 이익이 저술한 11개의 ‘질서(疾書)’는 그러한 동기가 가장 크게 반영된 것으로 해석된다.한편, 정주학을 이해하고 송습하는 의양(衣樣)의 공부 방법을 우선시하던 윤동규와 안정복의 ‘이자수어’로의 개명을 하려는 사유는 정주의 사유에서 좀처럼 벗어날 수 없었던 측면이 강하였다는 이해이다. 성호학파 2세대인 권철신•이기양 등이 자득의 공부 방법을 통해 경학을 주체적으로 해석하면서 양명학과 천주학으로 깊이 빠져들자, 이들을 비판하던 안정복을 향해 1773년 이병휴가 “학문의 도(道)에 있어서 얻은 바가 확실하지 못하여 자신의 것(소유)으로 만들지 못하고 있다.”( 『順庵文集』 卷4 書 與李景協書 癸巳)고 강하게 질타한 사실은 대표적인 사례이다. 성호학파는 근기남인으로서 퇴계 이황의 학문과 사상을 정통으로 계승한다는 정파적•학파적 입장을 당시 조선적 정치사회의 현실에서는 표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성호 이익도 자신의 정치사회적 입지와 학문적 성취의 기반을 다지고 넓히기 위해 퇴계의 학문과 사상을 정통으로 계승한다는 취지와 자부심에서 『도동록』을 저술한 것으로 보인다. 이 『도동록』은 성호 이익이 퇴계의 가언선행(嘉言善行)을 뽑아서 편집한 것이다.(『貞山雜稿』 권9, 「謹書道東錄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