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학 캠퍼스
「걸어 다니는 한국인」을 연구하는 정치학자
1. 여름이었다
“너 뭐 돼?”, “여기 누구 물어본 사람?” 등 입찬소리에 주눅 드는 시대다. 그렇지만 나는, 「이유 없는 사랑이 진짜 사랑」이고, 「근거 없는 자신감이 진짜 자신감」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한국학중앙연구원에 지원한 까닭도, 근거 없는 자신감 덕분이었다. 다른 분야는 몰라도 왠지 한국 정치만큼은, 남들보다 재미있게 설명하는 정치학자가 되리라 확신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 확신에는 여전히 근거가 없으나, 생각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자신감과는 별개로, 정치학자가 되려면 박사학위가 필요하다. 하던 일을 그만두고 6년 만에 대학원으로 다시 돌아가야 했다. 지원할 학교들을 고민했다. 서울대는 빠르게 포기했다. 원서비가 호암회관 벽돌값으로 쓰일 것 같았다. 모교는 망설여졌다. 합격 가능성은 컸지만, 헤어진 여자친구와 마주칠 가능성도 컸기 때문이다. 불현듯, 한국학중앙연구원이 뇌리를 스쳤다. 일전에 나무위키에서 파도를 타다 한국학대학원 관련 문서를 본 기억 덕분이다.
검색해 보니, 다행히 모집 중이었다. 입학한 뒤 알게 된 사실인데, 원래 가을학기에는 한국인 학생을 모집하지 않았단다. 그런데 마침 2024년부터 입학제도가 바뀐 덕분에 지원할 수 있었다. 어쩐지 1차 합격자가 적어서 의아했었다. 당시에는 한국 인문사회계의 현실을 마주한 것 같아, 속으로 씁쓸해 했다. 사실은 그냥 제도가 바뀐 첫 해인 탓에, 잘 알려지지 않아 지원이 적었던 것뿐이다. 매 학기 입학 경쟁률이 치솟았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모골이 송연해진다. 다음으로 정치학 전공 교수진을 검색했다. 자타공인 한국 정치사의 대가인 이완범 교수님부터, 주변부의 기억과 서사를 구술사 연구로 돕는 김원 교수님, 조선의 정치 과정과 법제사를 시원적으로 탐구하는 이하경 교수님, 그리고 한국 국제관계학(IR)의 역사부터 동아시아 냉전사를 다루는 옥창준 교수님까지 전부 확인했다. 이곳이야말로 남몰래 염원했던 한국적 정치학을 성취할 공간이라고 확신했다.
흥분이 가라앉지 않았다. 그런데 정작 연구원이 어디에 있는지는 몰랐다. 곧장 네이버 지도 앱을 켜서 검색했다. 운중동이라는 낯선 동네에 있었다. 그리고, 집에서 연구원까지 경로를 검색했다. 103번 버스가 있었다. 집 앞의 정류장에서 103번을 타면 연구원까지 직행으로 40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귀가 동선에 예민한 나로서는, 운명이라고 직감한 순간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합격했다. 합리적으로 추정컨대, 나는 겨우 문을 닫고 합격했을 것이다. 합격한 한국인 박사과정생 3명 중 나만 유일하게 장학금을 못 받았기 때문이다.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한국학대학원에만 원서를 제출했기 때문이다. 불합격하면 뾰족한 대안은 없었다. 다만 연구원을 알게 된 순간, 다른 학교에서 공부하기 싫었을 뿐이다. 그냥 연구원이 좋았다. 무언가를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에는 대단한 이유가 필요하지 않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을 지원한 이유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정작 입학선서는 꼴찌인 내가 대표로 제창했다. (이때는 학교 측에 조금 서운했다) 초면인 사람들 앞에서 큰소리로 선서를 외치려니, 머쓱했다. 그러나 나는 기본적으로 예스맨이기 때문에 마다하지는 않았다. 막상 해보니 또 재미있었다. 여름이었다.
