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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의 문화를 찾아서
 
한국학중앙연구원 온라인소식지 10월호 A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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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홈페이지 바로가기TIP)『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이란?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은 전국 230개 시·군·구 지역의 다양한 향토문화 자료를 발굴․수집, 연구․분석하여 체계적으로 집대성하고, 이를 디지털화하여 인터넷을 비롯한 다양한 정보 통신 매체를 통해 서비스하며, 이용자가 또 새로운 지식의 생산자가 되는 순환형 지식정보시스템을 구축하는 대규모 문화 콘텐츠 편찬사업입니다. 이는 그간 미진했던 전국의 향토문화 자료의 보존 및 계승의 대책 마련과 체계적이고 종합적인 지역문화 정리사업의 필요성에 의해 추진되는 사업으로서, 지식·문화산업의 기반을 마련하고, 지역 간 균형 발전과 지역 경제 활성화에 기여하며, 인터넷을 통해 전국 향토문화의 세계화를 이루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매괴박물관 동영상 연결 항목 바로보기 충청북도 천주교 발상지,감곡매괴 성모순례지성당 관련 항목 바로가기 디지털음성문화대전 홈페이지 바로가기 남산동 과하천 인근에 사는 이재탁[80세] 어르신에게 과하주와 과하천은 아직도 김천의 아련한 향수와 추억으로 남아 있었다. 과하천의 본디 이름은 김천(金泉)이라고 하는 이 고장의 지명이 유래된 남산동의 ‘김천(金泉)’이다. 물맛이 좋아 그 샘물로 술을 빚은 것이 과하주였기에 샘을 달리 과하천 또는 주천으로 부른 데 그치지 않고 이 지방을 대표하는 술과 우물로 자리매김했다. 이것은 고려 전기 역참 제도의 정비로 이 지방에 역이 처음 설치되면서 역명(驛名)을 정할 때 이 샘의 이름을 따서 김천역(金泉驛)이라 한 것만으로도 그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부록: 충청북도 천주교 발상지,감곡매괴 성모순례지성당 [사진] 감곡성당 TIP)『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이란?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은 전국 230개 시·군·구 지역의 다양한 향토문화 자료를 발굴․수집, 연구․분석하여 체계적으로 집대성하고, 이를 디지털화하여 인터넷을 비롯한 다양한 정보 통신 매체를 통해 서비스하며, 이용자가 또 새로운 지식의 생산자가 되는 순환형 지식정보시스템을 구축하는 대규모 문화 콘텐츠 편찬사업입니다. 이는 그간 미진했던 전국의 향토문화 자료의 보존 및 계승의 대책 마련과 체계적이고 종합적인 지역문화 정리사업의 필요성에 의해 추진되는 사업으로서, 지식·문화산업의 기반을 마련하고, 지역 간 균형 발전과 지역 경제 활성화에 기여하며, 인터넷을 통해 전국 향토문화의 세계화를 이루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홈페이지 바로가기 정월 대보름날 전후로 주조 공장 일꾼들이 물지게로 과하주 빚는다고 하루 종일 물을 길어다 나르는데 사람이 부족해서 그때 이 동네 사람들도 품 팔러 다니기도 했지.”