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학 칼럼

19세기 서울 중인은 어떻게 살았을까?

      - 장서각 소장 『엄산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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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철민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왕실문헌연구실 연구원

   기록을 살펴본다는 것은 기록이 작성된 시대를 엿보는 것이다. 한국에 전래되는 다양한 문헌은 저마다 편찬된 시대의 특징을 반영하고 있는데, 이 중에서도 일기는 기록주체의 배경, 처한 환경을 세세히 살펴볼 수 있는 문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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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 작성된 일기는 사대부 남성이 주로 작성하였지만, 남평조씨(南平曺氏)의 『병자일기(丙子日記)』와 같이 여성이 저술한 일기도 존재하며, 내용에 따라 생활일기, 전란일기, 유람일기 등으로 분류되기도 한다. 이 중 생활일기는 일상 생활 속에서 자신이 겪은 일과 소회 등을 기술한 유형이다. 장서각에 소장된 여러 문헌 중 『엄산일기(弇山日記)』(K2-901)는 조선시대 의관(醫官)이 작성한 개인 생활일기로, 서울에 세거한 중인(中人)의 삶을 담고 있다.


   조선시대 서울에 세거한 중인들은 사역원(司譯院), 전의감(典醫監), 관상감(觀象監), 사자관청(寫字官廳), 도화서(圖畫署) 등 다양한 기관에 소속되어 행정실무를 담당했는데, 그들끼리 혼맥을 이루고 대를 이어 특정한 관직에 나아갔다. 일제강점기에는 문학, 음악, 미술, 서예 등 다양한 분야로 진출했는데, 대표적인 사례로 현진건(玄鎭健, 1900~1943), 오세창(吳世昌, 1864~1953), 고희동(高羲東, 1886~1965), 최남선(崔南善, 1890~1957) 등을 거론할 수 있다.
   중인에 대한 연구는 다양하게 이뤄져 왔지만, 그들의 생활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기록은 그리 많지 않다. 2000년대에 들어 역관(譯官) 현탁(玄鐸, 1813~1887)이 남긴 일기 1책이 학계에 알려졌고 최근에는 역관 백시용(白時鏞, 1864~1940)의 일기인 『장암일기(藏菴日記)』가 역주되는 등 점진적으로 서울 중인의 생활상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가 알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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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서각에 소장된 『엄산일기』는 서울 중인 중 한 명인 엄산(弇山) 현재덕(玄在德, 1771~1833)의 친필 일기다. 현재덕은 본관이 천령(川寧)이며, 역관 현후(玄㷞)의 차남(次男)으로 태어났다. 자는 사열(士說), 호는 엄산인데, 내의원 의관, 서예가 등으로 활동하였다. 현재덕은 글씨를 잘 쓰기로 유명했으며, 그의 독특한 필체는 엄산체(弇山體)라고 불렸다. 장서각 소장 『엄산일기』는 현재덕이 남긴 친필본으로, 현재 확인되는 서울 중인의 생활일기 중 가장 오래됐으며, 가장 방대한 분량을 자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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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럼 현재덕은 왜 일기를 작성했을까? 이는 현재덕의 차남 현탁의 일기인 『석번일기(石樊日記)』를 통해 알 수 있다.


증조부 지사부군(知事府君)께서 『동암일기(東巖日記)』를 저술하셨으니, 영조 갑자년(1744)부터 정조 무오년(1798)까지 55년 간이라. 집안의 생졸(生卒), 과환(科宦), 가취(嫁娶)와 이외 전할만한 일을 하나하나 기록하여, 마침내 집안에 전래되는 문헌을 이루었다. 그러나 기미년(1799) 증조부께서 세상을 떠나시고, 조부 지사부군께서 『희와일기(喜窩日記)』를 이어 지으시니, 순조 무인년(1818)에 이르기까지 모두 20년이다. 그 다음해인 기묘년(1819)에 조부께서 세상을 떠나시고, 아버지께서 (일기를) 이어 저술한다는 생각으로 또 기묘년 봄부터 세세한 것을 모두 기재하여 『엄산일기』를 완성하셨으니, 계사년(1833)년까지 모두 15년이다. … (曾王考知事府君, 著『東巖日記』, 起自英宗甲子(1744), 至正宗戊午(1798), 凡五十有五年之間. 堂內之生卒、科宦、嫁娶, 外此而亦可以傳後之事, 一一記載, 遂成傳家之文獻. 而己未(1799)曾王考捐世, 王考知事府君, 繼修『喜窩日記』, 至于純祖戊寅(1818), 凡二十年. 翌年己卯(1819), 王考考終, 先府君, 以繼述之思, 又從己卯春, 纖悉載錄, 著成『弇山日記』, 至于癸巳(1833), 凡十五年. ….)


