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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학중앙연구원 온라인소식지 10월호 A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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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제가의 시화 속 ‘관수觀水’와 ‘어락魚樂’에 대한 단상 [사진] 정은주 (장서각 국학자료연구실) 초정 박제가(朴濟家, 1750~1805)는 조선 후기 대표적 북학자이자 실학자이다. 따라서 박제가에게는 󰡔북학의󰡕를 비롯하여 이용후생적 학자 이미지가 늘 따라다녀 문예적 측면에서는 그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기회가 많지 않았다. 그는 초년시절부터 스스로 자신이 ‘화벽畵癖’이 있었다고 할 만큼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고, 세 차례에 걸친 사행을 통해 청 문인들과 교유한 시화가 남아 있어 청나라 팽온찬(彭蘊燦, 1780~1840)이 편찬한 󰡔역대화사휘전歷代畵史彙傳󰡕에도 박제가를 “그림과 글씨에 능했다(善畵工書)”고 평한 바 있다. 현재까지 조사된 바에 의하면, 박제가가 그림에 대한 題畵詩를 지은 것이 60여수에 이를 정도로 그의 회화에 대한 안목 또한 높았음을 알 수 있다. 박제가가 남긴 그림 중 현전하는 것은 <어락도魚樂圖>, <야치도野雉圖>, <목우도牧牛圖>, <의암관수도倚岩觀水圖> 등이 있다. 이중에서 물과 관련한 소재는 <의암관수도>와 <어락도>이다. 먼저 <의암관수도>는 두 명의 고사가 큰 바위에 의지하여 맞은편 절벽 바위에서 떨어지는 폭포를 구경하는 그림이다. 그림의 좌측 상단에는 “귀는 물이요, 몸은 바위라 형태는 셋이지만 마음은 하나다(耳爲水而身爲石, 形則三而心則一)”라는 박제가의 화제시가 있다. 이어서 쓴 ‘수기脩其’라는 관서는 박제가의 아호이다. 귀는 물소리에 집중하여 물이 되었고, 몸은 돌에 달라붙어 의지하였기에 자연과의 교감을 통한 물아일체의 경지를 잘 보여준다. 그림 1. 박제가, <의암관수도>, 종이에 수묵담채, 27.0×33.5cm, 개인 옛 그림 속에서는 관폭의 소재뿐만 아니라 물에 발을 담근 탁족濯足이나 물가 바위나 정자에서 강을 바라보는 소재가 다수 등장한다. 문인들이 이처럼 물을 좋아하는 이유는 노자가 말한 “최상의 선은 물과 같으니, 물은 만물을 잘 이롭게 하면서도 다투지 않으며, 뭇사람들이 싫어하는 낮은 곳에 처하기 때문에 도에 가깝다(上善若水, 水善利萬物而不爭, 處衆人之所惡, 故幾於道)”는 문구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늘 낮은 데로 흘러가면서 뭇 생명을 정화하는 물의 섭리를 도에 비유한 말이다. 요즘 우리를 안타깝게 하는 소식 중 하나는 4대강에 막아 놓은 인공 보로 인해 강물이 흐르지 못하고 고여 썩고 강에 깃들어 사는 생명들의 종과 개체수가 현저히 줄고 있다는 것이다. 흘러야 하는 자연적 섭리와 달리 답답하게 갇힌 물을 보아야 하는 것은 물론, 심지어는 정화되지 못한 강물의 독성으로 인해 이제는 발을 담그는 것도 어려울 정도로 수질이 악화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옛 사람들이 물을 바라보며 인생의 도를 생각했던 경지를 오늘의 우리는 더 이상 누릴 수도 생각조차도 하기 어려운 현실이 되었다는 것이 마음을 무겁게 한다. 보고 장자가 물고기의 즐거움을 말하자, 혜자는 “그대가 물고기가 아니면서 어떻게 물고기의 즐거움을 아는가?”라고 질문한다. 장자는 이에 “그대는 내가 아니면서 내가 물고기의 즐거움을 모른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는가?”라고 반문한다. 이에 혜자는 “내 그대가 아니라 본래의 그대를 모르듯, 그대도 물고기가 아니기에 그대가 물고기의 즐거움을 모른다는 것은 틀림없네.”라고 응수한다. 장자는 결국 “그럼 본질로 돌아가 보세나. 그대가 나에게 ‘물고기의 즐거움을 어떻게 아느냐’고 물은 것은 이미 내가 그것을 안다는 것을 전제로 물은 것이네. 나는 그것을 이 물가에서 알았다네.”라고 결론 맺는다. 장자와 혜자의 대화는 마치 언어유희처럼 들리지만, 장자는 인습에 얽매여 물고기를 지긋이 바라보며 즐길 수 있는 내면의 맑은 눈이 흐려지는 것을 경계하고 있다. 