2. 연구원 사람들
그때부터 지금까지 온통, 운중동으로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드는 나날이다. 연구원에서 만난 사람들 덕분이다. 매주 금요일마다 이완범 교수님에게 직접 질문할 수 있는 것은, 한국학중앙연구원 소속 학생들의 특권이었다. 다소 생뚱맞거나 민감한 질문이어도, 교수님은 언제나 답변과 해설을 상세히 해 주셨다. 그러나 아쉽게도, 교수님이 곧 정년으로 은퇴하신다. 신탁통치, 38선 획정, 한국전쟁, 10ㆍ26 사태와 12ㆍ12 쿠데타 등 한국 정치의 경로와 방향성을 결정했던 중대 분기점(Critical juncture)을 40년간 끈질기게 연구한 업적을 뒤로 하시고.
그래서 이번 학기에 옥창준 교수님이 개설한 「한국의 정치학과 정치학자」 강좌를 통해, 정치학자로서 이완범이 그린 학문적 궤적을 탐구하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 주요 저서는 물론, 심지어 교수님의 석사학위(!) 논문까지 파묘하는 지독한 강의다. 최종적 목표는 후학이자 후배로서 「이완범 정치학」을 재구성하고 계승하기 위함이다. 다른 동료 학자의 글과 연구를 소화하여, 학문적 존경을 표하고 인색한 한국 학술 장의 풍토를 생각하면, 뜻깊은 시간이다.

[그림 1] (좌) 2024년 정치학 전공 답사 (우) 이완범 교수님 특강
정치적 정당성에 천착하다가, 어느새 18세기 조선까지 내려가 연구하셨다는 이하경 교수님은 「부산」적 비르투의 화신이다. 교수님의 호탕함과 솔직함, 그리고 따뜻함은 당신의 고향인 부산을 닮았기 때문이다. 교수님과 국가론의 주요 고전들을 꼼꼼하고 치밀하게 강독하는 한 학기 동안, 지적 성장을 체험할 수 있었다. 이제는 이론가들과의 지적 대결을 마다하지 않는다. (물론 당시에는 조금 힘들었다) 교수님이 곧 돌아오실 내년 봄이 기대되는 이유 중 하나이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별안간 강의실에 입장하시는 김원 교수님은 인상과는 달리, 무시무시한(?) 사람이다. 평범한 사람을 괴롭히고 짓이겼던 한국 현대사의 험악했던 시기와 국면을 연구하신다. 정치학에서는 여전히 생소한 구술사 연구 방법론으로, 당시를 체험한 사람들의 「기억」을 다루는 작업을 주로 수행하신다. 교수님은 기억은 「현재화된 과거」이자, 개개인의 말과 몸짓, 감정으로 체현된 구성물이라 늘 누누이 말씀하신다. 이번 학기에 수강하는 교수님의 「구술사 연구」 강좌를 통하여, 미시적 체험이 역사의 어떤 단면을 드러내고 연결되는지 고민하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
인류학 전공 정헌목ㆍ조일동 교수님, 종교학 전공 한승훈 교수님의 강의에서도, 인사이트를 획득할 수 있었다. 특히 제도와 합리성의 외곽에서 벌어지는 정치적 활동을 주시하는 나로서는, 인류학과 종교학으로부터 다양한 개념적 자원을 획득하는 좋은 기회들이었다. (가령 『중국 동남부의 종족 조직』을 완독한 정치학 박사과정생은 한국에서는 나 정도밖에 없을 것이다)
학제적 학습과 연구를 장려하는 연구원의 학풍 덕분이었다. 사실 누군가에게는, 어마어마한 일일 수 있다. 타과 전공은 물론 심지어 소속 학과에서 개설한 수업인데도, 이런저런 이유로 지도교수가 수강을 못마땅해하는 경우도 왕왕 존재하기 때문이다. 한국학대학원에서는 그런 치사한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