김천의 유교 문화 연결 항목 바로가기 ◉ 부록 1 : 무더운 여름을 탈없이 날 수 있는 술, 김천과하주 [사진] 과하주 김천의 유교 문화 아버지 김숙자(金叔滋)로부터 학맥을 이어받은 김종직(金宗直)은 58세 때인 1489년(성종 20) 모든 관직을 사퇴하고 아내의 고향이자 아버지의 임지[개령현감] 따라 면학하던 곳이요, 아내와 아들 김목아(金木兒)가 묻혀 있어 가장 애착이 가는 김천의 백천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자신의 집에 서당인 경렴당(景濂堂)을 짓고 평소 공부하던 경서(經書) 등 천 권의 서책을 옮겨 학문 강론의 거점으로 삼았다. 경렴당이란 명칭은 김종직이 송나라 학자 염계(濂溪) 주돈이(周敦頤)를 경앙(景仰)한 데서 붙여진 당호이다. 또한 김종직은 주돈이가 연을 좋아했기에 경렴당 앞에 못을 파고 연을 심기도 하였다. 새로 증설된 문산역의 이름도 김종직이 주돈이와 더불어 문문산(文文山)을 숭앙했기에 붙여진 이름으로 여겨진다. 김종직이 김천에 경렴당을 세우고 기거하자 김천 지역 유림들이 앞 다투어 그의 문하에 들어가면서 ‘김산 문향’이란 용어가 유행할 정도로 김천 지역에는 성리학이 확산되었다. 김천의 유림들은 지역에서 구국 운동, 의병 운동, 계몽 운동 등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1896년 대일 항전을 위해서는 경상도 서북부 지역인 상주·선산·김산·개령·지례 등지에서 유생들이 연합으로 김산의진을 창설하였다. 김산의진의 진용 중 김천 출신은 김기력[중군], 여중용[찬획], 여영조[참모], 여승동[군량도감], 이용주[찬획], 강일선[찬획], 이상와[찬획], 이숭주[종사], 최동은[종사], 조석영[군량도감], 이현삼[군량도감], 배헌[장재관] 등이다. 이들은 1896년부터 1909년도까지 ‘을미 의병 운동’, ‘정미 의병 운동’, ‘서울 진공 대작전’ 등에 참여하였다. 김천 지역 유림은 내·외부적으로 당색에 구애받지 않고 양반 상호간의 결속을 학계(學契)를 통해 형성하였다. 김천 지역에 세거하던 유력한 사족 가문 중 봉산면의 연일 정씨와 창녕 조씨, 구성면의 성산 여씨와 연안 이씨, 과내·조마면의 진주 강씨, 감천면의 화순 최씨, 대덕면의 김녕 김씨, 어모·대항·부항면 일대의 벽진 이씨 등은 영남 남인 계열이면서도 정치·학문적으로 기호 지방 노론 계열에 기울어지는 경향이 나타났다. 특히 조선 후기 김천 지역의 ‘강(姜)·여(呂)·조(曺)·정(鄭)’ 4대 성씨 중 창녕 조씨와 연일 정씨 일부, 벽진 이씨와 화순 최씨 일부, 지례 지역의 연안 이씨·하빈 이씨·벽진 이씨·순천 박씨·거창 신씨·성산 이씨 일부가 노론에 속하였다. 이러한 경향은 영남의 다른 지역에 비해 매우 특수한 경우였다. [사진] 1970년대 김산향교 [사진] 개령향교 [사진] 자산공원 내 김종직 상 [사진] 향교 기로연 [사진] 김천 마을 이야기 홈페이지 김천과하주 연결 항목 김천(金泉)이란 지명이 문헌상에 처음 등장한 것은 1451년(문종 1) 간행된 『고려사(高麗史)』로, 역의 지명으로 나타난다. 김천역은 지금의 남산동 김천초등학교 위쪽의 찰방골로 불리는 일대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 과하천은 김천역과 지척의 거리에 있었다. 과하천은 1990년 ‘김천과하천’이란 이름으로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28호로 지정되어 보호를 받고 있지만 주변에 주택이 들어서면서 더 이상 음용수로는 사용할 수가 없게 된 점은 안타깝다. 샘 안쪽 벽면에는 “금릉주천 광서 팔년(金陵酒泉 光緖 八年)”이라 하여 1882년(고종 19)에 새겨진 금석문이 있어서 과하천의 역사를 짐작하게 한다. ◉ 부록 2 : 김천의 마을이야기 디지털김천문화대전 홈페이지 바로가기 감곡성당은 1896년 프랑스 임가밀로 신부에 의해 충청북도에서는 첫번째, 국내에서는 18번째로 세워진 성당이다. 일제강점기에는 문맹 퇴치를 위해 매괴학교를 설립하여 우리 청년들에게 민족의식을 심어준 성당이기도 하다. 