   현탁의 일기를 통해 현재덕은 집안 대소사를 기재하여 후손들이 참고하게끔 하기 위해 집안 어른으로서 일기를 저술한 것이며, 해당 집안에서 대를 이어 지속적으로 일기를 작성한 사실도 볼 수 있다. 현탁의 일기에는 1819년부터 1833년까지 현재덕이 일기를 작성한 것으로 기술하고 있지만, 실제 장서각의 『엄산일기』는 1803년부터 1833년까지 약 30년간 작성되었다. 이로 볼 때 현재덕은 1819년 이전까지는 개인의 일기를, 1819년부터는 집안의 어른으로서 일기를 작성하였으리라 추정된다.


   1803년부터 1833년까지 약 30년간 현재덕의 삶이 기재된 『엄산일기』에는 서울 중인들이 사대봉사(四代奉祀)를 한 기록이 있어, 서울의 중인들도 『주자가례(朱子家禮)』의 영향을 받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자녀의 성장을 바라보는 부모의 시선을 엿볼 수 있다.


1803년 7월 7일: 갑아(鉀兒)가 가관(加冠)하였다.
1803년 7월 20일: 갑이 혼례를 치뤘다.
1804년 5월 25일: 갑이 『당시(唐詩)』 칠언고시를 읽기 시작하였다.
1804년 10월 10일: 갑이 『통감(通鑑)』을 숙독(熟讀)하여 읽게 가르쳤다.
1805년 1월 18일: 갑이 이유신(李幼新) 집에 있는 오석사(吳碩士)에게 수학(受學)하였다.
1809년 10월 28일: 갑이 증광의과(增廣醫科) 초시에 합격하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1809년 12월 10일: 갑이 의과 회시에 나아갔으나, 낙제하였다.
1810년 10월 10일: 갑이 의과 초시에 3등 제1인으로 붙었다.
1810년 12월 7일: 갑이 의과 복시에 나아가 갑과(甲科)에 합격했다. 매우 기특하고 기쁘다.
1810년 12월 16일: 갑이의 의과 합격을 알리는 방목이 나온 뒤, 고유제를 행하였다.
1811년 1월 23일: 오늘 정사(政事)가 있었다. … 갑이가 처음 참봉에 부임하였다.
1813년 5월 29일: 갑이가 질병으로 휴가를 받았다.


   위 기록은 현재덕이 자신의 장남 현갑(玄鉀, 1790~1814)에 대해 남긴 기록이다. 일기에는 아들이 관례(冠禮)를 치르고 관직을 제수받는 모습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시선이 녹아 있다. 『엄산일기』에서 현갑은 질병을 겪던 모습을 마지막으로 존재를 드러내지 않는데, 25세인 1814년에 사망한 것으로 보아 병환으로 세상을 떠난 것으로 보이며, 아버지인 현재덕은 자식의 사망 소식을 일기에 차마 기재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엄산일기』를 통해 조선시대 살았던 서울 중인의 인간적인 면모를 느낄 수 있다. 이 외에도 현재덕의 『엄산일기』에는 내의원 의관으로서의 삶, 『열성어제(列聖御製)』와 『홍재전서(弘齋全書)』의 간행에 참여한 관원으로서의 삶, 서예가로서의 모습이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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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현재덕의 필적(전남대학교 소장 『현엄산선생재덕진묵(玄弇山先生在德眞墨)』)


   서울 중인들은 조선시대 외교, 의술, 천문학 등 특정 분야에서 중추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또 서양의 문물을 접했을 때에는 문학 및 예술 등 다양한 분야에서 첫 발걸음을 디디기도 했다. 중인의 일기는 조선시대 특정 분야의 엘리트들이 자신의 삶을 후세에 전하는 기록이었으며, 장서각 소장 『엄산일기』는 그 중에서도 가장 풍부하면서도 가장 오래된 서울 중인 생활일기로서의 가치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