지도교수님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나는 지금 옥창준 교수님의 제자이다. 입학한 후 들었던 첫 수업은 옥창준 교수님의 「한국정치원전강독」이었다. 교수님은 상냥하고, 해사하다. 그러나 누구보다 날카로운 문제의식으로, 한국 학술 장의 구조를 비판하며 한국의 장소성(topos)과 지식의 관계를 고민하는 학자이다. 누군가 간혹 옥창준 교수님을 지도교수로 신청한 이유를 물을 때가 있다. 피부가 하얗고 잘생기셔서 신청했다고 대답한다. 물론 다른 이유도 있다. 교수님의 말과 글과 생각을 닮고 싶었다. 한국에서 정치학 공부하기를 선택한 나로서는, 옥창준 교수님은 모델이자 교범이다. 나의 실력과 역량이 닿아, 교수님이 꿈꾸는 장기 프로젝트의 일원이자 동료가 된다면, 더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그림 2] (좌)김성진 선배와의 폭설 데이트 (우)운동회
그러나 교수님들께는 송구하지만, 동료들이 나에게 가장 큰 즐거움이자 보람이다. 대학원 건물 모퉁이에서 줄담배를 피우며 주변부적 페이소스가 짙게 스민 블랙 유머를 함께 즐기는 김성진 선배, 돼지국밥이 부산인의 상상계 속 기표에 불과하다는 농담에 진심으로 흥분하는 표지영 선생, 말 한번 잘못 꺼냈다가 만날 때마다 「언제 같이 구청으로 가서 혼인신고를 할 것이냐」고 윽박지르는 민 민, 내가 눈치 없는 말과 행동을 할 때마다 커다래진 눈으로 「야!」 소리치는 무니라. 다음 학기에도 함께 강의를 수강하자고 선뜻 제안하는 친절한 종교학과 교우들, 내가 졸업하면 명예 인류학 박사학위를 비공식적으로나마 전달해 주겠다는 씩씩한 인류학과 전우들. 동료들이 없었다면, 연구원 생활이 적적했겠다.
3. 「걸어다니는 한국인」을 연구하는 정치학자
“자신의 성격ㆍ취향과 잘 어울리는 주제를 찾아낸 사람.” 성공적으로 학업을 마친 제자들의 공통점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한 후안 린츠(Juan Linz, 1926-2013)의 대답이었다.
놀라운 것은, 이완범 교수님도 린츠와 똑같이 대답하셨다는 사실이다. 얼마 전, 김성진 선배의 주도로 이루어진 이완범 교수님과의 퇴임 기념 2차 구술작업에 동석했다. 김 선배의 호의와 배려로 나도 질문 몇 가지를 덧붙일 수 있었다. 린츠의 인터뷰가 떠올라, 교수님께도 같은 질문을 했다. 이내 교수님도 린츠와 같은 대답을 하셨다. “자기와 어울리는 공부를 해야지.” 아, 역시 경지에 오른 대가는 상통한다고 생각하는 순간이었다.
그렇다면, 나와 잘 어울리는 주제는 무엇일까? 그 전에 나는 어떤 사람일까? 만약 내가 따뜻한 말로 가득한 칭찬을 다정하게 건네거나, 정해진 마감보다 하루나 이틀 정도 앞서서 과제를 착착 제출한다면, 주변 친구들과 교수님 모두 나를 걱정할 것이다.
나는 싸움과 대결, 결투를 늘 주시한다. 가령 갈등과 경쟁으로 환원할 수 없는 싸움, 굽이치며 점차 제어하기 어렵게 증폭하는 감정의 나선적 구조를 주목한다. 그리고 이것이 지독하지만, 외면할 수 없는 정치만의 독특한 형질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폭력으로부터 멀지 않았던 한국 현대사를 떠올리면, 여전히 현재적으로 고민할 사안이다.
이 싸움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다. 서로를 밀치고 상처를 낼 수 있는 「구체적 인간」들이 벌이는 「구체적 사건」이기 때문이다. 마치 윤석열 전 대통령과 12ㆍ3 비상계엄 사태처럼. 그리고, 제도와 문서, 통계 등은 「걸어 다니는 사람」이 몸소 체현하는 정치의 야누스적 면모와 비교하면 모두 우회적인 자료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이런 이유로, 나는 사료나 기록에 새겨진 죽은 사람들보다, 살아서 걸어 다니는 사람들이 궁금하다. 무언가 각자만의 이유와 신념, 세계관, 기억과 서사, 오해와 착각, 감정과 정동 등으로 손발을 부단히 움직이는 사람들과 대화하는 것은 언제나 흥미로운 일이다. 행동의 동기가 합리성의 범주와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요새 유행어로 「진짜 광기」를 마주할 때마다 가슴이 설레기까지 한다.