또한 감곡성당은 100여 년간의 한국 천주교와 감곡성당의 발자취가 담겨있는 각종 유물들이 전시하고 있어 한국 천주교사 뿐만 아니라 우리 근대사에 많은 영향을 준 역사적인 장소이다. 충청북도에서는 서양식 건물로는 처음으로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88호로 지정되었다. 감곡성당은 설립 당시부터 기적이라고 생각될 만한 일들이 많았다. 전해지는 일화로는 6·25전쟁 때 감곡성당이 인민군의 임시 요새로 사용된 적이 있었는데 이때 인민군은 성당 위에 모셔진 성모상을 총을 쏴서 깨어버리려 하였으나 총알이 무려 7발이나 성모상을 관통하였는데도 성모상이 깨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이에 망치로 성모상을 깨어 버리려 하자 성모상이 눈물을 흘려 그 인민군이 성모상을 훼손할 수 없었다고 한다. 또한 감곡에서 장호원으로 이르는 다리를 끊기 위해 비행기 폭격이 엄청나게 많았지만 이 역시 끊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주변 사람들은 이를 성모님의 기적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감곡성당은 2006년 10월 7일 수원교구의 남양 성모 순례지 성지에 이어 한국천주교 사상 2번째로 성모 순례지 성지로 정식 선포되었다.‘ [사진] 매괴박물관 동영상 화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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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불교의 성지, 직지사 연결 항목 바로가기 [사진] 문경 김룡사 동종[사진]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디지털김천문화대전」속으로의 여행 2부 한국학중앙연구원의 대표적인 사업『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그 중 경상북도 김천 지역 정보를 총망라한 「디지털김천문화대전」을 소개합니다. [그림]「디지털김천문화대전」홈페이지 화면 「디지털김천문화대전」(http://gimcheon.grandculture.net/)은 경상북도 김천시의 디지털 백과사전으로, 김천의 역사와 문화를 비롯한 모든 정보를 집대성하여, 인터넷을 통하여 누구든지 이를 쉽게 활용할 수 있게 제작되었습니다. 2009년 2월 김천시와의 협약을 통해 추진된 이 사업은 2009년 3월부터 같은 해 8월까지 기초조사 연구를 통해 김천의 향토문화 자원을 조사ㆍ분석하는 작업이 진행되었습니다. 이후 일반ㆍ기획 항목 집필 사업(2009년 12월~2010년 8월, 대구사회연구소), 마을지 제작 사업(2010년 3월~11월, 한빛문화재연구원), 멀티미디어 콘텐츠 제작 사업(2010년 8월~2011년 2월, ㈜르네틴트), 원고 교열ㆍ윤문 사업(2010년 8월~11월, ㈜휴머니타스), XML 데이터 제작 사업(2011년 5월~7월, ㈜지식공학), 서비스 시스템 개발 사업(2011년 6월~8월, ㈜올인텍아이엔씨), 모바일 서비스 개발 사업(2011년 7월~8월)이 수행되었습니다. 2009년 2월부터 2011년 8월까지 약 2년에 걸친 작업 기간을 통해 기초조사, 원고 집필, 교열‧윤문, 멀티미디어 콘텐츠 제작, XML 데이터 제작, 서비스 시스템 개발 사업, 모바일 서비스 개발 사업이 진행되었고, 총 1,982개의 항목, 원고지 14,983매, 사진과 동영상 등 총 4,572종(마을지 포함)의 멀티미디어 자료를 담고 있습니다. 디지털 콘텐츠로 구축된 정보는 지역별 사이트와 대형 민간 포털(네이버, 다음, 구글 등)을 통해 이용자들이 손쉽게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그럼 김천에 대해 알아보는 여행을 떠나보실까요? 