그러나 1912~3년에 걸친 흉작은 이와 같은 서간도에서의 초기 활동에 운영난을 초래하였다. 와중인 1913년 6월, 석주의 아들 준형(濬衡, 1875~1942)이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다. 400년 종택인 임청각과 그 대지 및 인근 산판을 방매하기 위한 귀향이었고, 아버지의 초명인 ‘이상희’란 이름으로 가옥과 토지를 팔고 다시 서간도로 돌아갔다. 이 때 작성된 문서가 바로 이 ‘임청각매매증서’이다. 이 돈이 어디에 쓰였는지 정확하게 보여주는 기록은 없지만, 조선의 독립을 위한 소중한 자산이 되었음을 짐작하는 것은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다.그림3 . 석주 이상룡(1925년 상해임시정부 국무령 재직시)석주선생은 이후로도 서로군정서 독판, 상해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 등을 역임하며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매진하였으며, 우리 땅에 돌아오지 못한 채 1932년 만주 땅에서 생을 다하게 된다. 석주선생 뿐이 아니었다. 그 아들 준형과 손자 병화(炳華, 1906~1952)가 역시 독립운동에 헌신하여 애국장과 독립장에 추서되었고, 두 아우 상동(相東, 1865~1951)과 봉희(鳳羲, 1868~1937)가 또한 그러하여 애족장과 독립장에 추서되었다. 여기에 조카 등을 합치면 임청각 일가에서만 9명의 독립유공자를 배출하였으니, 항일독립운동을 볼 때 우리나라 최고의 명문가라 할 수 있을 것이다.임청각의 사람들이 독립운동에 헌신하는 동안 임청각은 이른바 ‘불령선인’이 다수 출생한 집이라 하여 핍박을 당했다. 1930년대 후반, 일제는 중앙선 철도를 연결하면서 굳이 노선을 꺾어 임청각의 경내를 가로질렀고, 결과로 50여 칸의 행랑채와 부속 건물을 철거당하기도 하였다.조국이 해방되고 임청각의 사람들이 임청각에 돌아왔지만, 형편은 여전히 어려워 입에 풀칠하기도, 학교를 다니기도 쉽지 않았다. 심지어 석주선생의 증손자인 이항증선생의 경우 고아원을 전전하기까지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임청각의 사람들은 학비와 생계를 위해서는 단 한 평의 토지, 단 한 칸의 가옥도 팔지 않고 최선을 다해 임청각을 지켜왔다.이제 임청각의 사람들은 500년을 지켜온 임청각과 임야 1만 2천여 평을 국가에 헌납하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다. 임청각이 단지 일개 가문의 종택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소중한 건축 문화재이자 독립운동의 역사 현장으로서 대한민국의 산 교육장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서이다. 그러나 석주선생의 자손이 일제의 호적을 거부함에 따라 4인의 친족에게 명의 신탁되어 70년간 방치됨으로써 불분명해진 소유권이 발목을 잡고 있다. 비슷한 시기, 다른 한 편에서는 송병준과 이완용 등 친일파 후손들이 국가를 상대로 토지환수소송을 제기하였다. 일신의 영달을 위하여 불의에 영합하고, 개인과 가문의 보존을 위하여 권력에 복무함으로써 식민지 조선의 지배층이 되고, 부와 권력을 누린 이들의 토지였다. 이제는 탐욕과 방종이 더 이상 낯설지 않고, 부끄러움을 아는 것이 오히려 어리석게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속에서도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것이 바로 석주선생과 임청각이 가지고 있는 진정한 명가로서의 가치 때문은 아닐까? 박제가가 그린 <어락도> 속 물고기들은 그래서 더 새롭게 보인다. 그림은 맑은 물속 수초 사이를 자유롭게 유영하는 잉어와 새우, 송사리를 그렸다. 박제가는 그림 우측 상단에 “그것을 알면서도 나에게 물었지. 나는 그것을 물가에서 알았다네(知之而問我, 我知之濠上也).”라는 제화시를 적었다. 따라서 이 그림은 󰡔장자󰡕의 호상濠上에서 장자와 혜자의 대화를 배경으로 그린 것임을 알 수 있다. 장자와 혜자가 다리를 한가로이 거닐다 물속을 헤엄치는 물고기를 그림 2. 박제가, <어락도>, 종이에 수묵담채, 26.7×33.7cm, 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