나는 「걸어 다니는 한국인」을 연구하는 정치학자가 되고 싶다. 정치 과정(political process)에 관한 연구는 제도와 규범, 법률을 주로 보며, 비공식적 상황과 요소를 부차적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나는 일상적인 실천 감각의 안팎과 연루하는 동학과 정학은 제도적 차원으로 환원할 수 없으며, 이것이 때로는 중대한 정치적 국면을 주조하는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예컨대 중요한 공공정책을 결정할 막대한 권한을 보유한 엘리트조차, 마주하는 일상을 헤쳐나가야 하는 인간 아닌가. 그들은 구조를 거시적으로 조망하며 행동을 결정하는 기계가 아니다. 엘리트도 결국, 제도로 환원할 수 없는 관계와 일상, 감정과 신념을 가진 「걸어 다니는 한국인」이다.
거리와 지하철, 직장과 학교, 동네 술집과 온라인 커뮤니티까지 오가며, 한국인들이 어떤 감각으로 세상을 지각하고, 어떤 언어와 상상으로 정치적 현실을 해석하며, 어떤 체험을 통해 국제관계와 국가를 몸으로 느끼는지를 추적하고 싶다. 수치로 표기되기 전의 한국인들, 말투와 몸짓, 농담과 욕설, 오해와 왜곡 속에서 정치가 어떻게 살아 움직이는지를 기록하는 정치학자. 영리한 주제 선택일지는 모르겠는데, 나의 성격과 취향에 잘 어울리기는 한 것 같다.
4. 어떤 위안과 위로들
정치학 전공 소속 동료들을 중심으로 운중동 동아시아 연구회, 줄여서 「운동회」라는 공부 모임을 따로 운영하고 있다. 김성진 선배의 제안으로 시작한 모임이었다. 우리는 모여서 사회과학 서적들을 함께 강독하고, 토론했다. 정치학은 물론, 사회학과 역사학, 인류학 등 다양한 분야의 서적들을 읽고 토의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림 3] (좌)운동회 (우)운동회 시국선언문에 댓글을 다시는 이완범 교수님
재미있게도, 운동회의 첫 번째 공식 작업은 12ㆍ3 사태에 관한 시국선언문이었다. 작년 12월 3일에 비상계엄 사태가 있었고, 이에 시국선언문을 작성하여 운동회의 이름으로 게재하자는 공감대가 만들어졌다. 그래서 운동회 회원 전원은 12월 11일 밤, 기숙사 식당에서 배달한 중국 음식을 함께 먹으며 시국선언문을 작성했다. 그리고, 대통령처럼 다음 날 새벽에 「기습적으로」 시국선언문을 배포했다. 지금도 여전히 우리 운동회 회원들이 작성한 시국선언문을 뛰어넘는 명문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림 4] (좌)운동회 공개세미나 포스터 (우)운동회 공개세미나
또한, 지난 8월에 문형관에서 제1차 공개 세미나를 개최하여 각자의 연구주제를 발표하고 공유하는 시간을 가졌다. 수료하거나 졸업한 선배들도 오는 꽤 큰 행사로 발전하여 성황리에 마쳤다. 다음에는 기억과 기록을 남기고자, 레터 작업을 추진하고 있다.
인류학 강의를 함께 수강하는 모 선생님이 식사 자리에서 했던 말이 생각난다. 나와 닮은 사람들과 함께 모였을 때, 비로소 드는 안도감과 위로가 있다고. 따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속으로 100% 동의했다.
한국의 정치학 학술 장에서 대안적인 관점과 연구를 개척하는 교수님들부터,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각자의 주제를 놓지 않고 꿋꿋이 공부하는 정치학 전공 동료들과 운동회 회원들, 그리고 다른 전공이지만 서로의 주제를 흥미롭게 들어주고 응원하는 종교학ㆍ인류학 전공 동료들까지. 운중동에는 온통 나와 모두 닮은 사람밖에 없었다. 그 덕분에 위안과 위로를 매일매일 얻으며, 나아가고 있다.
이 글은 어디에 있는지 모를 당신을 생각하며 썼다. 이 글을 읽을 당신은 우리 연구원과 대학원에 관심을 가질 수도 있고, 운중동의 한편에서 젊은 연구자들이 치열하게 연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수도 있다. 당신이 연구원이나 운동회 식구라면 공감할 수도 있고, 웃거나 머쓱할 수도 있겠다. 오늘 하루 위안과 위로를 얻기를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