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학 칼럼
여몽전쟁을 통해 본 김윤후의 대몽전략과 리더십의 재조명
1. 처인성 전투: 풍전등화의 위기 속에서 화살 하나로 적장을 사살하여 나라를 구하다.
1232년(고려 고종 19년) 6월에 고려 정부가 강화도로 천도하자 몽골이 그해 여름에 다시 침입해 왔다. 당시 강화도에는 임금이 머물 궁궐이 갖추어지지 않았고 몽골군을 방비할 성벽조차도 없었다. 이런 위급한 상황 속에서 몽골군 기병대는 고려 땅을 휩쓸고 지나가면서 강화도 정부를 압박하고 항복을 종용하였다. 몽골군 총사령관 살례탑(撒禮塔)은 친히 양광도 수주(水州) 관할의 처인부곡(處仁部曲)에 이르러 처인성(處仁城)을 직접 공격하기에 이르렀다. 이때 백현원 승려 출신이었던 김윤후는 처인성에서 승병장 역할을 자임하면서 처인부곡민과 승도를 통괄 지휘하고 궁수 부대를 급조하여 정확한 조준사격을 통해 살례탑을 사살하였다. 김윤후의 진두지휘에 의한 처인성 승첩은 여몽전쟁 최대의 눈부신 전과이자 정부군이 개입되지 않은 고려 민중의 힘을 제대로 보여준 쾌거였다.
[그림 1] 처인성과 처인성전투(상상도),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남사면 소재
2. 충주성 전투: 관노문서를 소각하고 신분해방을 약속하는 등 애민정신을 구현하여 몽골 대군을 격파하다.
강화도로 천도한 고려가 끈질기게 항전을 계속하자 몽골 황제 헌종(憲宗)은 자신의 숙부 야고(也古) 대왕으로 하여금 고려를 정복하게 하였다. 1253년(고려 고종 40)에 야고 대왕은 고려 중부권 산성들을 차례대로 함락시키며 충주성에 도달하여 그곳을 포위했는데, 충주성의 양식이 거의 바닥나고 충주 군사들의 사기가 크게 꺾여 있었다. 이때 충주산성 방호별감(防護別監) 김윤후는 충주성이 함락되기 직전에 관노문서를 소각하고 하층민들에게 신분해방과 전공포상을 약속하면서 싸움을 독려하였다. 김윤후의 격정적인 호소에 고무된 충주민과 관노들은 혼연일체가 되어 죽음을 각오하고 싸워 결국 몽골군을 격퇴시켰다. 충주성에서 꺾인 몽골군은 철군할 수밖에 없었다. 충주성 전투의 승리로 충주는 일약 국원경(國原京)으로 승격되는 영예를 누렸으며, 충주민은 관리와 노예에 이르기까지 전공에 따라 차등 있게 포상을 받았다.
[그림 2] 충주 대림산성(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국가유산청)
3. 동북면병마사로서 신출귀몰한 전략을 구사하여 몽골군을 무찌르고 여몽전쟁을 종식시키다.
여몽전쟁이 장기화되면서 강화도 정부의 몽골에 대한 항전이 한계에 다다랐다. 고려의 동계 축선은 몽골군에게 무너져 1258년 12월에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가 설치되었고, 몽골군과 부몽배들은 동계 이남으로 노도와 같이 쳐들어왔다. 이때 김윤후는 동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에 부임하게 되었는데, 그는 3,000명에 이르는 삼별초 부대를 군사적 요충지에 미리 분견시켜 적군의 침입에 대응케 하였다. 이러한 김윤후의 전략전술에 따라 1259년 2월 한계산성 전투에서 방호별감 안홍민이 야별초 부대를 거느리고 몽골군을 격멸시켰으며, 같은 해 3월 천곡천 전투에서는 신의군 병사들의 맹활약으로 몽골의 부용세력인 동진군을 격멸시킬 수 있었다. 이로써 여몽전쟁은 최종적으로 종결되었으며 이후 고려-몽골 사이에 강화(講和)가 체결되었다.
[그림 3] 인제 한계산성(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국가유산청)
4. 김윤후 리더십의 현대적 재조명
(1) 김윤후는 위대한 전공을 쌓았음에도 불구하고 높은 관직을 탐하지 않고 낮은 관직에 상당 기간 머무르면서 청렴결백한 성품을 보여주었다. (2) 신분제도에 구애받지 않고 귀천을 막론하고 능력 있는 자들을 전투에 적극 활용하였고 전공을 세운 자들을 크게 포상하였다. (3) 대몽전략을 체계적으로 수립하고 몸소 실행에 옮기는 군사전략가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4) 오로지 고려왕조의 부흥과 대몽전쟁의 종식을 통한 민생의 회복에 헌신하였다.
이처럼 여몽전쟁기의 영웅인 김윤후의 리더십에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배울 바가 많다. 위기에 직면했을 때 당황하지 않고 뛰어난 전략을 구사하며, 자신의 지위가 높아져도 항상 겸손함과 청렴함을 잃지 않으면서 국가를 위해 헌신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태도는 현대인에게 모범적인 정치인, 군인의 귀감이 된다고 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