신라 불교의 성지, 직지사 직지사(直指寺)는 김천시 대항면 운수리에 있는 높이 1,111m 황악산 아래에 위치하고 있다. 직지사라는 이름이 붙여진 배경에 대해서는 크게 두 가지 설이 전한다. 첫째는 “수행을 통해 욕심과 번뇌를 버리고 마음을 비우면 자기 자신이 부처요, 그 마음이 곧 불심”이라는 선종(禪宗)의 핵심 가르침인 ‘직지인심 견성성불(直指人心 見性成佛)’의 맨 앞 글자인 직지(直指)에서 따왔다는 것이다. 둘째는 직지사를 창건한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선산에 있는 태조산에 도리사를 창건한 후 김천 황악산을 가리키며 “저 산 아래에도 절을 지을 만한 훌륭한 터가 있다.”고 하여 ‘곧을 직(直)’과 ‘손가락 지(指)’ 자를 따서 직지사라 했다는 설이 있다. 아도화상은 417년(눌지왕 1) 신라 최초의 사찰로 도리사를 창건한 이듬해인 418년(눌지왕 2) 직지사를 창건했다. 고구려의 승려였던 아도화상은 신라에 불교를 전파하기 위해 선산 해평면 모례(毛禮)라는 사람 집에 숨어 살았는데, 마침 신라 왕녀가 병이 난 것을 향을 피워 고쳐 준 인연으로 신라 왕실로부터 포교를 묵인 받고 도리사와 직지사를 지었다고 전한다. 불교는 크게 교종과 선종으로 분류된다. 교종은 불교 경전에 대한 심오한 연구를 통해 철학적인 이해를 중시하고, 선종은 경전에 의한 가르침보다는 사람의 마음으로 깨달음을 얻는 수행과 참선을 중시하여 신라 후기 백성과 지방 호족들로부터 크게 환영받아 발전한 후 현재까지 우리나라 불교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 불교가 한반도에 유입된 시기는 고구려·백제·신라의 왕권이 강화되고 중앙 집권으로 나아가는 과도기로서, 선사 시대부터 내려오던 신화적 세계관을 불식시키고 왕이 진리를 깨친 부처의 입장에서 백성을 다스린다는 통치 이념의 강화 차원에서 각국에 수용되었다. 이는 “왕이 곧 진리를 깨친 부처”라는 믿음을 심어 주었고, 불교의 윤회설(輪廻說)은 지배와 피지배라고 하는 인간의 불평등을 전생의 업보로 정당화하여 왕의 권위와 귀족 사회를 유지하는 데 유리한 인생관을 제공하였다. 신라가 불교를 공식적으로 인정한 527년(법흥왕 14)보다 110년이나 앞서 직지사가 창건되었다는 점으로 미루어 신라에 아직 불교가 전래되기 이전, 그 포교의 전진 기지로서 김천 지역이 신라 불교의 발상지로 자리 잡았다는 데 큰 의의를 둘 수 있다. 또 직지사는 신라 후기인 930년(경순왕 4)에 천묵대사(天默大師)가 왕실의 지원으로 『금자대장경(金字大藏經)』을 완성하고 이를 보관하는 장경각을 건립하는 등, 기울어져 가는 국운을 불력(佛力)으로 극복하고자 노력한 곳이기도 하다. ◉ 직지사의 보물들 [사진] 김천 직지사 석조약사여래좌상 직지사에는 국보 제208호인 도리사 세존사리탑 금동 사리기와 보물 제319호인 김천 직지사 석조약사여래좌상, 보물 제606호인 문경 도천사지 동·서 삼층석탑, 보물 제607호인 문경 도천사지 삼층석탑, 제670호인 「직지사 대웅전 삼존불탱화」, 제1186호인 전 구미 강락사지 삼층석탑, 제1141호인 예전 한천사 금동 자물쇠 외 쇠북, 제1241호인 『예념미타도량참법』 권6~10, 제11-2호인 문경 김룡사 동종, 1303호인 『백지금니금강 및 보문발원』, 제1306호인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제1576호인 김천 직지사 대웅전 등 국보 1점과 보물 11점이 소장되어 있다. [사진] 1. 도리사 세존사리탑 금동 사리기 [사진] 3. 문경 도천사지 동·서 삼층석탑 [사진] 문경 도천사지 삼층석탑 「직지사 대웅전 삼존불탱화」 [사진] 전 구미 강락사지 삼층석탑 [사진] 예전 한천사 금동 자물쇠 외 쇠북 선비 정신이 깃든 음성의 전통건축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